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일물(無一物)
삼천대천세계는 바다의 물거품과 같다
了了見 無一物 亦無人兮亦無佛
大千沙界海中 一切聖賢如電拂
환하게 꿰뚫어 보니 한 물건도 없으며 사람도 없으며 부처도 없다.
삼천대천세계는 바다의 물거품이며 일체 성현들은 마치 번갯불 같네.
- 증도가 -
무한시간, 공간에 눈 뜬 깨달은 안목엔 이 얼마나 가소롭고 허무한 존재들인가.
이 글은 영가 현각(永嘉玄覺, 665~713)대사의 증도가(證道歌)의 일절이다.
증도가란 현각대사가 자신의 깨달음을 노래한 선시(禪詩)로서 불교의 오랜 역사 속에서 이 증도가 만치 애송되는 선시도 없을 것이다. 이 증도가가 세상에 나온 후로 모든 선지식들이 애송하지 않는 이가 없고 글을 쓰거나 법을 설할 때는 언제나 널리 인용되는 명시다.
현각대사가 6조 혜능스님으로부터 깨달음에 대해서 인가 받고 조계산을 내려오면서 자신의 깨달음에 대한 내용을 장문의 선시로서 펼쳐 보인 것이다.
여기에 소개한 구절은 모든 존재의 원점(原點)은 공(空)이며 무(無)라는 것을 철저히 밝혔다. 깨달음의 눈이 열리기 전에는 모든 것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그대로 였다. 산하대지(山河大地)와 삼라만상(森羅萬象)과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모두가 있었다. 온통 있는 것뿐이었다. 나도 있고 남도 있으며 남자도 여자도 있으며, 부처도 있고 중생도 있으며, 기쁨과 슬픔도 있고, 미움과 고움도 있었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고 나서 모든 것을 환하게 꿰뚫어보니 이 세상에는 한 물건도 없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도 없으며 산하대지와 삼라만상과 두두물물 모두가 없었다. 모든 존재의 원점인 공성(空性)을 볼 줄 아는 반야의 안목에는 삼천대천세계가 마치 물위에 잠간 떠다니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물거품이다. 악착같이 돈을 벌어 전 세계 곳곳에다 회사를 차리고 공장을 건설하여 하늘에 닫는 수백층짜리 황금 빌딩을 세워서 만대에 자랑을 한다하더라도 그 또한 잠간 떴다가 사라지는 물거품이다.
그토록 훌륭하고 위대하고 빛나던 일체 성인들과 현인들마저 한순간 번쩍하고 지나가버린 번갯불이다. 석가와 달마가 그렇고, 공자와 맹자가 그렇고, 노자와 장자가 그렇고, 문수와 보현이 그렇고, 원효와 의상이 그렇고, 황벽과 임제가 그렇다. 하물며 두뇌가 남보다 천배나 뛰어나고 건강과 힘이 만 배가 넘어서 모든 운동경기에서 모조리 혼자 휩쓴다하더라도 그 역시 한순간의 번갯불이 아니겠는가. 또한 덕을 많이 쌓고 지혜가 남달라서 세상에 큰 인정(仁政)을 베풀어 요순(堯舜)을 백배나 능가하는 업적을 남기고 명성을 날렸더라도 그 역시 존재의 실상을 환하게 꿰뚫어 볼 줄 아는 사람의 눈앞에는 한낱 찰나간의 일이다. 하물며 여타의 자질구레한 인간사와 세상사들이야 일러 무엇 하랴. 무한 시간과 무한 공간에 눈을 뜬 깨달음의 안목에는 이 얼마나 가소롭고 허무한! 존재들인가.
일체 유위(有爲)의 존재들은 모두가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고 아침 이슬과 같고 저녁연기와 같고 번갯불과 같다고 〈금강경〉은 가르치고 있다. 인생과 세상을 바르게 이해하고 나아가서 불교를 바르게 이해하는 데는 무엇보다 먼저 이와 같이 모든 존재들을 절대부정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 절대부정을 거친 뒤에 다시 절대긍정으로 나아가는 것이 그 올바른 순서다. 이러한 절차를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라(山不是山 水不是水)”고 한다. 그리고 다음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山是山 水是水)”는 절대긍정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인간의 원점은 공이다. 세상의 원점도 또한 공이다. 사람이 이루어놓은 모든 업적도 또한 그 원점은 공이다. 일체 존재는 원점인 공에서 출발하여 공에 머물다가 공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모든 존재의 부정할 수 없는 진실한 모습이며 이러한 모습을 꿰뚫어 볼 줄 아는 것이 반야의 안목이다. 이것이 발심이며 정견이다. 영가스님의 증도가 중에서도 매우 뛰어난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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