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차라리 하루 동안 계율을 지키다 죽지, 백년 동안 파계하여 살지 않겠다며 강한 계율주의를 주창한 신라의 스님은?
자장스님
자장스님의 일대기입니다.
자장 스님은 신라 진평왕 12년(590)에 진골 출신으로 소판 벼슬을 지낸 김무림의 아들로 태어났다. 늙도록 자식이 없던 김무림은 부인과 함께 천수관음보살 앞에 나아가 자식 낳기를 지성으로 발원하여 자장을 얻었다.
자장은 어려서부터 마음이 맑고 슬기롭고 문장과 생각이 풍부하여 세속에 물들지 않았다. 부모를 여윈 뒤로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원녕사(元寧寺)라는 절을 짓고 수도의 길로 들어섰다. 구도를 위하여 혼신의 정열을 쏟고 있을 때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이에 선덕여왕이 "취임하지 않으면 목을 베리라"하여도 자장은 끝내 굽히지 않고 "내 차라리 하루라도 계(戒)를 지니고 죽을지언정, 백 년을 파계하고 살기를 원치 않는다"고 하며 강한 출가 의지를 나타내니 선덕여왕도 어쩔 수 없이 출가를 허락하였다. 자장의 수도가 날로 깊어지자 많은 사람들이 계를 받으려고 찾아왔으나 그럴수록 자장은 당나라로 들어가 불법을 더욱 익혀 크게 교화하기를 바랐다.
마침내 선덕여왕 5년(636)에 당나라에 건너가 문수보살이 머무는 오대산에 가서 기도하던 중 꿈에 노스님이 나타나 게송(偈頌)을 주었다. 문득 깨어나니 꿈은 선명하나 게송이 모두 범어(梵語, 고대인도어)였으므로 그 뜻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이튿날 아침, 스님 한 분이 오셔서 "어찌하여 수심에 싸여 있습니까?"하고 물으니 자장 율사가 "꿈에 대성인에게서 사구게(四句偈)를 받았으나 해석할 수 없어서입니다."하였다. 그러자 그 스님이 게송을 해석해 주고, 가사와 발우 한 벌, 부처님 정골 사리 등을 주면서 "이것은 부처님의 도구이니 잘 간직하시고, 당신의 나라 동북방 명주(溟洲) 땅에 오대산이 있는데, 그곳에 일만의 문수보살이 늘 거주하니 가서 뵙도록 하시오"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자장 율사는 문수보살을 친견한 것이었다. 자장 율사는 중국에 더 머무르다가 선덕여왕 12년(643)에 돌아와 오대산에서 월정사를 창건하고 팔각구층 석탑을 조성, 부처님 진신사리 37과를 봉안하였으며, 석조보살좌상을 조성, 탑전(塔前)에 안치하였다. 동시에 자장 율사는 동·서·남·북과 중앙에 암자를 세우니, 만월봉 아래에 동대 관음암, 장령봉 아래에 서대 염불암, 기린산 아래에 남대 지장암, 상왕봉 아래에 북대 미륵암, 지로봉 아래에 중대 사자암, 이렇게 오대에 각각 암자를 창건하고 '오대산'이라 이름하였다.
그 뒤로 분황사에 머물면서 나라의 최고 고문인 대국통이라는 벼슬에 추대되어 황룡사에 아홉 층짜리 탑을 세울 것을 건의하였다. 탑을 아홉 층으로 함은 주변의 아홉 나라가 신라를 중심으로 뭉쳐지기를 바라는 간절함을 상징하는 것이니 이 구층탑의 조성으로 삼국 통일을 기원하였다. 황룡사 구층탑은 선덕여왕 14년(645) 두 해에 걸친 공사 끝에 완공되었다. 자장은 또한 선덕왕 15년(646)에 양산 통도사에 금강계단을 세워 중생제도에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이렇게 자장 율사가 불교 교단의 기강을 바로 세우는 데 전력을 다하니 머리 깎고 스님이 되기를 원하는 자가 해마다 늘어났다. 만년에 서라벌을 떠나 명주 땅을 찾아나서 강릉 가까운 곳에 수다사를 세웠고 꿈 속에서 이끌린 대로 태백산 갈반지를 찾아 석남원을 세우고 입적할 때까지 이 곳에서 만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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