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파식적(萬波息笛)
만파식적은 신라 때의 전설상의 피리로, 이것을 불면 온갖 소원이 성취되므로 국보로 삼았다고 합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문무왕이 죽어서 된 해룡(海龍)과 김유신이 죽어서 된 천신(天神)이 합심하여 용을 시켜서 보낸 피리라 합니다.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하여 동해가에 감은사(感恩寺)를 지었습니다.
신문왕 2년에 해관(海官)이 동해안에 작은 산이 감은사로 향하여 온다고 하여 일관으로 하여금 점을 쳐 보니,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金庾信)이 수성(守城)의 보배를 주려고 하니 나가서 받으라 하였습니다.
이견대(利見臺)에 가서 보니, 부산(浮山)은 거북 머리 같았고 그 위에 대나무가 있었는데, 낮에는 둘로 나뉘고 밤에는 하나로 합쳐졌습니다.
풍우가 일어난 지 9일이 지나 왕이 그 산에 들어가니, 용이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면 천하가 태평해질 것이라 하여, 그것을 가지고 나와 피리를 만들어 보관하였습니다.
나라에 근심이 생길 때 이 피리를 불면 평온해져서, 만파식적이라 이름을 붙였고요.
그 뒤 효소왕 때 이적(異蹟)이 거듭 일어나,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만파식적 설화는 신문왕이 만파식적을 받았다는 해로부터 몇 십년이 지난 해에 다시 등장합니다.
그 내용은 부례랑이라고 하는 국선이 국경지대에 나갔다가 말갈족들에게 납치되는데, 같이 있던 화랑들 중 안상이란 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달아난 사건이 일어난 때와 그 시기를 같이하여 만파식적이 분실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전쟁이 종결된 이후에 태어난 세대의 화랑들이 그 이전의 용맹한 화랑정신을 잃고 있으며, 그것 못지않게 나라 안팎으로 긴장이 이완되고 국가기강이 해이해지고 있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부례랑과 안상이 신라로 돌아오고 만파식적을 다시 찾는다는 것으로 그 끝이 맺어지고 있구요.
7세기 말은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는 고구려유민들의 신라에 대한 압박이 더욱 거세어지던 시기로서 신라가 이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시기였습니다.
이 때 만파식적은 다시 평화를 보장해주고 신라의 안위를 책임지는 상징물로서 다시 한 번 더 널리 그 의미가 부각된 것으로 보이며 만파식적 설화가 다시 나타난 것은 이러한 시대상황과 연결시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만파식적 설화는 그 이후에도 간혹 나타나는데 특히 8세기 후반에 만파식적에 관한 기록이 자주 소개됩니다.
이 때의 내용은 만파식적의 위력으로 일본이 감히 신라를 침공하지 못한다거나 혹은 일본이 만파식적을 비싼 돈을 주고 사고 싶다는 그런 내용이 주요 부분을 차지합니다.
이 설화 역시 8세기 후반 신라와 일본의 긴장관계가 고조되는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면서 만파식적이 존재하는 한 일본이 신라를 침공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시켜주기 위해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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