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전통음악의 역사

難勝 2009. 10. 15. 03:43

전통음악의 역사 


  1. 삼국 시대의 음악

    1) 고구려: 서역 음악이 수입되어 횡적, 막목, 공후 등의 서역 악기가 사용되었다.

    2) 백 제: 불교와 더불어 음악을 일본에 전파

    3) 신 라: 가야금이 우륵에 의해 신라에 들어왔으며 음악 관장 기관으로는 음성서가 있었다. 통일 신라 음악은 삼현 삼죽이 중심


  2. 고려 시대 음악

    1) 아악: 송나라에서 천지인의 제사에 필요한 음악과 악기가 수입

    2) 당악: 고려 중엽에 수입되었고, 좌방악 이라고도 하여 궁중의 연례에 사용

    3) 향악: 순수한 우리 음악으로 사모곡, 청산별곡, 가시리 등의 향악이 발전


  3. 신라 시대의 음악

    옛 진한 땅 경주 지방의 사로국에서 발전한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늦게 왕국을 건설하여 4세기 후반에 이르러 그 세력이 막강하였고, 6세기에 가야국들을 병합하였으며, 7세기에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삼국을 통일 하였다. 신라(B.C. 57년 ~ A.D. 935년) 음악은 통일 이전의 음악과 통일 이후의 음악 두 시기로 나눈다.  통일 이전의 신라 음악은 가야고로 연주하던 음악과 향가가 있었다.

    1)가야고(가야금)와 음악

      가야고는 6세기 전반 대가야국의 가실왕(嘉實王)이 당나라의 악기를 보고 만들었다. 왕은 우륵으로 하여금 12곡을 작곡하도록 하였는데, 후에 나라의 전란으로 우륵은 가야고를 가지고 진흥왕(540년 ~ 576년)이 통치하던 신라로 망명하였다. [삼국사기]는 우륵과 가야고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가야고는 가야국의 가실왕이 당나라의 악기를 보고 이것을 만들었다. 왕이 '모든 나라의 방언이 각기 다른데 어찌 음악이 같을 수 있는냐' 하고 이에 성열현 사람인 우륵에게 명하여 12곡을 작곡하도록 하였다. 후에 우륵은 가야국에 전란이 일어나자 가야고를 가지고 신라 진흥왕에게 망명하였다. 왕은 그를 받아들여 국원(國原)에 살게 했는데, 왕은 대나마(大奈麻)인 주지와 계고, 대사인 만덕을 보내 음악을 전수받게 하였다. 세 사람이 이미 배운 12곡이 모두 빠르고 음란하고 아정하지 못하다 하여 드디어 5곡으로 줄였다. 우륵은 이 말을 전해 듣고 처음에는 노했으나, 그 다섯가지 음악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탄복하되, '즐거워도 지나치지 않고 슬퍼도 비감하지 않으니 이 또한 바른 음악이 아니냐' 말하고 왕 앞에서 연주하니 왕이 듣고 매우 기뻐하였다.'

[삼국사기]의 기록으로는 가실왕이 중국의 당나라 악기를 보고 가야고를 만들었다고 하였으나 대 가야국의 옛 땅인 진한에 '슬'이라는 '고'가 있었으므로 가야고는 '고'를 개량한 악기가 아닌가 추측된다.

    2. 향가

      민간에서 노래했던 신라의 가요는 향가(鄕歌)이다. 진성여왕(887년~897년)때 위홍(魏弘)과 대구화상(大矩和尙)에 의해 향가를 수집 편찬한 향가집인 [삼대목](三代目)이 없어져 찬란한 신라의 노래를 잃어버렸으나, 일연(一然)이 지은 [삼국유사]에 14수, 균여가 지은 [균여전]에 11수 등 25수가 가사로 남아 있고 [고려사]에 7수, [증보문헌비고] 등에 향가의 제목만 전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음악의 형태나 악기의 숫자, 노래와 춤의 모양도 알 수 없다.


