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계백장군

難勝 2009. 11. 18. 10:59

 

 

600년대에 들어서면서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은 영토 다툼으로 어지러운 상황을 맞이하였다.

삼국은 중국을 오갈수 있는 중요한 교통로인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빼앗고 빼앗기는 치열한 싸움을 계속하였다.

 

계백은 백제 말기의 장군으로 일찍이 벼슬길에 올라 660년 (의자왕20) 에 달솔이라는 벼슬에 있었다.

 

그 당시 백제는 신라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긴 상태였다.

백제는 북으로는 고구려, 남으로는 일본과 손을 잡고 신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다급해진 신라는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여 백제에 맞섰다.

그러나 백제의 의자왕은 그 무렵 연회만을 즐기고 나라일을 돌보지 않았다. 

신라는 이틈을 이용해 660년 5만 명이 넘는 나당 연합군을 결성하여 백제를 공격하였다.

김유신과 당나라 소정방이 이끄는 나당 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대전 동쪽 마도령)과 백강으로 쳐들어오자 계백은 좌평 충상, 달솔 상영과 함께 결사대 5천여 명을 이끌고 황산벌(충청남도 연산)로 나가 싸웠다.

 

싸움터로 나아가기에 앞서 계백은 가족들이 적의 노비가 되어 치욕스러운 삶을 사는 것 보다, 차라리 자신의 손에 죽는 것이 낫다며 가족들의 목을 모두 베었다.

그리고 자신도 목숨을 바쳐 싸울 것을 굳게 다짐하였다.

계백은 싸움터에서 군사들에게 옛날 월나라 왕 구천이 5천 명의 군사로 오나라 왕 부차의 70만 대군을 무찌른 예를 들면서, 전쟁의 승리는 군사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력에 있다며 군사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5천여 명의 백제군은 김유신이 이끄는 5만의 신라군과 네 차례의 싸움에서 모두 이겼다.

 

계백은 먼저 공격해 온 화랑 반굴을 죽이고, 홀로 공격해 온 화랑 관창을 사로잡았다.

어린 관창의 용기를 높이 산 계백은 여러 번이나 살려 보냈으나 관창이 계속하여 공격해오자 할 수 없이 관창의 목을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 신라 진영으로 돌려보냈다.

그러자 두 화랑의 용기 있는 죽음을 보고 분노하여 사기가 오른 신라군은 총공격을 펼쳤다.

5만의 신라 대군과 대적하기에는 백제군의 숫자가 너무 적었다.. 결국 계백 장군과 5천의 결사대는 모두 죽었고,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다.

 

훗날 조선의 유학자 서거정은 백제가 망할 때까지 절개를 지킨 계백의 행동을 높이 평가하여 '나라와 더불어 죽은 사람'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처럼 계백은 나라를 위해 바지막 순간까지 온몸을 바쳐 싸운 훌륭한 장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