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불을 올리는 이유
제자가 스승을 공경 찬탄하는 마음으로 하되 때를 따라서는 자기의 죄업을 참회하기 위해서도 합니다.
우리가 불상에 예배 드리는 것은 물체인 불상이 아니라 부처님의 덕과 진리를 존경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 예배 드리는 것은 덕과 진리를 존경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처님께 예배 드린다는 것은 곧 인간의 존엄성 내지는 생에 대한 외경의 발로라 하겠습니다.
부처님은 우주만유의 진리를 깨치신 당체로써 그 위덕이 승엄하여 그 모습에 경배하는 것이며 또 예배함으로써 마음 속의 아만심을 꺽고 겸허의 덕을 배우며 스스로 심성을 정화하는 수행의 과정입니다.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모든 인류에게 빛이 되어 주심에 감사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불상에 절을 하는 것이며 절을 하는 것은 예의 입니다.
[예불의식]
새벽을 깨우는 목탁
장등의 불빛, 아스라이 새벽을 부르는데 홀연 목탁 소리 울린다.
오전 3시 정각, 산사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이렇게 새벽을 깨우는 목탁 소리가 울린다. 이름하여 도량석 (道場釋).목탁이 울리면 무명을 쫓아내듯, 하나 둘 승방에 불이 켜진다.
강원과 선방 그리고 채공간에서도 맑은 기침 소리와 함께 조용한 하루를 움직이기 위한 시작이 있다.
큰법당 어간의 섬돌에서 시작한 새벽 목탁은 마당을 가로질러 종루 밑을 지나 사천왕문을 한차례 들락이고 다시 계단을 올라 명부전과 관음전을 끼고 돈다. 말없이 목탁만 치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천수경」을 외운다. 소임자에 따라 석가모니불 또는 관세음보살을 부르기도 한다. 도봉산 망월사에 계시던 춘성스님은 그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새벽 목탁 때마다 참선곡을 노래하여 납자들에게 깊은 환희심을 일으키게 하였던 일로 유명하다.
목탁은 도량을 한 바퀴 돌아 다시 법당 어간의 섬돌에서 멎는다.
이때쯤이면 도량의 이곳저곳은 깨어날 대로 깨어나, 여느 때처럼 깨이고 깨어 있으되 조용하디 조용하게 하루가 시작된다. 새벽 목탁은 시작할 때 나직한 소리로부터 점차 큰 소리로, 끝날 때는 큰 소리로부터 나직나직하게 사그라드는 것처럼 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일어나는 시간과 목탁 치는 법 그리고 도량을 돌아와 끝나는 시간 등에 매우 엄격한 법도가 있다. 때문에 이 새벽 목탁은 노전(盧殿:큰법당의 소임자로 부처님 시봉하는 이)의 중요한 소임거리다. 노전은 이 밖에도 예불과 대웅전 행사의 집전자로 사찰의 생활이 몸에 익고 신심이 깊으며 염불에 능한 노스님이 맡는 경우가 많다. 세월이 수행으로 영글고, 희로애락의 번뇌를 벗어난 노스님의 부드러운 염불 소리와 목탁 소리는 수도 생활의 여울과도 같다.
산사의 하루는 이렇듯 목탁과 염불 소리로 시작된다. 새벽 목탁에 이어 이번에는 작은 종이 울린다. 종성(鐘聲)이라 부르는 이 일 역시 염불과 함께 한다. 번뇌를 끊고 지혜를 얻는 일은 출가 수행자의 본분. 그리고 얻어진 지혜는 모두 이웃의 삶을 위해 회향되어야 할 목표이다. 원하던 부처 되어 뭇 삶을 건진다(願成佛道衆生)는 게송으로부터 시작하는 것도 그러한 생각과 소원의 결과이다. 번뇌, 지혜, 슬기, 지옥, 삼계, 부처, 중생은 우리들의 삶과 생애의 울타리 안에 심어진 모든 것들을 상징한다.
옛 스님들은 왜 꼭두새벽, 삶의 거창한 문제들을 종소리에 싣고 울리기 시작했을까. 일년 삼백 예순 날,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새벽 종소리, 똑같은 염불, 그러나 저 깊은 의미.