  4. 백제의 음악

    선사 시대의 마한땅을 중심으로 왕국을 건설한 백제는 고대 음악을 알 수 있는 역사적 자료가 부족하여 음악에 대한 내용을 잘 알기 어렵다. 선사 시대로부터 있어 온 제천 의식과 백제인들이 불렀던 노래들이 일시에 없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며, 게다가 남부 중국과 교역함으로써 음악이 상당히 발전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백제(B.C.18년 ~ A.D. 660년) 음악 전체를 한 시기로 묶는다.

    1) 백제 음악에 쓰인 악기

       약 4세기 이후 백제는 고(鼓-북), 각, 공후, 쟁, 우, 지, 적으로 연주하는 음악이 있었다. 이 악기들은 중국의 남부와 북부의 악기로 나눌 수 있다.

남부악기 - 공후, 쟁, 우, 지, 적

북부악기 - 고, 각

북 종류인 고와 뿔피리 일종의 각은 고구려에서도 사용한 악기이다. 이 악기 외에도 6세기 이후에는 도피리, 횡적, 군후, 막목 등이 연주에 편성되었다.

    2) 정읍과 가요

      백제인들이 불렀던 노래는 정읍, 선운산, 방등산, 무등산, 지리산 등이 있으나 가사는 전하지 않는다. 백제는 기악과 노래외에도 산대도감놀이와 봉산 탈춤의 전신인 기악무도 공연하였다.


  5. 통일 이후의 신라 음악

  통일 이후(A.D.7세기 ~ 10세기)의 신라 음악은 매우 다양한 음악 양상을 보이고 외국 음악과 놀이가 들어오는 등 풍요하게 발전하였다.

    1) 3현 3죽과 음악

       3현 3죽은 가야고, 거문고, 향비파의 3현과 소금, 중금, 대금의 3죽을 말한다. 3현중에서 가야고는 통일 이전과 같이 기악 형태로 연주되었고 또 노래와 춤에 편성되어 연주되었다. 문무왕 8년(668년) 신라가 통일되었는데, 거문고는 이 당시에 고구려로부터 전해진 것 같다. 그 뒤 거문고가 연주되지 않고, 신기(神器)로 간주되어 월성(月城) 천존고(天尊庫)에 보관되어 오다가 9세기경부터 일반인들이 연주 악기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삼국사기]에 거문고가 들어온 이후 악기로 사용하기까지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라 사찬 벼슬을 가진 공영의 아들 옥보고가 지리산 운상원에서 50년간 거문고를 익혀 스스로 30곡을 작곡하여 이를 속명득에게 전하였는데, 속명득은 다시 귀금선생에게 전하였고, 귀금선생은 역시 지리산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신라왕은 금도(琴道)가 단절될 것을 두려워하며 이찬 벼슬의 윤홍으로 하여금 그 음악을 전수받기 위해 남원 공사로 임명하였다. 윤홍이 부임하여 안장과 청장 등 총명한 두 소년을 뽑아 지리산에서 거문고 음악을 전수받도록 하였다. 귀금선생은 그들에게 거문고를 가르쳤으나, 비곡(秘曲)은 전하지 않았다. 그래서 윤홍은 부인과 함께 귀금선생에게 가서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나를 남원에 파견한 것은 선생의 음악을 전수받게 하고자 함인데 3년이 지나도 비곡을 가르쳐 주지 않으니 내가 왕에게 무엇이라 말하리이까' 하고 부인과 더불어 모든 예의를 갖추에 되니 비로소 표풍(飄風)등 3곡을 전수하였다. 안장은 그의 아들 극상과 극종에게 그 음악을 가르쳤고 극종이 7곡을 작곡했는데, 극종 이후로는 거문고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당시 거문고 곡은 187곡이 연주되었고, 평조(平調)와 우조(羽調)로 되어 있으며, 옥보고가 작곡한 거문고 곡 30곡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3현 중 향비파는 서역 지방에서 고구려로 들어온 오현이 신라에서 당비파와 구별하기 위해 향비파라고 불렀다. 당비파는 4줄과 손 짚는 지판 위가 구부러졌으나 향비파는 5줄과 지판이 곧게 뻗어 있는 점이 다르다. 향비파 곡은 모두 212곡이 있었고, 궁조, 칠현조, 봉황조를 사용하였다. 3죽은 소금, 중금, 대금을 말하는데 누가 만들었는지 알 수 없으나, [삼국유사]에 신화적인 유래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문왕 때 동해중에 홀연히 산 하나가 나타났는데 그 모양이 거북이 머리와 같았다. 그 위에 한 대나무가 있었는데,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하나로 합하니, 왕이 이것을 꺾어 적(笛)을 만들고 만파식(萬波息)이라 이름했다.' 또한 이 악기를 거문고와 함께 천존고에 보관해 두었는데 이 악기를 불면 바람이 가라앉고 물결이 평정해진다고 하여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3죽은 고구려에서 전해온 듯 하다. 소금은 298곡, 중금은 245곡, 대금은 324곡이 있었으며, 각각 평조, 황종조, 이아조, 월조, 반섭조, 출조, 준조의 7조로 되어 있다. 간인과 날인현이 3현 3죽 편성으로 노래하였는데, 악(樂), 가(歌), 무(舞)가 완전히 분리되지 않은 시대였으므로 3현 3죽은 여러 형태로 연주되었을 것이다. 이밖에도 당나라에서 들어온 박(拍)과 대고(大鼓: 큰북)가 사용되었다.

