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마왕을 항복시키시다.
수행자 고타마는 고행을 포기한 뒤 수자타가 올리는 우유죽 공양을 받아 기운을 회복하고 목동 스바스티카(吉祥)가 바친 부드럽고 향기로운 풀을 보리수 아래에 깔고 그 위에 앉아서 굳은 다짐을 하였다.
"내 여기서 위없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면 차라리 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마침내 이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으리라." 《수행본기경》
금강석보다 굳센 의지 때문인지 부처님은 그 자리에서 깨달으셨고, 깨달으신 그 자리는 훗날 금강보좌(金剛寶座)라 부른다.
바야흐로 수행자 고타마가 선정에 들어 깨달음을 얻으려 하자 가장 다급해진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중생을 욕망에 사로잡히게 하고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 마왕 파순이었다.
마왕 파순은,
"사문 고타마가 보리수 아래에서 정각을 이루려 한다. 그가 깨달음을 성취하면 일체 중생을 제도할 것이다. 그 깨달음의 경지는 나의 능력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가 깨닫는 것을 막아야 한다."라고 생각하여 먼저 자신의 세 딸을 보내 고타마를 유혹하도록 하였다.
마왕의 세 딸은 온갖 교태를 부리며 유혹하였으나 고타마는 수미산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너희들의 몸은 비록 아름답지만 모든 악이 가득해 견고하지 않고 부정이 흘러 생로병사가 항상 따른다. 손에는 팔지, 귀에는 귀고리를 흔들면서 교태 섞인 웃음으로 탐욕의 화살을 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그대들의 욕망을 독약으로 안다. 칼날에 발린 꿀은 혀를 상하게 하고 사악한 욕정은 독사의 머리와 같으니 내 이미 모든 유혹을 뛰어넘었다. 너희들은 모두 본래 모습을 드러내고 물러가거라."
이렇게 말하자 마왕의 세 딸들은 모두 추한 노파로 변해 탄식하며 물러갔다.
그러나 마왕은 화가 나서 수행자 고타마를 향해 태풍, 폭우를 보내고 창칼, 불화살, 돌을 던지며 악귀를 동원하여 수행을 방해했다. 그러나 수행자 앞에서 그것은 모두 꽃으로 변하여 흩날릴 뿐이었다. 유혹과 폭력으로도 수행을 막지 못한 마왕은 직접 고타마 앞에 나타나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석가족의 아들 고타마여! 그대는 속히 일어나 이곳을 떠나라. 그대에게는 전륜성왕의 지위가 보장되어 있지 않은가? 이제 곧 가서 세간을 다스리는 위대한 왕이 되어 그들을 지배하고 오감의 쾌락이 주는 미묘한 맛을 마음껏 즐기라. 석가족의 아들이여! 그대가 추구하는 도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피로만 더할 뿐임을 어찌 알지 못하는가?"
이렇게 회유하자 수행자 고타마는 마왕을 향해 다음과 같은 준엄한 사자후를 한다.
게으른 자의 무리여, 사악한 자여, 그대가 여기에 온 목적은 무엇인가?
그대가 말하는 그 좋은 공덕이란 그것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나에게는 더 이상 쓸모가 없다.
그런 것은 그것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가서 말해 주어라.
……
나는 이렇게 극심한 고통을 묵묵히 감수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은 어떤 욕망에도 끌려가지 않는다.
보라, 내 존재의 이 순수를.
그대의 제1군대는 욕망이며,
제2군대는 혐오이며,
제3군대는 기갈이며,
제4군대는 집착이다.
그리고 그대의 제5군대는 피로와 수면이며,
제6군대는 공포심이요,
제7군대는 의혹이며,
제8군대는 위선과 고집.
그리고 그릇된 방법으로 얻은 이익과 명성이며,
자신을 칭찬하고 남을 경멸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대의 전 병력이며 검은 마군이다.
그러므로 용감한 자가 아니면 너를 이겨낼 수 없으리.
그러나 용감한 사람은 그대의 공격을 이렇게 잘 막아내고 있다.
……
악마여, 사람들도 저 신들마저도
그대의 군대를 격파할 수 없지만,
그러나 나는 지혜의 힘으로
그대의 군대를 쳐부수리라.
