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짓달 이야기
I. 삼남(三南)에 내리는 눈
이미 곳곳에 첫눈 내리고, 남도(南道)를 향하는 열차의 펼쳐진 창밖에 소담스럽고도 포근한 눈들이 여기저기 쌓여지는 때, 동짓달 초순. 그 동짓달, 눈 쌓인 골짜기에는 지는 해 비껴 산 마을 밥짓는 연기 한 줄기 피어오르리라.
눈 쌓인 동짓달 해거름은 우리에게 대설(大雪)과 동지(冬至)의 절기가 다가왔음을 알려 준다. 이제 농사일 끝낸 농가에서는 콩 삶아 메주 쑤고, 등잔불 긴긴 밤에는 베틀과 물레 놓고 길쌈을 시작한다. 솔가지 땔감이며 장작 마련, 볏짚으로는 지붕 잇고서 한가함 속에 동치미며 냉면·수정과 즐기고 있노라면 산촌 농가의 사랑방 창호를 통해 길어진 햇살 그림자 방안 깊숙이 미쳐온다.
II. 태양의 죽음과 부활 - 참(마침)과 빔(시작) -
정겨운 햇살. 그러나 동짓달의 햇살은 이미 자신의 힘을 잃어가고 있다. 하지(夏至)를 정점으로 초가을 노염(老炎)을 거쳐 점차 힘을 잃어온 햇살은 이제 아무리 살갗에 닿아도 따갑지 않다. 아니 오히려 사람들은 조금이나마 햇살을 맞고자 양지바른 곳에 오순도순 모여 선다.
동지가 되면 태양은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로부터 짧아져간 낮은 동지에 이르러 그 극한에 이르고, 동지로부터 짧았던 낮은 다시금 차차 길어져 고대인들은 그것을 태양의 죽음과 부활로서 비유하였다.
이렇듯 밤이 긴 동짓날은 동시에 짧았던 낮이 점차 길어지는 날. 그리하여 이 날은 태음(太陰)의 상징인 노인과 소양(小陽)의 상징인 어린아이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날이라 말해지기도 한다.
우리는 흔히 1월, January를 '야누스(Janus)의 달'이라 말하고 있다. 야누스가 지난날과 앞날을 동시에 회고하고 생각하는 양면적 얼굴을 지닌 신화적 존재라 한다면, 동지 역시 두 가지의 양면성을 동시에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듯 동지는 '텅 빔(시작)'과 '가득 참(마침)'이란 성격을 자체에 가지고 있다.
고조선 때의 홍범구주(洪範九疇)를 바탕으로 송나라 주희(朱熹)는 1년 365일의 흐름을 계산한 「99원수도(九九圓數圖)」라는 척력을 만들었는데, 여기서도 동지는 마침과 동시에 시작을 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침과 동시에 시작을 의미하는 것. 이것은 또한 12월 25일의 성탄절(Chris 그리스도, 예수의 mas 날)과도 관계를 맺고 있다. 옛 로마인들은 농경의 신(神) 새턴(Saturn)을 섬겨 12월 하순경에 '새턴네리아 축제'를 거행하곤 했는데, 그중 12월 25일은 특히 태양의 부활일로서 중요시되는 날이기도 하였다.
III. 동지에는 달력을…
이러한 점에서 옛부터 우리 조상들도 동지를 작은 설[亞歲]이라 불러왔었다. 이에 우리는 어렸을 때 정겹게 불렀던 하나의 노래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까치 까치설날은 어제께고요, 우리 우리설날은 오늘이래요'라는…
여기서 '어저께'란 말은 시간적 전일(前日)이 아닌 가까운 과거를 뜻하는 것으로, 옛부터 우리 고대 풍속에는 큰 명절 이전에 반드시 작은 명절을 두는 것이 상례였었다. 그러므로 '까치 까치설날'을 동지라 말할 수 있다면 '우리 우리설날'이란 다름 아닌 새해 아침, 설날을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여기에 등장하는 까치가 까마귀의 변형으로 이해된다면, 우리는 '오덴<Oden>과 까마귀'라는 태양신에 얽힌 설화의 잔재를 살펴볼 수 있다.)