    2) 향 가

무열왕(654년 ~ 661년) 때 양산가(陽山歌)

문무왕(661년 ~ 681년) 때 원왕생가(願往生歌)

효소왕(692년 ~ 702년) 때 모죽지랑가(摹竹旨郞歌)

성덕왕(702년 ~ 737년) 때 헌화가(獻花歌)

효성왕(737년 ~ 742년) 때 원가(怨歌)

경덕왕(742년 ~ 765년) 때 도솔가. 산화가(散花歌)

원성왕(785년 ~ 798년) 때 우적가(遇賊歌). 신공사뇌가(身空詞腦歌)

홍덕왕(826년 ~ 836년) 때 앵무가(鸚鵡歌)

경문왕(861년 ~ 875년) 때 현금포곡(玄琴抱曲)

헌강왕(875년 ~ 886년) 때 처용가(處容歌)

경애왕(924년 ~ 927년) 때 번화곡(繁花曲)

경문왕(927년 ~ 935년) 때 망국애가(亡國哀歌)

이밖에도 원효대사가 지은 무애가, 월명사의 제망매가, 충담사의 안민가, 찬기파랑가와 희명이라는 여인이 지은 도천수관음가 등이 있다.

    3) 춤과 연희

      하신열무(下辛熱舞), 사내무(思內舞), 상신열무(上辛熱舞), 소경무(小京舞), 한기무(韓岐舞), 미지무(美知舞), 대금무등이 있었으며, 하신열무 등 4편의 춤은 가야고와 노래 춤의 종합예술이었고, 한기무 등 세 편은 가야고 편성의 춤이었다. 이밖에 화랑 관창의 가면을 쓰고 춘 검무와 원효대사가 파계하여 각 고을을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춤을 춘 무애무가 있다. 팔관회가 열였는데 하늘과 명산, 큰 강이나 용신 등 토속신에게 제사하고 국가와 왕실의 태평 행복을 기원하며, 화랑에 의해 노래와 춤 놀이를 하였다. 흔히 제사는 11월에 거행하고 이 날에 모든 백성들이 함께 즐기는 행사였다. 학자 최치원(837년 ~ 876년)이 쓴 시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향악잡영 5수]로서 이 시를 통해 다섯가지 놀음과 이에 따르는 음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섯 가지 놀음은 금환, 월전, 대면, 속독, 산 예인데, 금환은 백제의 농주(弄珠)와 우륵의 12곡 중 보기와 유사한 공놀이 또는 오자미의 일종이고, 월전은 재담, 대면은 탈춤, 속독은 춤, 그리고 산예는 우륵의 12곡 중 사자기와 같은 사자춤이다. 또 금환, 대면은 중국계통의 놀이이고, 월전, 속독, 산예는 서역 계통의 놀이지만 음악은 알 수 없다. 최치원의 시는 서역악이 신라에 들어왔다는 증거가 되는데,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돌아온 헌강왕 11년(885년) 이후에 시를 썼고 향악이라고 말한 점에서 중국 음악과 서역악이 9세기말에 향악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불교음악 범패