종소리는 생명을 지닌 모든 것들을 위해 울린다. 지옥, 아귀, 축생, 인간, 하늘, 수라에 이르고 다시 곤충이나 새들에게까지 자비의 감로 법문을 들려주기 위해 울린다.
어디 그것뿐이랴. 풀이나 나무, 기와 조각이나 돌멩이에게 까지라도 하는 심경이 되어 종을 친다. 한 생각 오로지 거두어 잡아 거기 평상심으로 나툰 종소리, 그것은 한낱 쇳덩이로 만들어 내는 것이기에 앞서 너무 적막하고 처절한 수행자들의 자기 도야가 실려 있다.
그래서 옛 조사들은 그냥 종소리라 하지 않고 "깨끗하고 완전한 종"이라고 했을까. 종은 종이되 종이 아닌 소리라면 좀 어려운 소리가 되는 것일까 산사든 도심지든 절에서 울리는 종소리는 딸랑거리며 경박하지는 않다. 세월에 녹아버린 듯, 풍상에 씻기운 듯, 기쁨과 슬픔의 강물 건너 저편을 향해 일깨우는 듯한 종소리는 그렇게 새벽을 연다. 종성은 염불과 함께 시작되어 염불과 함께 끝난다. 최초의 게송으로 지옥을 깨뜨리는 진언이 있고 다시 아미타불의 마흔여덟가지 원력과 장엄 염불에 이르러 종소리는 숨가쁘게 빨라져 내림과 오름의 여섯 망치로 마무리되고 한 호흡 걸러 다섯 번의 소리를 끝으로 종성은 끝난다.
큰 종(梵鐘)
종성이 끝나면 큰 종이 장엄하게 울린다. 서른세 번. 하늘의 도솔천은 서른세번째의 천상 세계, 그것을 상징하여 서른세번 울린다. 그러므로 범종이라 부르는 큰 종은 하늘의 소리다. 욕심에 물들지 않는 세계, 먹을 것 탐하지 않고, 색욕에 주리지 않고, 기쁨으로 가득한 세계. 도솔천은 그래서 아름답고 청정하고 기쁨만 가득하기를 바라는 인간의 이상향이다. 거기 깊숙한 곳에 내원궁이 있다.
부처님의 어머니 마야 부인도 일찍 죽어 거기로 갔다. 이승의 아들 부처님은 그 어머니와 어머니의 극락 친구들을 위해 그곳으로 올라가 설법을 했다. 부처님은 3일 동안 계셨다. 그러나 천상의 3일은 곳에서 3개월, 땅의 인간들은 부처님을 뵙고 싶어 안달이 났다.
신통 제일이던 목련존자를 대표로 파견, 부처님을 모시고 내려오게 했다. 올라갔던 곳은 기원정사였지만 내려온 곳은 저 야무나의 지류로 흐르는 작은 시냇가 상카시아였다.
한역의 [잡아함]에도 정확히 기록되어 있는 얘기이다. 그러나 천상은 삶의 끝이 있는 세계이다.
기쁨을 받을 만큼 받으면 그들의 생명은 끝나 지은 업대로 다시 윤회의 여행을 떠나야 한다 윤회는 물론 지옥에도 있다. 큰종은 기쁨에 취한 천상세계에 깨달음을 일깨우기 위한 경책의 자리라고나 할까. 뒤탈이 없는 세계, 번뇌가 되풀이되지 않
는 세계는 오직 깨달음의 세계, 부처의 나라뿐이기에.
산사의 새벽 범종 소리만큼 마음의 거문고 줄을 적시듯 고르는 일이 또 있을까. 교하지 않으면서 엄숙하고, 둔하지 않으면서 깊은 지혜 울림은 어디서 오는가. 뜨락을 쓸되 먼지 일어나지 않고 연못 밑을 비추되 적시지 않는 달빛이어서 그런가. 정녕 청정하고 엄숙한 자비로 늘 깨어 있는 청정 수행자의 손길이어서 그런가 저 범종소리는.
이 범종은 하루에 세 번 울린다. 아침 예불, 재식(점심 마지) 저녁 예불 때이다. 그러나 예외의 경우가 있다. 산중에 불이 나거나 외적의 침입 등 긴급한 일로 대중의 운집이 필요할 때는 간격을 두지 않는 타종법을 사용한다. 중환자나 죽은 송장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곧바로 출동을 해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 수행자가 입적했을 때 임종과 동시에 백여덟 번 울린다. 이때는 일정한 간격의 매우 느린 속도로 종을 친다. 절에서는 이것을 열반의 종소리라 부른다. 한 생의 마감을 뜻하는 장중한 뜻이 담겨 있어 이 열반의 종소리는 순식간에 산중을 섭섭하고 엄숙한 분위기로 젖어들게 한다.
