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刹那와 겁劫
불교에서 시간의 개념은 가히 정의 내리기가 어렵습니다.
겁(kalpa)처럼 긴 시간이 있는가 하면 찰나(kasana)처럼 짧은 시간도 있기 때문입니다.
겁은 우리가 알고 있는 숫자로는 도저히 표현이 불가능한 시간 개념입니다.
그래서 흔히들 겁을 설명할 때 겨자씨나 반석을 동원하여 겨자겁(芥子劫) 또는 반석겁(磐石劫)이라 합니다.
한 변이 일 유순인 입방체로 된 성안에 겨자씨를 가득 채우고 그것을 100년에 1개씩 꺼내서
다 없어지는 시간을 겁이라 합니다. 일 유순은 약 1백리 정도의 길이를 말합니다.
또는 한 변이 일 유순인 입방체의 큰 바위가 있는데, 백년에 한 번씩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의 옷이 스쳐 바위가 다 닳아 없어지는 시간을 겁이라 하기도 합니다. 여기에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를 곱한 시간을 아승지겁이라 합니다. 갠지스 강가에 있는
모래알의 수만큼 많은 시간, 인간의 능력으로는 헤아릴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는
이 엄청난 시간이 불교에서 말하는 시간의 개념입니다.
이와 반대로 찰나는 극히 짧은 순간을 말합니다. 역시 이것을 측량하기란 범부의 일 밖입니다.
그 짧기가 현대의 시간법으로 계산해 보면 75분의 1초 정도 된다고 하니, 살아있으면서도
감지할 수 없는 최단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 설명하는 최장(겁)과 최단(찰나)의 시간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 줍니다.
겁이라는 긴 시간은 끊임없이 생사의 고통을 받고 윤회의 바퀴를 굴리면서 과보를 받고
있는 중생의 삶을 일깨워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찰나는 우리의 인생살이가
겁에 비한다면 참으로 번갯불보다 빠르고 순간적인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무상한 우리의 삶의 본질을 가르쳐 주고 또 집착하는 삶,
욕심 부리는 삶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람의 인생살이는 고작해야 100년이 채 못 됩니다. 아승지겁에 비하자면 극미진의 시간입니다.
이 짧은 시간에도 우리는 많은 과오를 범하기도 하고, 또 악업을 짓기도 하며 아둥바둥 살아갑니다.
열심히 정진하고 공부해서 윤회의 바퀴를 멈추게 하는 일에서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겁이라는 긴 시간 동안 계속해서 생사의 고통을 반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결코 길지 않습니다. 번개보다 빠르고 숨 한 번 내쉬는 것보다 짧은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무상한 시간, 찰나의 삶을 어떻게 꾸려나가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만 합니다.
100년도 짧은 세월인데 하물며 하루하루, 한 달, 일 년은 얼마나 짧은 시간이겠습니까?
탐진치 삼독에 젖어 업장을 두껍게 하는 일로 금쪽 같은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업의 반연을 닦아내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자신의 허물을 먼저 살핀 뒤, 가족을 배려하고 이웃을 생각하는 아량을 키워야 합니다. 자비와 보시를 베풀고,
지혜와 공덕을 쌓는 일에 신심(身心)을 써야 합니다. 찰나 찰나 마다 이러한 삶이 연속된다면
무량의 겁 또한 이와 같아서 행복의 문은 저절로 열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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