굽지 않은 질그릇을 돌로 쳐 깨뜨리듯이" 《숫다니파타》
그리고 수행자 고타마는 머나먼 과거 세부터 한량없는 세월동안 선근공덕을 쌓아왔기에 악마의 군대를 물리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마왕 파순은 그것을 누가 증명할 수 있는지 말해보라고 외쳤다.
수행자 고타마는 오른손을 내밀어 땅을 가리키며 '이 땅은 능히 일체의 물건을 내어 차별이 없는 평등한 행을 하도다. 원컨대 지금 진실을 말하라'고 했다.
이때 땅을 지키고 있던 지신이, '가장 큰 대장부시여, 내 당신을 증명하리다. 제가 아나이다'라고 외치자 대지와 삼천대천 세계의 국토는 두루 크게 진동하였다. 마왕은 이 우렁찬 소리에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수행자 고타마는 마왕의 항복을 받고 아무런 방해도 없이 깊은 선정에 들었다.
일반적으로 절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 불상을 보면 왼손은 가부좌한 발 위에 올려놓고 오른 손은 무릎 위에서 아래로 땅을 향하는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부처님께서 마왕에게 항복 받으신 장면을 나타낸 것이다.
이제 수행자 고타마에게 어떤 장애도 없게 되었다. 깨달음을 끝까지 가로막고 있던 악마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모든 구속이 사라진 수행자 앞에 세상의 이치가 확연히 드러난 것이다.
그 이치는 '모든 것이 서로 의지하여 일어나고,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하기에 저것도 멸하는 것이다'라는 연기의 진리이다. 수행자 고타마는 바로 이 연기의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한편 부처님의 깨달음을 방해한 악마들의 면면을 다시 살펴보면, 이들이 수행자 고타마가 마지막까지 버리지 못한 세간에 대한 애착을 보여주는 듯하다.
끝까지 그를 붙들고 있던 욕망 가운데 가장 먼저 끊을 수 있었던 것을 바로 육체의 욕망 즉, 색욕이었다.
이 세 딸의 이름이 첫째는 은애, 둘째는 상락, 셋째는 대락이라는 것을 보아도 성적 쾌락을 은유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마왕의 공격은 마왕의 여덟 가지 군대라고 표현된 욕망, 혐오, 기갈, 집착 등 마음속의 온갖 번뇌를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왕이 마지막으로 제시한 것은 전륜성왕의 자리였다.
이것은 곧 권력욕을 뜻한다. 즉, 권력욕은 색욕과 공포 보다도 더 질기고 뿌리가 깊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권력욕은 한 개인이나 한 가정을 파멸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한 국가와 민족, 세계를 파멸로 몰아갈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욕망이다.
부처님은 마왕의 항복을 받은 후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세상에선 무기를 써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나
나는 중생을 평등하게 여기는 까닭에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평등한 행과 인자한 마음으로 악마를 물리쳤나니"
《수행본기경》
결국 이 세 가지 욕망을 극복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육체적, 정신적, 제도적 속박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말한다. 마왕의 온갖 유혹과 물리적 위험, 그리고 회유를 극복하는 이 장면은 우리가 가져야 할 불퇴전의 수행 자세가 어떠한 것인지 잘 말해주고 있다.
이와 같이 마왕의 항복을 받은 수행자 고타마는 붓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이 되셨다. 이때가 부처님이 35세 되던 해 음력 12월 8일이었다.
이날은 사실상 불교가 시작된 역사적인 날이며 불교에서는 성도절이라 하여 뜻깊은 날로 삼고 있다. 성도절은 수많은 마왕의 군대를 항복 받고 깨달은 날이며, 인간의 몸으로 신의 세계를 뛰어 넘어 대자유인의 시대를 연 날이다.
부처님은 우리 모두가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보여주셨다.
온갖 번뇌와 고통의 수렁에서 허덕이는 중생들도 사실은 모두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세상에 알려주신 것이다. 부처님의 성불이후 새로운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때가지 인간은 고통과 혼돈, 무명 속에서 신과 제도와 욕망에 사로잡힌 노예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성불하심으로 중생도 대자유, 대자재한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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