출가한 이는 너 나 없이 이 백여덟번의 열반 종소리를 들으며 육신의 삶을 떠난다. 황흔의 숲길에 떨어진 낙엽 위로 감겨 내리는 열반의 종소리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깊게 반조하는 생사 해탈의 소리이기도 하다.
법고와 목어와 운판법고는 일명 큰 북이라고도 불린다. 축생고를 받는 생명들에게 감로의 법을 들려주기 위해 울린다. 목어는 물에 사는 고기들을 위해 울린다. 운판은 날아다니는 새들을 위해 울린다. 범종과 법고와 목어와 운판은 사물(四物)이라 하여 규모가 큰 사원에서는 반드시 갖추고 있는 법물(法物)이기도 하다.
범종은 하루에 세 번 울리지만 법고와 목어와 운판은 아침과 저녁의 예불 때만 울린다.
예배와 절
넓은 의미에서 수행자의 하루 스물네 시간은 모두가 부처님께 예배하는 생활이다 수행의 과정에서 깨달음이 얻어지고 그리고 나서 전법과 교화의 길이 있기 때문이다. 수행과 깨달을 그리하여 이어지는 전법과 교화는 부처님 생애의 표상이나. 불교 수행자는 언제 어디서나 그 길이 삶의 나날이요 질서가 된다. 때문에 수행자의 하루 일과는 부처님께 드리는 예배로부터 시작된다 수행은 겸허와 청빈 그리고 엄숙과 청정을 주춧돌로 삼는다.
지혜와 선정은 치열한 자기 정화의 두 날개이다.
"밤이면 밤마다 부처를 안고 자고 새벽이면 새벽마다 부처를 안고 일어난다"고 노래한 옛 선사의 게송에서 우리는 수행자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 여기서의 부처는 예배의 대상으로 지칭된 것이라기보다는 인격의 완성을 향해 가는 자기 자신을 부처에 견준 것이라 하겠다.
예불의 변함없는 모습은 역시 절하는 것이다. 두 손을 모아 합장한다. 그리고 무릎 꿇어 이마를 마룻바닥에 닿게 한다 반드시 이마가 바닥에 닿아야 한다. 그래서 정례(頂禮)라고 한다. 그런 다음 두 팔을 무릎에 맞대어 바닥에 놓는다. 양 무릎과 두
팔 그리고 이마가 바닥에 닿기 때문에 오체투지(五體投地)라고 한다.
최초로 깨달음을 완성한 성자, 자신의 본래 스승인 부처님께 하는 예절의 표현으로 오체투지만큼의 지극과 정성도 없으리라.
절은 겸허의 상징으로 자기를 낮추는 예법이기도 하다. 자비무적 오만을 없애는 지름길이요, 업장을 녹이는 가장 적절한 수행 방법이다. 이것이 바로 절이다. 합장으로 공경하고, 머리숙여 드리는 절은 오는 손님에 대한 최상의 예법이기도 하다. 이
것이 절(寺)에서 절(拜)을 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사찰의 의식 때 쓰는 법구(法具)의 소품이 많지만 놋쇠로 만든 경쇠만큼 맑은 소리를 내는 것도 드물다. 일반 법요식에 자주 쓰이는 목탁과 요령에 비해 이 경쇠는 예불 때만 쓰인다 살구나무 목탁에 대추나무 채를 쓰면 그 소리가 도솔천 내윈궁에
까지 들린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 경쇠는 사슴이 뿔갈이하다 버린 초간 헌뿔을 가을 져 내린 낙엽 속에서 주워다 경쇠채로 쓴다. 금속과 각질(角質)의 단단함이 맞부딪는 강도만큼, 울리는 청아한 소리는 청빈한 수도 생활의 상징인 양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게 한다.
예불은 그 법당 안에 모인 사람들만의 것은 아니다. 범종과 법고와 목어와 운판을 쳐서 모은 뭇 생명의 대중이 함께 있다.
