尋劍堂

靈山當時 受佛付囑 - 영축산에서 부처님께 부촉을 받은

難勝 2011. 3. 21. 05:35

 

 

至心歸命禮

지심귀명례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 바쳐 귀의하고 예배드립니다.

 

靈山當時 受佛付囑 十大弟子 十六聖 五百聖

영산당시 수불부촉 십대제자 십육성 오백성

 

영산당시(靈山當時), 부처님의 교화가 한참 성황을 이루었을 때. 가장 절정에 달했을 때 그때를 영산당시, 영산회상 그렇게 합니다. 불교의 어떤 큰 행사가 펼쳐지고 거기에 아주 아름다운 여러 가지 불교적인 그런 모습들을 보고 높은 법문을 듣고 이렇게 해서 환희심이 넘칠 때 우리는 흔히 표현하기를 아! 이게 바로 영산회상이다. 이런 표현을 하죠. 영산당시고 바로 영산회상이다. 부처님의 교화가 한참 참으로 절정에 달했을 때 바로 부처님이 교리상으로 꼭 맞는 건 아니지만은 흔히 배대하기를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실 그런 때를 영산회상 또는 영산당시 이렇게 표현을 하죠. 왜냐하면 그때가 전통불교에서 교학적으로 과판을 하면은 부처님의 연세가 칠십 정도 되었을 때입니다.

 

그때는 훌륭한 제자들이 아주 많았었구요. 또 부처님을 따르는 신도들도 무수하게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얼마인지 모를 정도이고 일반 신도들도 수없이 많고 그래서 정말 불교가 인도에 널리 퍼져서 부처님의 교화가 크게 성하던 때를 영산당시라고 그렇게 하죠. 사실 부처님이 홀로 출가하셔서 깨달아가지고 겨우 다섯 비구를 앉혀놓고 녹야원에서 당신의 깨달음을 이야기하던 그때를 생각하면 영산당시는 아주 뭐 그런 급속 성장이 없죠. 어떤 종교지도자가 그렇게 많은 제자들을 둘 수 있었겠습니까?

 

또 지금 2600년, 2700년에 가까운 세월이 물론 지났습니다만 지금 동. 서양 어디 없이 불교가 들어가 있지 않은 데가 없고 또 세상이 밝아지고 과학이 발달할수록 부처님의 가르침은 더욱더 빛을 보고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아직도 미쳐 오르려면 까마득하게 많이 남아 있고 과학이 발달할수록 부처님의 가르침은 더욱더 분명하고 또 이치에 맞다고 하는 것이 증명되어가고 있는 그런 실정입니다.

 

참으로 어떤 사업을 우리가 보더라도 이 세상에서 이렇게 부처님의 교화 사업같이 이렇게 승승장구로 발전해 나온 그런 일은 없습니다. 어찌 부처님의 교화사업같이 크게 발전했겠습니까? 역사상에 그 면열해간 그 많고 많은 훌륭한 조사스님들 또 훌륭한 제자들 그런 그분들까지 생각한다면 참 대단한 교화사업으로 날로 번창해가고 있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은 영산당시에 여기 십대제자 십육성 오백성이라고 했는데

 

獨修聖 乃至 千二百諸 大阿羅漢 無量慈悲聖衆

독수성 내지 천이백제 대아라한 무량자비성중

 

이 분들은 수불부촉(受佛付囑)이라고 그랬어요. 부처님의 부촉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영산당시에 부처님의 부촉을 받은 사람으로써 십대제자 십육성 이렇게 나가는데 이건 법화경을 근거로한 예불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 부촉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당부, 부처님의 지시, 부처님의 법문을 듣는 일 그 자체가 부처님의 지시와 가르침과 당부를 다 받은 것이죠. 특히 부촉이라고 할 때는 수기의 의미를 많이 담고 있습니다.

