사람사는 이야기

혼자 넘은 대관령 - 유감(遺憾)

難勝 2009. 3. 14. 06:23

'늙으신 어머니를 고향에 두고

 외로이 서울 길로 가는 이 마음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신사임당의 사친시(思親詩)로 유명한 대관령은 해발 832m 높이의 백두대간 고갯길이다.

서울과 강릉을 잇는 옛 영동고속도로의 마지막 고개로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산줄기는 이곳부터 조금씩 낮아져서 대관령이 되어 동쪽으로는 강릉과 통한다'고 기록했다.

대관령은 백두대간에서 가장 교통량이 많은 고갯길이다.

지금은 7개의 터널과 최고 90m 높이의 교량 33개로 이루어진 새 영동고속도로를 통해 손쉽게

서울과 강릉을 오갈 수 있다.

하지만 7년 전만해도 아흔아홉 굽이로 이루어진 13㎞ 길이의 옛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구간을

돌고 돌면 현기증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길은 새 길에 자리를 내줘야 할 숙명을 안고 태어난다.

새 영동고속도로에 자리를 내주고 456번 지방도로로 전락한 옛 영동고속도로가 그렇다.

옛 영동고속도로도 거슬러 오르면 대관령 옛길이 자리를 내어준 덕분에 태어났다.

새로운 세대에 자리를 내어주고 물러나는 인간사를 빼닮았다고나 할까.

평창군과 강릉시 경계에 세워진 대관령에 서면 크고 작은 산줄기 너머 강릉 시가지와 동해가 아스라하게 보인다.

연산군 때의 풍류객 성현은 이 풍경을 보고

'대관령이 공중에 솟아 여러 산의 아비인데, 새끼 산이 동쪽으로 줄기줄기 뻗었네'라고 노래했다.

대관령 옛길의 역사는 올해로 499년.

조선 중종 때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한 고형산이 1511년 1월19일 오솔길을 넓혀 옛길을 개설했다고 전한다.

고형산은 임기가 끝난 후에는 사비를 들여 우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넓혔다.

1504년에 태어난 신사임당이 친정을 오갈 수 있었던 것도 고형산이 길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강릉 사람들은 대관령을 '대굴령'이라 부른다.

고개가 험해 오르내릴 때 '데굴데굴 구르는 고개'라는 뜻에서 그렇게 불렀다.

그 '대굴령'을 한자로 적어 '대관령'(大關嶺)이 되었다.


대관령 오솔길은 1917년 8월 옛길로 전락한다.

조선총독부가 오솔길 일부 구간을 넓혀 신작로를 만들면서 서서히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것이다.

옛길처럼 신작로도 1940년 때까지는 산적이 우글우글했다고 전한다.

주문진에서 명태를 싣고 대관령을 넘는 목탄차는 어김없이 통행세 명목으로 푼돈이나 명태 궤짝을 산적들에게 건넸다.

재미있는 사실은 목탄차의 시동이 꺼지면 산적들이 고갯마루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차를 밀어줬다고 하니 그들은 산적이라는 이름의 정 많은 건달이었던 셈이다.

대관령 아흔아홉 굽이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온다.

과거길에 오른 어느 선비가 대관령 고갯길을 넘을 때 곶감 한 접을 지고 갔다고 한다.

하지만 워낙 고갯길이 험해 산모롱이를 돌 때마다 곶감을 하나씩 빼먹었는데 정상에 도착하니 곶감이 한 개만 남아 "길은 옛길이로되 고개는 아흔아홉 고개로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혹자는 이 선비가 율곡이라고 한다.

하제민원터 아래에 위치한 원울이재는 울고 넘던 고갯길로 영동으로 발령받은 관원들이 멀리 푸른 바다가 보이자 세상 끝에 당도했다는 설움에 눈물을 흘리고 떠날 때는 정 때문에 울며 넘었다는 고개다.

 

 

그 고개를 혼자 넘어오는 마음이 사임당이나 관원에게 비할까만은,

편치 않았슴은 사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