지옥과 하늘, 날짐승과 길짐승, 새와 벌레까지도 모두 동등한 자격으로 부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모여 있다.
경쇠와 선창
새벽 깨우는 목탁 소리부터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이 한바탕 법석을 열고 나면 쉼표를 찍듯 법당 안의 작은 종이 다섯 번 울린다. 이때쯤이면 조실의 노스님부터 후원의 행자에 이르기까지 산의 대중이 법당 자기 자리에 그린 듯 좌정하여 무심 삼매에 들어 있다.
이윽고 이슬에 꽃잎 벙글 듯 경쇠가 운다. 이어 선창(스님 하나가 예불문을 먼저 하는 것)이 있고 경쇠에 맞춰 대중의 장엄한 합송이 뒤따른다.
예불문(禮佛文)
저 지금 깨끗한 물로
감로의 차를 만들었습니다.
거룩하신 부처님과
거룩하신 가르침과
거룩하신 스님들게 드리오니
원컨대 어여삐 여겨 받아주시 옵소서.
다게(茶偈)라고 부르는 이 구절은 삼보에 대한 예경의 표현이다. 더러 차를 올리기도 하지만 대부분 그 도량에서 가장 좋은 물을 쓴다. 담아 올리는 그릇은 다기(茶器). 언제나 향로와 함께 상단의 중심에 올려놓는다.
예불뿐만 아니라 모든 불교 의식의 시작은 삼보에 대한 귀의로 부터 시작한다. 거룩하신 부처님(佛 : Buddha), 거룩하신 가르침(法 : Dharma), 거룩하신 스님들(僧 : Sanga)은 불교의 세 기둥으로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는 물론 다양화된 모든 불교 의식 가운데에서 가장 통일성을 보이는 것이 바로 이 삼보 귀의 사상이다. 불교 신자가 되는 첫걸음은 바로 이 삼보에 대해 귀의하는 것이다.
예불의 의식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화되었다. 요즈음은 다게 대신 오분향례(五分香禮)가 많이 쓰인다. 이 오분향례는 불교 정신의 뼈라고 볼 수 있는 계율의 정신, 삼매의 정신, 지혜의 정신을 향기화(香氣化)한 것인데 여기에 궁극 목표인 해탈과 해탈 지견을 더하여 다섯 가지로 집약, 불교 정신 전체를 드러낸 것이다.
이 오분향례는 불교의 당위성이 요약되었을 뿐 아니라 자주적 성취의 의미까지 내포되어 능동적인 분위기를 나타낸다. 오늘날 사찰에서는 거의 다 오분향례를 쓴다.
옛날에는 아침 예불 때 다게를 쓰고 저녁 예불 때는 오분향례를 썼다.
계율의 향기와
삼매의 향기와
지혜의 향기와
해탈의 향기와
해탈 지견의 향기
광명의 구름 되어 법계에 두루두루
모든 곳 한량없이 계시는
거룩한 부처님
거룩한 가르침
거룩한 스님들께 공양하옵니이다.
헌향진언 옴 바아라 도비야 훔
삼계의 큰 스승이시여, 뭇 생명의 어버이시여, 나의 스승이신 석가모니 부처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바쳐 절하옵나이다.
언제 어디서나 인드라 그물처럼 여러 곳에 항상 계시는 모든 부처님들께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바쳐 절하옵니다.
언제 어디서나 인드라 그물처럼 여러 곳에 항상 계시는 가르침에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바쳐 절하옵니다.
큰 지혜 갖추신 문수사리보살, 크게 나투시는 보현보살, 대자대비 관세음보살, 큰 서원 지장보살, 존경하는 모든 보살들께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바쳐 절하옵니다.
부처님 계실 때 부처님께 직접 가르침 받은 십대 제자와 열여섯 성자와 오백 성자와 홀로 가르침 받은 성자와 천이백 명의 큰 아라한들과 수많은 성스런 자비의 대중들께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바쳐 절하옵니다.
인도로부터 우리나라까지 법의 등불 대대로 이어오신 큰 조사와 천하의 종사와 티끌처럼 많은 큰 선지식들게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바쳐 절하옵니다.
끝없는 대자대비로 나의 절 받으사 가피의 힘을 가득 주소서.
원컨대 법계의 뭇 생명이 함께너와 나 한결같이 부처의 길 이루어지이다.
