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양(梁)무제의 봉불

難勝 2009. 11. 23. 04:50

 

양무제의 봉불  


남조는 모두 건강(남경)에 도읍하여 남조 문화를 건설하였는데, 송의 무제 이래 제. 양. 진대는 모두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외원하였다. 그중에서 양대 55년은 남조불교의 최융성을 이룬 시대이며, 그 대표자 양무제의 불교신앙을 중국 역대 제왕 중 누구도 이에 비할 자가 없을 정도로 깊었다. 양대라 할지라도 무제의 48년에 의하여 점거돼 있다.


무제의 비범한 재주와 그 호학은 다만 불교뿐만 아니라 일반 문화에 융성을 가져왔고, 강좌에 문물이 열리면서부터 200년간 은 더욱 융성하였다. 무제의 성은 소(簫)씨 이름은 연(衍)이다.


처음에는 유학. 도교를 연구하여 정통하고, 불교에 대해서는 별로 큰 관심을 갖지 않았었는데, 불교에 접속하기 시작하여서는 곧 귀의하고 강설도하였다.


다만 제작 및 강설을 할 뿐만 아니라 몸소 불사에도 적극 참여하여, 천감 3년(503) 4월 8일의 불탄일을 기하여 도속 2만 여인을 인솔하고 중운전에서 사도 봉불식을 거행하고, 공경. 백궁을. 종족에 칙하여 도교를 버리고 불교에 귀의토록 하였다.


천감 10년에는 단주육문을 공표하고 귀의토록 하였다.


천감 10년에는 단주육문을 공표하고, 다시 천감 16년에는 제사에 생류를 금하고 과일로서 대체시키며, 대의(큰 의사)로 하여금 생류를 약으로 쓰는 것을 금하였다. 그리고 이 해에 천하의 도관을 폐하고 도사를 환속시켰다. 그리하여 양국내의 도사는 대다수가 지방 제국으로 도피하여 겨유 여명을 보존한 상태이었다.


천감 18년 4월 8일에 다시 초당시에 혜약에 의하여 보살계를 받고, 다시 황태자 이하 백궁을. 공경. 일반 사서에 이르기까지 이때에 계를 받은 자 4만 8천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제는 동태사를 위시하여 많은 대사를 건립하고, 이 사원에 행업하여 자주 대법회를 행하였다. 대통 원년 (527) 9월에 동태사에서 사신하여 사원의 주소. 승의의 세탁 등 삼보의 노예가 되었는데, 군신이 일 억만전을 내고 황제를 도서 귀국하였다. 이러한 사신은 전후 네 차례나 있었다.


또한 제는 당시의 학자에 명하여 편찬술작시킨 서적이 매우 많아. 승민의 [속중경요(續衆經要)] 80권, 승랑의 연권, [경률이상(經律異相)] 55권, [법집(法集)] 140권, [여성승법(餘聖僧法)]5권 등이 있다. 유명한 [열반(涅槃)]의 학자 노미사의 보량이 [열반의소(涅槃義疏)]를 저작한 것도 무제의 칙에 의한 것으로서 제가 몸소 그 서를 제작하였다. 반야경의 개강에는 관이 698인, 승정 혜령 이하의 학승 1천인, 긴타 도속을 불문하고 파사. 우진등의 사신도 열석하여 도속무차대회와 함께 14일간 계속하였는데, 여기에 열석하던 자 전후 316. 612명이라고 한다.


이화같이 하여 제는 황제보살. 구세보살, 혹은 보살천자라고까지 존칭을 받았으며, 일상생활을 거의 출가생활과 같이 하여 엄중한 계율주의를 지키며 포의를 입고 주육을 끊고 일일 일식하였다.


{동양불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