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 찾아 가는 길

화엄사와 지리산

難勝 2011. 3. 7. 06:42

화엄사와 지리산

 

상상의 시선이 펼쳐지면…

눈앞의 속세는 지워지고…

옛 건물 품은 산세만 남는다…

 

우리나라 유명한 절들의 입구는 대개 편안함을 주지 못한다. 번잡한 상가들은 별로 매력적이지 못한 기념품들을 앞에 쌓아두고 있고, 어느 절 앞에나 있음직한 산채정식 메뉴를 파는 식당들은 개성 없이 손님들을 찾는다. 관광객들의 입장에서라면 그나마 견딜 만하겠지만 고즈넉한 옛 사찰에서 마음을 잠시 쉬러 온 여행객에게는 절의 입구를 지나는 게 고역이 될 수도 있다.

 

▲ 전남 구례에 자리한 화엄사의 각황전. 국보 제67호다.

팔작지붕의 우아한 자태를 지닌 목조건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구례 화엄사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있던 상가 중 한 곳은 장사가 잘 안되었는지 폐허처럼 방치되어 있었다. 비단 화엄사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같이 지리산을 공유하는 인근 쌍계사 입구에서는 짓다 만 거대한 콘크리트 리조트 건물도 봤다. 모두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우리의 자화상이다. 기분 좋은 광경은 아니다.

 

결국 아름다운 산자락에 자리한 여러 절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나름대로의 고행을 거쳐야 한다. 좋게 생각하면 진정한 극락에 이르기 전 사바 세계의 업들을 감내하는 일종의 고행이다. 그곳만 지나면 우리는 불국정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화엄사의 입구를 지났다.

 

조용히 책을 읽고 싶을 때 떠오르는 숙소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바로 화엄사 앞에 위치한 지리산 프라자호텔이다. 지리산 한화 리조트와 한 쌍을 이루는 이 낡은 건물은 오늘날이라면 결코 호텔 허가가 나지 않을 만한 곳에 위치해 있다. 번잡한 상가 거리를 지나 화엄사 일주문을 지난 산속이다.

 

번잡한 사찰 입구… 짓다 만 콘크리트 건물… 마치 극락 이르기 전 고행 같아…  

지리산 자락의 넘치는 기운과… 아름다운 각황전에 마음 달래…

 

산속을 개발하긴 했지만 그나마 주차장 일대를 평평하게 돋운 것을 제외하면 지형을 살려 두 동의 건물을 배치했다. 그래서 리조트 동은 높게 솟아 있고, 산기슭에 위치한 호텔 동은 위층으로 진입해 아래층에 위치한 객실로 들어가는 구조를 취한다. 호텔의 내부 시설이 세련되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그 부족함은 자연이 채워준다. 발코니에 서거나 호텔 주위를 산책하면 아름다운 숲이 바로 눈앞에 놓인다. 일상의 고통은 물론 복잡한 고민거리조차도 잠시 잊게 만드는 평화로움이다.

 

이 호텔의 존재에 대해 나는 가치관의 혼란을 느꼈다. 이곳에 묵지 않으며 단순히 화엄사를 다녀가는 사람들에게는 산사 길목에 거대하게 놓인 건물이 보기 좋을 리 없었다. 게다가 어찌 보면 비난을 피할 수 없는 자연 훼손이었다. 그런데 막상 그곳을 사용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호텔은 상당히 근사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공원 같은 것이 줄 수 없는 넉넉함이 숙소를 에워싸고 있었다.

 

사실 지금까지도 과연 어떤 것이 최선인지 답을 내리지는 못하겠다. 애초 존재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건축이지만, 나름대로 지형을 살려 산속에 잘 배치하는 방식으로 대처를 했고, 어쨌든 수십 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켜왔다. 다행히 근처의 수풀이 우거져 호텔은 그 모습을 신록에 숨기고 있다. 과연 이것은 좋은 건축인가? 나쁜 건축인가?