       불교 음악은 절에서 재를 올릴때 부르는 범패(梵唄)와 포교를 위해 우리말로된 화청(和請)과 회심곡(回心曲)이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경덕왕 19년(760년) 국선(國仙)에 속한 월명사가 '향가는 알지만 범패는 부를 줄 모른다.'는 기록에서 8세기 중엽 범패가 신라에서 가창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범패를 부르는 범패승과는 달리 원효대사가 무애가를 부르며 춤을 춘 것은 포교를 위한 거사(居士) 소리가 있었음을 말해 준다. 범패의 기록은 옥천사에 세운 진감선사(眞鑒禪師)의 [대공탑비문]에 범패의 오묘함을 배우려는 사람이 많다는 내용이 처음이다.

진감선사는 애장왕 5년(804년) 당나라에서 불도를 닦고 27년만인 홍덕왕 5년(830년)에 귀국하여 옥천사에서 불법과 범패를 가르쳤으므로 범패는 늦어도 9세기 신라 사찰에서 널리 가창되었을 것이다. 당시 적산원(赤山院)에는 대중이 석가를 칭송하는 회중가의 신라풍과 당나라에서 부르던 당풍, 그리고 당나라의 범패보다 더 오랜 고풍의 세 범패가 있었는데, 신라의 범패는 신라풍과 고풍의 두 양식의 음악이 가창되었다고 본다. 범패 자료는 [동음집](同音集)과 1931년 출간된 [석문의범](釋門儀範)이 있다.

    5) 당악이 들어옴

       문무왕 4년(664년) '성천(星川)과 구일(丘日)등 28명이 부성에 가서 당악을 배웠다.' 고 한다. 신라가 통일한 것은 668년이고 부성에 당나라 군대가 주둔했던 점으로 보아 이때 배운 당악은 고취(궁중 의식이나 군대 행진에 연주되는 일종의 취주악) 형식의 음악일 것이다.

삼현삼죽 음악에 사용된 궁조, 월조, 반섭조 등 당악의 조이름을 사용하고 여러 유적에서 나타난 악기들을 보면 당악이 많이 들어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고, 요고, 횡적, 당비파와 퉁소, 쟁, 소, 생, 당피리, 적(笛), 박판, 공후 등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6) 음성서 설치

       국가가 안정되고 문화가 팽창됨에 따라 신라의 궁정은 의식을 제정하여 집행하게 되고, 의식에는 음악 연주를 수반할 수밖에 없게 된다. 궁중의 의식 음악은 예고됨이 없이 항상 열리는 것도 있으므로 음악인을 궁중에 상주시켜 연주, 행정, 교육을 담당할 음악 기관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음악 기관이 음성서(音聲署)이다. 음성서가 설치된 연도는 확실하지 않으나 진덕왕 5년(651년)에 음성서의 관리를 임명했는데, 음성서는 늦어도 진덕여왕 이전 7세기 중엽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한다.

음성서와 관직의 내용을 표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6 조선시대 음악


  음악 관장 기관으로 아악서, 전악서, 장악원이 있었고, 박연이 아악 정리, 맹사성이 향악을 정도전, 하륜, 성균관 박사 등의 창작활동으로 많은 음악의 발전,  세종때 정간보, 세조때 오음악보 등을 창 안 하였고, 숙종때 판소리가 발생하여 많은 성악곡이 싹트게 되었다.


  7. 근대 음악

선교사에 의해 서양 음악이 전파되고 많은 수난 속에서도 국립 국악원 국악사 양성소 등이 설치되고 많은 연주 단체가 생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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