 

그대는 어떻게 어떻게 수행해서 언제쯤 성불할 것이고 그때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교화하게 되겠는데 성불하면 부처의 이름은 무엇이고 국토의 이름은 무엇이고 또 세세하게 부촉하고 수기하는 데는 제자들 이름까지도 열거한 그러한 부분들이 있죠. 그래서 여기에 십대제자가 다 법화경에서 수기를 받았고 또 수많은 그 아라한들이 수기를 받고 그러죠. 여기 십육성 오백성은 말할 것도 없고 모두가 수기를 받고 나중에 상불경보살(常不經菩薩)의 입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을 다 수기하는 그런 내용으로 이어져 있는 것이 법화경입니다.

 

상불경보살은 어떻습니까? 아무리 참 우리가 기억해 내고 그것을 다시 생각하고 또 이야기를 해도 참으로 감동적인 그런 가르침이 상불경보살의 이야기인데요. 항상 상(常)자 아니 불(不)자 가벼울 경(經)자 항상 상대를 가벼히 여기지 않고 존경하노라. 부처님으로 존경한다. 왜냐? 모두가 부처님이기 때문에 이런 뜻이죠. 이분은 경을 읽거나 참선을 하거나 기도를 하거나 하지 않고 모든 사람. 만나는 사람마다 전부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고 예배하고 또 수기를 줍니다. 나는 당신을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깁니다.

 

당신은 반드시 부처님이 되시기 때문에 나는 부처님으로 이렇게 받들어 섬깁니다. 이렇게 하니까 어떤 사람들은 잘 듣지만 혹 어떤 사람들은 되지도 않은 비구가 쓸데없는 허망한 수기를 나에게 주느냐 너같이 도(道)도 높지 않고 법력도 없는 사람이 주는 수기 믿지도 않는다 하면서 욕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 막대기나 돌로 때리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분은 저만치 도망을 가서 또 그 사람을 향해서, 돌을 던지고 막대기로 때린 그 사람을 위해서 역시 같은 이야기를 하죠. 나는 그래도 당신을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고 존중합니다. 당신을 부처님이 되실 분입니다. 그런 말씀을 합니다.

 

숱한 고초를 받아가면서 그런 모든 사람들에게 부처라고 하는 사실을 일깨우는 거죠. 그게 인불사상의 극치입니다. 법화경이 수기품이 많은데 수기품 말고도 그냥 수기품이 있고 오백제자 수기품이 있고 그 외에도 수기가 간간히 이어지는데 그 수기의 절정이 바로 상불경보살품에서 그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모든 사람은 다 부처님이다 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법화경이 회삼귀일(會三歸一)아닙니까? 삼(三)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의 다종다양한 삶의 형태와 모습과 수행의 차제들이다 라고 볼 수가 있고 그것은 궁극에 가서는 하나인 부처의 삶으로 귀결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삼승(三乘)을 모아서 일승(一乘)으로 귀결한다하는 것이 회삼귀일의 법화경의 그 내용이죠. 그 속뜻은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 지금 어떠한 삶을 사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모두가 부처님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 보면 모두가 부처님이다. 제대로 못 보아서 중생으로 보이고 도둑놈으로 보이고 나쁜 놈 사기꾼 뭐 온갖 흉악한 그런 사람으로 보이지만은 보다 더 전문가적인 그런 존재의 실상의 꿰뚫는 안목으로 본다면 그대로 참 부처님이다 하는 그런 이야기가 바로 법화경이죠. 마치 옛날에 연성지벽(連城之壁)라고 하는 그런 유명한 구슬이 있었죠. 어떤 사람이 그걸 왕에게 바쳤는데 왕이 겉에는 돌로 되어 있고 안에는 아주 뛰어난 구슬인데 돌을 가지고 뛰어난 구슬이라고 속였다고 쫓아냈죠.

