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천에 있는 은해사 현판 글씨(탁본)다.
1847년 팔공산 은해사에 큰불이 나서, 모든 사중의 전각이 불에 탔다.
이때부터 3년간의 큰 불사로 다시 전각을 세우고, 누구의 부탁인지 자세히 모르지만, 은해사의 절 현판을 비롯하여 대웅전, 불광, 보화루의 현판을 추사가 썼다.
이 현판은 추사가 제주도에서 해배되어 서울로 돌아온 1849년 정월에서 다시 1851년 가을 북청으로 유배 갈 때까지 약 2년간의 서울 생활 동안 쓴 것으로 추측된다. 추사 나이 64-65세 때다.
은해사와 보화루 글씨는 좀 어리숙하여 글씨를 처음 배운 초보자의 글씨 같지만, 추사의 온 힘을 다 쏟아 부은 강건한 힘이 그 속에 숨어 있다. 특히 ‘銀 은’자의 결구는 한 치의 빈틈도 없고, 내려 그은 획은 강철을 구부려 놓은 듯하다.
(기사 펌)
팔공산(八公山)의 명찰인 영천 은해사(銀海寺)는 조계종 25교구 본사 중 하나로,
거느린 암자만도 8개나 된다, 이 암자들은 웬만한 절집보다 규모가 크고, 선방으로서
명성도 높으며 연륜이 깊어 백흥암(百興庵)의 수미단(須彌壇), 운부암(雲浮庵)의 청동
관음보살상, 거조암(居祖庵)의 영산전(靈山殿)과 오백나한상 등은 오래전부터 나라의
보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은해사 큰 절 자체에는 이렇다 할 불교문화재가 남아 있지 않다. 그것은 1847년
대화재로 극락전을 재외한 1000여 칸이 모두 불타버렸기 때문이다.
다행히 당시 주지였던 혼허(混虛)스님이 3년여의 불사(佛事)를 일으켜 오늘날까지 그
사격(寺格)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은해사에는 뜻밖의 문화재가 생겼으니 그것은 추사의 현판 글씨이다.
혼허 스님은 새 법당에 걸 현판 글씨를 모두 평소 가깝게 지내던 추사 김정희에게 부탁
했던 것이다. 문루의 '은해사' 현판은 물론이고, 불전의 '대웅전(大雄殿)', 종루의 '보화루
(寶華樓)', 조실스님의 거처인 '시홀방장(十笏方丈)', 다실인 '일로향각(一爐香閣)', 백흥암
에 있는 여섯 폭 주련(柱聯), 그리고 추사 글씨 중 최대작이라 할 '불광(佛光)' 모두가 추사
의 작품이다.
특히 은해사 현판은 추사체 형성과정에서 중요한 기준작이 된다. 당시 추사는 9년간의
제주도 귀양실이에서 풀려나 용산 한강변[江上], 마루도 없는 집에서 간고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칭송해 마지 않는 추사체는 바로 이때 완성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은해사 추사 현판 중 특히 '大雄殿' 글씨는 강철 조각을 오려놓은 듯한 추사체의 전형이다.
박규수의 평대로 "기(氣)가 오는 듯, 신(神)이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드는 듯" 한 감동이
일어난다.
눈있는 사람들은 이것을 반가워했다. 다산 정약용의 강진 유배시절 제자인 이학래(李鶴來)는
영천군수가 되자 은해사를 찾아와 한차례 이 현판을 보고 놀라웠다고 했다.
또 최완수 선생은 "무르익을 대로 익어 필획의 변화와 공간배분이 그렇게 절묘할 수 없다" 고
했다.
은해사는 가히 추사글씨의 야외전시장이라고 할 만한 곳이다
옮긴 글 - [유홍준의 국보순례]중 '은해사(銀海寺) 현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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