다게는 물론 오분향례는 오직 선창자만 노래한다. 대중에서는 목소리 청아한 사람이 도맡기도 하지만 강원이 있는 곳에서는 교육적 측면에서 돌아가며 선창한다.
'삼계의 큰 스승이시여.."부터 "..부처의 길 이루어지이다."까지는 대중이 합송한
다.
이 예불문은 범성(梵聲)에서 유래하는 사찰 특유의 곡조와 박자를 지닌 장엄하고 장중한 합송으로 이어진다.
경건하고 정성이 가득한 가슴 소리들이 한데 어울려 새벽 산사를 울린다. 누구든 새벽 예불에 참여해 본 사람이라면 예불의 청정함이 풍기는 진면목을 가슴으로 담아낼 수 있다.
발원문(發願文)
발원은 서원을 일으키는 뜻이다. 사사로운 욕망이 아니라 수행의 원력을 성취하려는 것이다. 순수한 갈망에의 의지이다. 그래서 소원(所願)이 아닌 서원(誓願)이다. 개인적인 욕구가 아니라 나와 이웃을 함께 사랑하는 열림의 지향이다. 그래서 발원문은 문장 자체가 지극하고 간절하다. 살고 있는 자들뿐 아니라 죽어간 자들을 위해서도 문장을 배려한다. 개인의 행복과 사회질서의 안녕까지도 간구된다.
발원문을 읽는 사람은 그래서 가장 상수(上首)로 한다. 산중의 어른이 늘 발원문을 읽는다. 작은 절에서는 주지 스님이 읽는다. 큰 행사가 있으면 더욱 그렇다. 발원문은 의식의 직접적인 현실인 것이다.
서원을 일으키는 글
아침이면 아침마다 저녁이면 저녁마다 이렇듯 향 사르고 촛불켜 거룩하신 부처님과 거룩하신 가르침과 거룩하신 스님들게 지성으로 귀의하옵나이다.
날씨가 순조로워 농사가 풍년들게 하여 모든 이웃이 편안한 생활이 되기를 기도하옵나이다. 나라는 태평하여 모든 계층이 갈등과 반목을 쉬고 서로 양보하고 민족의 숙원인 통일이 민주적 방법으로 성취되기를 간절히 비옵니다. 모든 인종간에 편견을 허물고 분쟁이 종식되는 세계가 이루어져 하나 된 인류의 삶이 펼쳐지기를 원하옵니다.
원하옵건대 내가 세세생생 태어나는 곳마다 부처님 말씀에 따르고 수행하여 깨달음의 지혜를 성취하여 순간이나마 버리지 않게 하소서. 부처님의 완전한 덕과 문수보살의 지혜와 보현보살의 실천과 관세음보살의 대자대비를 몸소 행하게 하소서.
언제 어디서나 내 이름을 듣거나 내 모습을 보는 이는 고뇌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지혜를 얻어 나와 이웃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옵니다.
오랜 옛날부터 나의 부모 되고 형제 되고 친척 되고 벗이 된 저 영혼들의 공덕을 기리고자 합니다. 나라 위해 세계 평화 위해 전쟁에서 사라진 영혼들을 어루만지기를 원하옵니다. 머문 곳 없이 떠도는 외로운 혼들이 부처님의 이름으로 천도되기를 원하옵니다.
나와 이웃 모두 함께 부처님의 이름으로 천도되기를 원하옵니다.
나와 이웃 모두 함께 편견과 아집과 아만과 어리석음의 온갖 무명을 깨달음의 지혜로 허물고 밝고 복된 삶 이루어지기를 원하옵니다.
부처님 부처님 우리의 스승 부처님.
발원문이 낭독되는 동안 대중은 목탁에 맞추어 세 번의 절을 드린다. 발원문 낭독은 언제나 혼자 한다.
발원문이 끝나면 신중단을 향하여 [반야심경]을 봉독한다.
신중단은 불교를 수호하는 신장들을 모신 곳이다. 그들의 업무는 수행보다 호위 업무이다. [반야심경]의 봉독은 경전을 익는다는 뜻도 있지만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대신 설한다는 의미가 짙다.260자로 된 짧은 이 경전은 한문 문화권에 전해진 그 어떤 경전 보다도 널리 읽히고 사랑받는다.