 

그 다음에 또 왕에게 바쳤는데 또 이제 알아주지 않고 쫓아냅니다. 처음에 한번 그랬을 때 다리하나를 잘라요. 그 다음에 두 번째도 다리하나 잘립니다. 그런 두 다리가 없는 사람이 또 세 번째까지 바치게 되는데 그럴 때 산에서 아주 슬피 울어요. 엉엉 아주 슬피 우는데 그 슬피 우는 울음소리가 워낙 애절해서 왕의 귀에까지 들렸고 왕이 그 사람을 불러서 왜 그리 슬피 우느냐? 아이~ 왕을 속이고 국가형벌을 받아 다리 둘 잘린 사람이 너 뿐이더냐? 어찌하여 그렇게 서글프게 우느냐 하니까

 

내가 다리 잘린 것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이 천하의 명옥을 몰라주는 것이 슬플 뿐입니다. 그래서 웁니다. 라고해서 그래 세계적으로 유명한 옥 감정사를 불러가지고 감정을 해보니까 정말 천하에 둘도 없는 훌륭한 옥이더라. 하는 그런 이야기죠. 그래서 성(城)을 하나, 지금 땅으로 치면 우리나라 경상도 정도나 뭐 이렇게 큰 땅을 잘라서 줬다 해서 그래서 연성지벽이라 이런 말도 있죠. 그와 같이 겉으로 보기에는 돌이지만 그 속 내용을 전문가의 안목으로 자세히 보면 아주 세상에 둘도 없는 그런 값비싼 옥(玉)이듯이 우리 중생도 그렇습니다.

 

겉으로는 사기꾼이고 도둑놈이고 뭐 남자. 여자. 늙었다. 병들었다. 저 사람은 성격이 영 형편없는 편협한 사람. 외곬수. 고집불통 등등 온갖 좋지 아니한 형용사를 다 동원해서 사람을 낮춰서 보지만은 그러나 부처님이나 보살이나 조사님 같은 그런 사람을 보는 전문가의 안목을 가진 사람의 눈에는 참으로 소중한 생명이요. 소중한 부처님이요. 그 사람 그대로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을 보시고서 그렇게 눈에 들어오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부처님도 결국은 최후로 내가 사람들에게 일러줄 말은 “그대들이 그대로 부처님이다.”하는 이 사실을 일깨워주고 싶다하는 것. 이것뿐이죠. 달리 다른 것 있겠습니까? 그래서 법화경이 불교의 결론으로서 최후의 열반을 앞두고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노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도 법화경에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은 참으로 차원이 높은 경전을 우리가 잘 공부해서 정말 불교에도 여러 차원의 가르침이 있는데 이왕이면 우리에게 큰 소득이 있는 높은 차원의 가르침을 마음에 잘 새겨듣고 그것을 느끼고 깨달아야 할 줄 압니다. 영산당시(靈山當時) 수불부촉(受佛付囑)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앞서 간단하게 말씀드린 그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십대제자(十大弟子)! 십대제자는 우리가 다른 기회에도 익히 들어서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십대제자는 첫째 지혜제일 사리불. 신통제일 목건련. 또 흔히 선종에서는 두타제일 가섭존자를 치고 그 다음에 뭡니까? 다문제일 아난타를 칩니다만은 사실 부처님 당시나 경전상에 많이 나타난 그런 인물로 볼 때는 사리불. 목건련을 치지요. 두타제일 가섭존자. 천안제일 아나율. 혜공제일 수보리. 금강경의 주인공이죠. 수보리. 설법제일 부루나. 논의제일 가전련. 지계제일 우바리. 밀행제일 부처님의 아들 라후라. 다문제일 아난타 이렇게 십대제자가 주축이 되죠. 너무나도 유명한 그런 제자들입니다.

 

이런 분들이 다 법화경에서 수기를 받지요. 구체적으로 이름을 거론해 가면서 수기를 받는 그런 장면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십육성이라고 해서 우리가 영산전이라고 큰 절에 가면 십육나한을 모셔놓은 전각이 있죠. 그 십육성이 바로 많은 나한아라한과를 증득한 부처님의 제자들이 많은데 그중에서 특히 십육아라한을 열거합니다. 십육나한 또 오백나한 천이백나한 이렇게 분류를 하죠.

