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왕과 그의 아들
먼 옛날, 모든 것이 풍족하고 평화로운 한 나라가 있었습니다.
이 나라를 다스리는 왕은 장수왕이었습니다.
장수왕은 평화를 사랑하는 매우 자비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는 태자가 하나 있었는데 태자의 이름은 장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의 이웃에는 포악한 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이 포악한 왕은 장수왕이 다스리는 나라를 호시탐탐 노리다가 마침내 어느 날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왔습니다.
이에 장수왕과 신하들은 대전(임금이 거처하는 궁전)에 모여 대책회의를 열었습니다.
신하들은 하나같이 군사를 일으켜 나가 싸우기를 간청했습니다.
하지만 장수왕은 손을 저으며 말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기면 저들이 죽을 것이고, 저들이 이기면 우리가 죽을 것이다.
저쪽 군사나 이쪽 군사나 다 소중한 목숨들이 아니냐.
누구나 제몸을 소중히 여기고 목숨을 아까워하는데, 내가 살기 위해 남을 해치는 것은 어진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또 왕은 태자 장생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이웃 나라의 왕은 우리 나라를 차지하고 싶어한다. 내가 나라와 왕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전쟁을 한다면 틀림없이 선량한 백성들이 희생될 것이다.
나는 차라리 이 나라를 저 왕에게 순순히 내주어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것이다."
장수왕은 그렇게 말한 뒤 태자와 함께 성을 빠져 나가 산 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에 이웃 나라의 포악한 왕은 전쟁도 하지 않고 쉽게 장수왕의 나라를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후환을 없애기 위해 장수왕을 체포하라는 포고령을 내리고 황금 천 냥의 현상금을 걸었습니다.
어느 날, 장수왕은 어느 마을 근처의 나무 밑에 앉아 덧없는 인생에 대해 생각하며 쉬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늙은 바라문이 다가와 보시를 청했습니다.
그러자 장수왕이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새 임금이 나를 잡기 위해 막대한 현상금을 걸었다고 하니 나를 잡아다 넘기십시오. 그러면 많은 현상금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라문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장수왕이 다시 말했습니다.
"이 몸은 머지않아 썩어 없어질 것인데 아껴서 무엇 하겠습니까.
한 번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는 법이라 누구도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지금 나를 잡아가지 않는다 할지라도 내 몸은 언젠가 한 줌의 흙이 되고 말 것입니다."
바라문은 장수왕의 말에 감동하여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당신은 자비를 베푸는 거룩한 분입니다. 어찌 그 고귀한 생명을 빼앗아 더러운 이 몸을 구원하겠습니까."
바라문은 그렇게 말한 뒤 곧 돌아서 가버렸습니다.
장수왕은 바라문이 간 길로 계속 따라갔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군사들에게 붙잡혀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며칠 후, 장수왕은 형장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장생 태자가 나무꾼으로 변장하고 부왕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때 장수왕은 아들을 알아보고 조용히 유언을 남겼습니다.
"아들아, 내 마지막 말을 명심해라. 원한을 품어 그 재앙을 후세에까지 남기는 것은 효자의 도리가 아니니라.
원한을 원한으로써 갚지 말라."
장생은 차마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볼 수 없어 깊은 산에 들어가 숨어버렸습니다.
장수왕은 그날 예정대로 처형되었습니다.
그 뒤 장생은 생각할수록 분해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꼭 복수하고 말 테다!"
장생은 원수를 갚기 위해 이를 악물고 그렇게 맹세했습니다.
얼마 후 장생은 자기 신분을 감추고 궁전으로 들어가 그 포악한 왕의 시종이 되었습니다.
장생은 매우 충성스럽게 행동하여 왕의 신임을 얻었습니다.
물론 왕은 그가 장생 태자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장생은 왕과 함께 사냥을 나갔다가 숲 속에서 길을 잃고 사흘 동안이나 헤매었습니다.
왕은 피로와 배고품에 지쳐 허리에 찼던 칼을 풀어 장생에게 맡기고 그의 무릎을 벤 채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장생은 그토록 별러 오던 기회가 찾아온 것을 기뻐하며 얼른 칼을 빼 왕의 목을 내려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문득 '원한을 원한으로 갚지 말라. 내 유언을 어기면 효자가 아니니라.'라고 하신 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장생은 빼들었던 칼을 다시 칼집에 꽂았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세 번 되풀이하는 동안 마침내 왕이 깨어났습니다.
"무, 무슨 짓이냐?"
왕이 깜짝 놀라 묻자 장생이 슬피 울며 그 자리에 엎드렸습니다.
"저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부왕의 태자 장생입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면서 원한을 원한으로써 갚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리석게도 악을 악으로 갚으려고 세 번이나 칼을 빼들었다가 그때마다 아버지의 유언을 생각하고 칼을 거두었습니다. 길을 잃게된 것도 사실은 제가 일부러 한 짓입니다. 왕이시여, 저를 죽여 주십시오. 그러면 원한을 원한으로 갚으려는 비극은 더 이상 계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속으로 깊이 뉘우친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두 내 잘못이오.
그 동안 나는 너무 포악하여 선악을 구별하지 못했소.
당신의 아버지는 훌륭한 성인이었소.
비록 나라는 잃었지만 그 덕은 잃지 않았소.
당신 또한 아버지의 유언을 잘 이어받은 훌륭한 사람이오.
내 목숨은 당신의 손에 달렸었지만 당신은 나를 용서하여 죽이지 않았소.
용서를 빌어야 할 쪽은 당신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요."
왕과 장생은 손을 마주 잡고 숲에서 나와 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후 왕은 장생 태자에게 나라를 되돌려 주고 자신은 군사를 이끌고 순순히 자기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자기 나라를 빼앗으려고 쳐들어온 사람에게 순순히 왕좌를 내줄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그뿐 아니라 자기 목숨을 빼앗기고 아들에게 원한을 원한으로 갚지 말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아마 그런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왕은 끝없는 윤회의 굴레를 통해서 인간의 삶을 볼 줄 아는 현자입니다.
자기라는 존재를 드넓은 생명의 바다에 출렁이는 한 개 파도로 이해하는 훌륭한 인물입니다.
원한을 원한으로써 갚지 말라는 교훈은 윤회의 괴로움을 속속들이 다 아는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되풀이되는 원한의 고리는 계속 악순환되면서 결국 우리들의 삶을 병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말씀]이란 경전에도 다음과 같은 게송이 나옵니다.
사람 사이에 생긴 원한은 원한에 의해서는 결코 풀어지지 않는다.
원한을 버릴 때만 풀리나니 이것은 변치 않는 영원한 진리다.
어느 한쪽에서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원한은 또 다른 원한을 낳습니다.
결국 원한의 고리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게 되지요.
우리 속담에, 져주는 것이 결과적으로 이긴다는 도리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법정스님이 들려주는 [참 좋은 이야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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