작은 설. 그래서인지 이날에는 옛부터 새해를 예고하는 달력을 주고받는 일이 행하여졌다. 『동국세시기』 기록에 의하면 '관상감(觀象監)에서는 이날 관청에 달력을 올린다'고 쓰여 있으며, 특히 '서울의 옛 풍습에 의하면 하선동력(夏扇冬曆)이라 하여 단오에는 관원이 아전들에게 부채를 나누어주며, 동지에는 아전이 관원에게 달력을 바친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열양세시기』에서는 이사천(李徙川)이란 사람의 시(詩)를 인용하여 '달력을 받은 하급관리는 자신의 상사에게 팥죽을 보낸다'는 내용의 글을 서술하고 있기도 하다.
IV. 동지와 동지팥죽 - 팥죽과 그 주술적 의미 -
『형초세시기』에 의하면 '공공씨(共工氏)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아들이 동짓날에 죽어 역질 귀신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아들은 생전에 팥을 몹시 두려워하였기에 동짓날 팥죽을 쑤어 이를 물리친 것이라고 하였다. 한편 다른 전승들에 의하면 사당에 제사를 지낸 다음 팥죽을 문간에 바르거나, 집안 및 동네의 큰 나무 등에 뿌려 사귀(邪鬼)의 침입을 막는 풍습이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 팥이란 상당한 주술적 의미를 갖는다. 불교 의식에 있어서도 점안식(點眼式)을 행한다거나 구병시식(救病施食) 등에서 귀신을 쫓는 의미로서 팥을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하튼 동지가 되면 정초(설날)의 떡국과 같이 팥죽의 새알(옹심)을 먹게 되는데, 이것은 한편 나이를 먹어감을 상징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의 금기가 있다. 곧 우리는 동지가 동짓달 상순에 들면 애동지[兒冬至]라 하고, 하순에 들면 노동지(老冬至)라 부르게 되는데, 애동지가 들면 그 해는 아이들에게 좋고, 노동지가 들면 노인들에게 좋다는 풍습이 있어 애동지 때에는 굳이 팥죽을 쑤지 않음이 좋다는 것이다.
V. 나한님께 팥죽 공양을…
한편 우리는 팥죽에 얽힌 한 재미난 이야기(마하사 공양주에 얽힌 설화)를 발견할 수 있어, 이를 간략히 서술해 보기로 한다.
때는 마침 동짓날 새벽이었다. 전통적으로 절에서는 동짓날이 되면 이른 새벽 팥죽을 쑤어 대웅전을 필두로 여러 전각(殿閣)에 팥죽을 올리게 되는데, 그날 따라 그 절의 공양주가 늦잠을 잤다. 늦게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에 가니 아궁이엔 불씨가 온통 꺼져 있어, 할 수 없이 공양주는 아랫마을 한 집에 불씨를 구하러 갔다. 그때 그 집주인이 "조금 전 그 절의 어떤 스님이 불씨를 구해 갔는데, 또 꺼졌는가요?"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다가 팥죽까지 한 그릇 먹고 갔다는 것이 아닌가!
공양주는 부지런히 절 부엌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어쩐 일인가! 아궁이에는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공양주는 얼른 팥죽을 쑤어 대웅전에 팥죽을 한 그릇 바치고, 또다시 나한전(羅漢殿)에 팥죽을 가져갔다. 그런데 어찌된 노릇인가. 나한전에 있는 한 나한(羅漢)의 입 언저리에 붉은 팥죽이 여기저기 묻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에 공양주는 알게 되었다. 조금 전 마을에 내려가 불씨를 구해온 것도, 팥죽을 먹은 이도, 또한 아궁이에 불을 지펴준 이도 다름 아닌 나한님 중 하나였다는 것을… 공양주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동안 그 나한님께서는 공양주를 바라보며 환히 웃고 계실 뿐이었다.
물론 이러한 설화가 어떻게 유래되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 설화 속에 나타난 나한님의 성격과 장난기 어린 얼굴을 상상해 볼 수는 있다.
추운 겨울 온 천지 눈이 덮이고 깜깜한 밤, 동지가 찾아오면 팥죽을 쑤어 한 그릇쯤은 절의 나한님께 바칠 수 있는 정성을 보임도 좋을 것이다.
정각스님 / 원각사 주지
1990년 통도사 월간지 <등불>에 실었던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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