600부 [대반야경]의 뜻이 간결한 함축으로 전해진 [반야심경]의 봉독이 끝나면 대중들은 목탁에 맞추어 어간 (법당의 정면 중앙 자리)의 조실석을 향해 반배(엎드리지 않고 서서 하는 절)를 드린다. 아침 인사의 뜻도 있지만 대중을 이끄는 법력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뜻이 있다.
선방(禪房)의 예불
선방 생활은 군더더기가 없다.
말은 극도록 삼가고 글 쓰는 일, 책 보는 일은 모두 금지된다. 먹고 자는 일 밖의 모든 잡무는 가장 검소하고 간편하게 해결한다. 모든 생활은 좌선을 위주로 짜여져 빈틈없이 진행된다. 사시 마지(11시에 부처님께 점심 공양 올리는 일)을 제외하고는 예불도 큰법당에 나가지 않고 선방에서 간단히 한다. 선창이나 염송은 물론 독경도 없다.
산사에서도 선방은 가장 늦게 자고 제일 먼저 일어난다 새벽 목탁 소리 울리자마자 선방은 제일 먼저 불을 켠다. 불을 개고 목침을 거두어 벽장에 넣고 오줌 누고 냉수 마고, 문 열어 방 쓸고 공기를 바꾼 다음 정돈하고 않는다.
수십 명의 납자들이 움직여도 일사불란해서 문 여닫는 소리 잠시잠시 날 뿐 조용한 움직임들이다. 새벽 목탁이 아직 도량석을 반쯤 돌았는데 가사 장삼 수하고 자기 자리에 그림처럼 앉아 있다.
범종, 법고, 목어, 운판 등 사물이 한바탕 법석을 열고 나면 큰 법당에서 작은 종 다섯 망치가 운다. 이윽고 선방의 입승 손에서 죽비가 세 번 울린다. 그 소리에 대중은 그림처럼 일어난다.
죽비에 맞추어 절 세 번, 시방 삼세의 부처님과 시방 삼세의 가르침과 시방 삼세의 스님들께 드리는 예불이 끝난다. 가사 장삼 거두어 대에 걸고 자리에 앉는다. 몸을 앞뒤로 두어 번 흔들고 좌정한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화두에 몰입한다.
작은 법당들의 예불
사찰에는 작은 법당들이 많다. 관음전, 지장전, 약사전, 영산전, 나한전이 있는가 하면 칠성각이 있고 산신각이 있고 조사 영각이 있다.
관음전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곳,
지장전은 지옥 중생을 제도하는 지장보살이 계신 곳,
약사여래는 약사전에 계신다. 부처님 당시를 회상하여 영산회상 탱화와 함께 따로 부처님을 모신 곳이 영산전, 부처님을 직접 모시고 다니던 십대 제자를 비롯하여 당시의 성스런 아라한을 모신 곳이 나한전이다.
칠성과 산신은 원래 민간의 토속신이었는데 언제부턴가 슬그머니 불교에 흡수되어 한자리 차지하고 있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는 것이 절 인심인데 그래서 그럴까 오는 토속신 막지 않고 받아들이고 있다.
조사 영각은 덕 높은 스님들을 기념하여 모신 곳이다. 사찰의 위상에 따라 조사전, 국사전, 영각 등의 많은 이름이 있다. 이 작은 법당들은 각단(各壇)이라 통칭한다. 물론 조석 예불도 극진하게 모신다.
아침 예불은 큰법당의 예불이 끝나면 맡은 소임자가 있어 각각 행해지며 저녁 예불이 시작되기 전에 마치고 큰법당 예불에 동참한다.
예불문은 각단의 정신에 맞도록 시설되어 있다. 처음 출가자는 그 절이 소유한 각단의 수만큼의 예불문을 암송해야 한다. 그것도 일종의 공부, 옛 조사의 공덕을 기리는 일 또한 수행의 철저를 기하는 중요한 요소이거늘.
큰법당의 예불과는 달리 각단에서의 예불은 소임자 단독으로 행해지기 때문에 예불 받는 대상과 드리는 수행자 사이에 특별한 친교가 이루어진다. 때문에 일정 기간 스스로 특별한 전각의 소임을 자원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관음전, 나한전, 지장전의 소임은 지원자가 끊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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