尋劍堂

연종집요(蓮宗集要) - 큰 스님들이 보는 염불

難勝 2009. 11. 2. 04:29


(3). 감산대사(憨山大師)

감산대사는 말하기를 참선[叅禪)하는 이가 많으나 반드시 생사(生死)를 벗어나는 것 아니고 염불하는 이는 생사에서 벗어날 것을 의심할 것 없나니 왜냐 하면 참선은 상(想)을 여의기를 요하나 염불은 오로지 상(想)에 있는 것인데 중생이 오랫동안 망상(妄想)에 침륜(沈淪)하여 이 상(想)을 여의기가 매우 어려우므로 만일 염상(念想)으로써 정상(淨想)으로 변하면 이것은 독(毒)을 다스리는 것을 바꾸어 놓는 법이다 그러므로 참구(叅究)는 깨닫기가 어렵고 염불은 이루기가 쉬운 것이다]하였다.


(4). 왕룡서거사(王龍舒居士)

왕룡서거사는 말하되 [참선(叅禪)하여 크게 깨달아서 생사(生死)의 윤회(輪廻)를 벗어나는 것이 진실로 상(上)이 되거니와 이에 이르는 이가 百에 二,三인도 없고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닦으면 윤회를 벗어나 생사(生死)가 자여(自如)하여 萬에 하나도 빠지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나는 승가(僧家)의 상근기(上根器)에 권하고져 하는 것은 참선하는 외에 매일 짤막한 겨를을 내어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권하고 싶다 만약 참선하여 크게 깨달아서 윤회를 벗어났다 하더라도 오히려 불지(佛地)와 떨어진 거리가 극히 멀고도 멀으므로 다시 아미타불을 가서 뵈옵고 전례(展禮)하여 치경(致敬)하는 것이 무엇이 불가(不可)하며 만약 크게 깨닫지 못하고 수수(壽數)가 문득 다하여 명종 하더라도 서방에 가서 부처님을 뵈옵고 법을 들으면 어찌 크게 깨닫지 아니할 것을 근심 하리오 만약 정토를 닦지 아니하면 업연(業緣)을 따라 가는 것을 면치 못하는 것이므로 청초당(靑草堂) 오조계선사(五祖戒禪師) 진여철(眞如喆)도 윤회에 골몰하였으니 참으로 가외(可畏)한 일이다 만일 이 도를 정심(情心)으로 닦아 사람을 화도(化導)하고 다시 서로 권화(勸化)하게 되면 사람들이 자기를 명승(名僧)이라 하여 반드시 그말을 낙종(樂從)할 것이니 그 이익(利益)됨이 무궁하고 반드시 상품상생(上品上生)에 나리라]하였다


(5). 철오대사(徹梧大師)

철오대사는 말하기를 [관 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시심작불(是心作佛) 시심시불(是心是佛)]과 선종(禪宗)의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비교하면 참으로 직절(直截)통쾌하다 왜냐하면 견성(見性)은 어렵고 작불(作佛)은 쉬운 까닭이니, 견성은 심(心), 의(意), 식(識)을 여의고 영광(靈光)이 병로(迸露)하여야 비로소 견성이 되는 것이므로, 견성은 어렵고 작불(作佛)은 부처님의 명호(名號)를 염지(念持)하며 부처님의 의보(依報) 정보(正報)를 관(觀)하면 곧 작불이 되므로 작불이 쉬운 것이다.


 경에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부처님을 생각할 때에 그 마음이 곧 32상(相) 80종호(八十種好)라]하셨으니 이것이 부처님을 상념(想念)함으로써 곧 작불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작불과 시불(是佛)의 이치가 둘이 아닌 것과 견성과 성불(成佛)의 어렵고 쉬운 것이 이렇게 판이하게 다르니, 염불로써 참선에 비교하면 더욱 직절 통쾌한 것이다.


 하나는 부처님의 말씀이요, 하나는 조사(祖師)의 말이니, 어느 것이 중하고 어느 것이 경하며 어느 것을 취하고 어느 것을 버릴 것인가.


 학자는 한 번 완미(玩味)하여 검점 (檢點)하면 반드시 이 말이 그릇되지 아니한 것을 수긍할 것이다]하였다.


(6). 인광대사(印光大師)

인광대사는 염불하는 사람은 선가(禪家)의 참구(叅究)에 간섭할 것이 아니요.


  참구염불(叅究念佛)도 염불할 때에 이것이 [누군고] 하는데 치중해야 깨닫기만 구할 뿐이다.


 행인(行人)이 신(信), 원(願)으로써 염불하여 왕생하게 되면 깨닫지 아니하는 자가 없고 ,또 깨달아 흑업(黑業)이 다하면 마땅히 생사를 마칠 것이되 만약 깨닫기만 구하고 신, 원이 없는 경우에는 흑업이 다하지 못하였으면 능히 자력(自力)으로 생사를 마칠 수도 없고, 또 능히 불력(佛力)에 의하여 생사를 마칠 수도 없으므로 자력 불력에 모두 근거가 없어서 윤회(輪廻)를 면하지 못하는 것인데 법신보살(法身菩薩)도 성불하기 전에는 모두 불력에 의하므로 업력(業力)의 범부는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니 불력 자력의 대소가 어찌 천연(天淵)의 차이에 그치리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