 

여기에 이름만 조금 소개를 하면 빈도라발라타사(賓度羅跋惰) 가락가벌차(迦諾迦伐蹉), 가락가발리타사(迦諾迦跋釐墮), 소빈타(蘇頻陀), 낙거라(諾距羅), 발타라(跋陀羅), 가리가(迦理迦) 벌사라불다라(伐闍羅弗多羅), 수박가(戌博迦), 반탁가(半託迦), 나호라(囉怙羅), 나가서나(那迦犀那), 인게타(因揭陀), 벌나파사(伐那婆斯), 아시다(阿氏多), 주다반탁가(注茶半託迦)존자 이렇게 열여섯 명의 그 이름은 구체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분들은 당시에 현존했던 역사적인 인물이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나한 신앙이 우리나라에도 십육나한은 큰절에는 거의 다 모시고요. 그 다음에 오백나한을 모신 사찰도 꽤 있죠. 우리나라에도 나한신앙이 상당한데 특히 나한 신앙은 중국에서 아주 성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성하죠. 나한! 그 실물, 보통 사람의 크기만 한 그런 형상을 오백명을 법당에다 모셔놨는데 그 법당 크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그런 모습들을 중국에서는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십육나한은 말할 것도 없고 오백나한을 모두 조성을 해서 그렇게 모신 사찰이 많죠. 그만치 나한 신앙이 성합니다. 우리나라에도 나한 기도가 영험이 있다 그런 이야기도 있어서 기도 좋아하시는 분들은 특히 나한전에서 기도하는 경우가 있죠.

 

제가 어릴 때 해인사에서 강원 학인으로 있을 때 나한전부전을 봤어요. 대개 삼배(三拜) 정도 합니다. 각 법당은 거의 삼배로써 끝내는데 그 십육나한이 모셔져있고 거기에 마침 어떤 분이 기도를 하면서 십육나한 사시는 곳. 그 다음에 이름을 쭉 적어서 걸어 놓았길래 마침 잘되었다 싶어서 내가 부전 보는 동안 십육나한 이름을 거론하면서 예배를 드렸던 기억도 새삼 납니다. 그리고 여기 오백성이라고 되어있죠. 여기 오백성도 역시 오백나한 아라한과를 증득했다하는 그런 뜻이죠. 그 다음에 독수성은 홀로 수행한 성인, 이런 말인데 독성각이라고 잘 알려져 있죠.

 

그 다음에 천이백제대아라한 그랬습니다. 부처님을 모시고 다니는 부처님의 제자가 그걸 상수중 , 항상 따라 다니는 대중. 그러죠. 천이백오십인. 사실 천이백오십이라 그러는데 큰 숫자만 들어서 천이백명 그렇게 합니다. 금강경에서 천이백오십인으로 더불어 계셨다. 이런 표현이 있죠. 이들은 여러 큰 아라한이다 그랬습니다. 보통수행의 계의를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이렇게 해서 제일 수행이 높아진 단계를 아라한이라 그렇게 하죠. 부처님도 아라한이라고 표현한 예가 있습니다.

 

응공! 공양 받을만하다. 학덕이 높고 수행이 높아서 공양 받을 만 하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정말 떳떳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공양 받을 만한 인물이 되는 것. 그것도 쉬운 게 아니죠. 참으로 어려운 경지입니다. 이분들이 다 그런 경지에 올랐다하는 것입니다. 이분들은 한량없는 숫자이고 그리고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분들이기에 자비하신분이다. 그리고 성스러운 대중들이다. 이것을 다시 정리하면 영산당시에 부처님의 부촉을 받은 십대제자 그리고 십육아라한 오백아라한 독수성 그리고 천이백 여러 큰 아라한들 그리고 그 외 한량없는 자비스러운 성인대중들에게 지극한 마음으로 이 목숨 바쳐 귀의하고 예배드리옵니다.

 

이런 의미입니다.

- 무비스님의 예불문 강의 中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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