 

느릿한 걸음으로 화엄사로 향했다. 우리나라의 화엄 10대 사찰 중의 하나인 화엄사는 무엇보다도 2층 지붕의 형태를 띤 각황전(覺皇殿)이 유명하다. '깨달은 왕'이라는 뜻으로 국보 67호다. 그밖에도 수많은 보물들이 절 안에 즐비하다. 각각의 아름다움을 지그시 응시하며 시간을 보내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종종 삐딱한 시선을 버리지 못하는 나는 경내에 거대하게 증축해놓은 템플스테이 단지가 맘에 들지 않는다. 물론 과거의 상태 그대로만 유지하자고 하는 것은 문화재를 박제로 만드는 일이다. 하지만 과하다 싶을 정도의 확장도 내키지는 않는다. 물론 나보다 훨씬 식견이 높은 분들이 증축 과정에 참여했겠지만, 직관적으로 보기엔 기계로 가공한 석축 위에 거대하게 놓인 새 건물에 거부감이 들었다. 절 입구의 호텔처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기존의 환경에 녹아들지도 모르는 일이나, 조금은 더 소박하게 만들어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언제부턴가는 뛰어난 배치의 원형을 잘 살리고 있는 절이 아니라면 굳이 사찰의 모든 건물과 문화유산을 보려 하지 않게 됐다. 오히려 양지바른 곳에 가만히 앉아 현대에 덧붙여진 흔적들을 머릿속에서 지워가며 과거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때론 더 흥미롭다.

 

이것은 화엄사처럼 덧붙임이 많은 사찰에서는 꽤 유용한 여행 방법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터들에는 절들이 위치하고 있다는 말이 있듯 화엄사 역시 장소의 매력이 적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 배경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기운이 넘친다는 지리산이 아닌가!

▲ 일러스트=오영욱

 

여행을 다니면 종종 스케치를 한다. 사실 서양 건축에 비해 우리 한옥의 모습은 그림으로 남기기가 훨씬 어렵다. 단순히 한옥의 겉모습을 그리는 건 반복적인 요소들을 열심히 따라 그리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한국의 전통 건축에서 보이는 공간감을 작은 종이 위에 담기는 쉽지 않다.

 

이럴 때 상상은 대상을 담는 좋은 방법이 된다. 유기적 관계를 맺는 여러 외부 공간들의 조합이 우리 전통건축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한다면 단순히 눈앞에 보이는 것을 그리자고 굳이 고집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비록 땅 위에 있지만 상상의 시선은 공중으로 날아올라 주변의 지세를 볼 수 있었다. 물론 위성사진으로 보면 되지만 일단 눈에 보이는 정보를 바탕으로 새로운 땅을 상상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건물들이 놓인 모습을 보며 공중의 시선으로 재배치해본다. 굳이 새로 만들어진 것들을 신경 쓰지 않고 옛 모습을 상상해보기 위해 애를 쓴다.

 

막상 상상의 나래를 펴보면 눈으로 보는 광경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공중전화 박스나 자판기, 가설 상점, 새로 들어선 건물과 현수막 같은 것들이 증강 현실의 화면에서처럼 서서히 지워지고 옛 건물과 그 건물들을 품고 있는 산세가 눈에 들어왔다. 산의 형상을 인식하니 다시 절의 배치가 인식됐다. 빈 공간에 건물을 하나하나 세워나갔을 지난 시간이 어설프게나마 그려졌다.

 

여행 중 스케치를 하면 시간이 참 잘 간다. 굳이 많은 목적지가 필요하지 않은 까닭이다. 화엄사에서의 시간은 오후를 넉넉하게 보낼 만큼 여유로웠다. 수많은 나무들은 나중에 심기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저녁을 고민하다가 여전히 그 당위성을 확신하지 못하는 호텔의 지하 한식당에서 먹기로 했다. 종업원은 친절한 목소리로 "요즘 섬진강의 참게가 좋습니다"라며 참게 매운탕을 추천했다. 알이 꽉 찬 참게는 얄밉게도 너무 맛이 좋았다.

 

오영욱(건축가·여행작가) - 조선일보 [Why]  오영욱의 여행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