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한
인간은 구조상 아라한 이상은 오를 수 없습니다,
중생은 아라한이 한계입니다.
사과(四果)를 증득해 아라한이 되고나면 다시 대비심을 발해서 원력 따라 이 세상에 몸 받아 올 수 있습니다.
중생은 불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道(아라한果)를 이룰 수 있습니다.
무명의 껍질이 벗겨져 자성이 드러나 견성한 후 보임(保任)을 잘 마친 이를 가리켜 '아라한이라 하고, 아라한의 성과(聖果)를 얻으면, 생사의 뿌리가 끊어져 윤회를 벗어난 세계에서 납니다.
보살은 아라한이 몸을 받아와 수행, 정진한 후 타력(부처님의 위신력)에 의해 얻을 수 있는 성과입니다.
사람이 번뇌망상만 털어버리면 본래 부처라고 하는데 이치상으로는 틀린 말은 아니지만, 부처(붓다)란 자기의 불신을 얻어 삼신(三身)을 구족해야 합니다.
그러나 깨침에도 강약이 있습니다.
크게 깨쳤다(大悟)하면 오매일여(寤寐一如)가 되어 꿈에도 법문합니다.
이때부터 더욱 계율(특히 음계 ; 淫戒)을 견지하면서 두타행으로 나가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후, 나를 죽이는 무아(無我)의 공부로 들어가야 중생의 구경각(究竟覺)인 아라한을 이루게 됩니다.
아라한(성중)은 붓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거듭 밝히는 바입니다.
견성즉성불(見性卽成佛)이란 말은 위험한 표현입니다.
화두참구를 통해 얻은 견성은 이제 공부의 시작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자성은 단박에 깨달을 수 있으나 시작도 없는 옛날부터 무시겁으로 내려오면서 쌓아온 기와 습은 그렇게 단박에 사라지지 않습니다.
업장도 자기 힘만으로 소멸되는 것이 아닙니다.
백겁 동안 지은 죄업이라도 한 생각 깨쳐 광명을 보면 찰나에 없어집니다.
백겁적집죄 (百怯積集罪) 일념돈탕제(一念頓蕩除) 하는 말도 이치상으로는 맞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무량광(無量光)을 보고서도 안으로 육종진동(肉種震動)이 없으면 부처님을 뵈어도 법문을 직접 들을 수 없고 무아 속의 삼매에 들 수도 없습니다.
도를 이루었다는 분들도 이러한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 함부로 법을 설하면 안됩니다.
선(禪)에서는 화두타파하면 견성(見性)했다거나, 깨쳤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깨달음이란 존재의 본성(眞相)을 볼 때 오는 것이요.
공(空)과 무아(無我)를 체험합니다.
그러나 잠깐 마음자리가 드러나는 깨달음이라는 것은 이제 공부의 시작일 뿐이며 보임을 잘해 들어가야 아라한(聖衆)의 자리에 드는 것입니다.
아라한(성중) → 보살 → 붓다(부처님)
공부를 잘 하고 수행을 잘 해서 깨달음을 얻었거나, 이미 깨달았다면 이제부터가 더욱 중요합니다.
특히 여자관계를 주의해야 합니다.
사음계를 파하는 것은 부처님과 법을 능멸하고 모독하는 대망어의 과보만큼이나 무섭습니다.
또한 나 없는 수행, 곧 두타행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아라한과를 증득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잘 수행해도 붓다 되는 데까지는 아직 천만리 거리가 남아 있습니다.
보살도를 완성해야 불과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살지에 이르면 성불은 보장되어 있다고 보셔도 됩니다.
여기까지 도달하면 불퇴전입니다.
마침내 붓다가 되면 우주와의 완전무결한 계합을 이루니 대열반이요, 대해탈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주아(宇宙我)의 실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영원히 죽지 않는 무량수(無量壽)가 되는 것입니다.
'尋劍堂'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탑돌이의 유래와 의미 (0) | 2010.11.15 |
---|---|
목숨은 숨쉬는 사이에 있다 (0) | 2010.11.15 |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 - 무엇이 어려울까? (0) | 2010.11.12 |
계란후라이가 아닌 생명으로 살아라 (0) | 2010.11.10 |
사향사과(四向四果) (0) | 2010.1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