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광 국사 해린(984~1070)이 법상종풍을 크게 드날린 법천사지는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에 자리잡고 있다. 현재는 폐사가 되었지만 지광 국사가 활약한 그 당시에는 1천명의 승려가 상주했다고 전한다. 지금은 국보 59호 「지광국사현묘탑비」만이 남아 있다. 이 비석이 한국 茶史에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왜냐하면 차와 관련된 글자가 무려 6군데나 나오기 때문이다. 차 중에서 최고로 치는 제호 라는 표현을 이 비석에서 만날 수 있다.
차와 관련된 금석문으로는 「낭혜화상비」의 ‘명발(茗)’과 쌍계사 「진감선사비」 의 ‘한명’, 고달원 「원종대사혜진탑비」의 ‘방초’ 등이 있다.육우는 『다경』에서 차(茶)를 5가지로 말했는데 다, 가, 설, 명, 천 등이 그것으로 이중 최고의 차로 손꼽은 천자라는 차자를 이 법천사지 지광 국사의 금석문을 통해서 만날 수 있다.
다선일미 사상은 선종 사상만이 지닌 백미다. 선종에서는 차 한 잔에 우주가 녹아들고 빗물처럼 흐르는 속세 사념을 말끔히 씻어내는 역할을 했다. 그와 같은 선종 본래의 다반사가 법상종파의 고승들에 의해 연연히 이어져 오고 있었다. 특히 신라·고려를 거쳐 법상종풍을 일으킨 고승들은 다선일미 사상을 유식학적으로 접목시켰다. 선과 법상은 떨래야 뗄 수 없다. 법상종 출신의 고승들은 입당 이후 중국에서 선종을 받아들여 선다일여의 사상적 근간을 이룬 것을 봐도 짐작된다. 원효·의천·진공·석초 등 당대 이름을 떨친 고승들이 법상종 출신이라는 점도 주목된다.
이와 같은 사상적 맥락은 선과 화엄이 만나는 과정에서도 살필 수 있다. 신라 불교가 황금기였을때 대부분 선승들은 화엄학에서 선종으로 바꾸게 되었다. 혜철·무염 등이 그들인데 그들은 입당한 이후 중국에서 법을 받아와서 직지인심 견성성불사상을 일으켰다. 그들이 차선일미사상으로 대중을 제접했다. 초기의 법상종학파들 중에서 원주 흥법사의 진공, 오관산순지, 지곡사의 진관 선사 석초(912~964) 등도 중국에 들어가 선다일여 정신을 이어와 선종 본래의 청규인 다반사를 실천해 왔다.
특히 법천사 학파의 지광 국사 해린과 지광의 직제자인 금산사의 혜덕 왕사 등에 의해 연연히 계승되어 왔다.지금도 금산사에 야생차가 자생하고 있는 것이나, 여러 문헌 자료 등을 통해 법상종의 차풍이 오랜기간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소공 거사가 금산사에 주석했을 때 작설차를 손수 9증 9포로 볶아냈던 노승이 있었다며, 그 작설차야말로 불가에 전해 내려온 사원차의 차법이라고 증언한 바 있다.혜덕 왕사의 비에는 『송고승전』의 「규기전」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유식학의 연원을 밝히고 있다.
법상종은 현장의 유식론을 계승한 종조다. 당나라 태종 문황제가 신라 진평왕과 선덕여왕 시대에 유가론 10권을 보내옴으로써 유식학이 이 땅에 전파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원효 법사가 인도하였고 태현이 그 뒤를 이어 중흥하였다.
신라의 태현, 진표 등에 의해 꽃을 피운 유식불교는 고려에 접어들면서 차향과 접목시키면서 전성기를 맞는다. 고려 때에 연등회나 팔관회 등에는 차가 반드시 사용되었다. 이때 진차(進茶)나 다과(多寡)를 베풀고 신하들에게 차를 내렸다. 그뿐만 아니라 귀한 차와 향을 고승 들에게 선물로 내리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당시 고려불교를 리드했던 법상종의 고승들에게 국왕이 차와 향을 내렸었다. 지광 국사에게도 은으로 만든 놋쇠그릇과 향천(香)을 내렸다. 향천이란 차 중에 가장 으뜸가는 차를 말한다. 또 그의 제자 금산사 혜덕 왕사에게도 가사와 차, 향을 내렸었다. 유식학파들은 당시에 왕실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다. 고려 6대 선종은 임금의 몸으로 불공에 쓸 덩어리차 (團茶)를 맷돌에 넣어 손수 갈았다. 그 모습을 본 최승노(崔承老)는 상소를 올렸다.
상감께서 공덕을 쌓으려고 직접 차를 맷돌에 갈아서 정성을 다하는데 이는 부질없는 일로 옥체를 상할까 두렵습니다.
이러한 폐단은 광종 때부터 비롯되었던 일로 불가의 인과응보를 믿는 데서 오는 부질없는 일인 줄 압니다. 부디 손수 차를 가는 일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최승노가 죽자 성종은 뇌원차 200각과 덩어리차 10근을 부의로 하사하였다는 기록도 보인다. 고려 왕자 의천도 천태선을 차로 이끌어낸 인물이다. 송나라에 들어간 의천은 천태학뿐만 아니라 차문화를 이끌어 왔다. 그때 중국 전용 어전차인 용봉단차를 선물받아 온다. 뒷날 법안종과 천태종은 통합되었다. 「개성 영통사의 대각국사 묘지명」에 따르면 대사는 계율·법상·열반·원융·선교 등 6종에 통달했다고 전한다법안선과 법상종의 차선일여의 정신은 지곡사 진관 선사에 의해 실현케 된다. 진관 선사는 928년 법천사 현전 율사에게 나가 구족계를 받고 출가를 한다. 법천사에서 법상학 특히 유식학을 익히고 중국으로 건너가 절강성 서쪽의 용책사에서 용책 자용 선사에게 인가받고 돌아와 법안선을 이 땅에 퍼트린다. 지금의 산청의 지곡사지에는 진관 선사가 당시 심었다고 전하는 야생 차나무가 남아 있다.법천사는 원주를 사이에 두고 남한강변에 자리잡고 있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전소되기 전까지 1천여 명의 승려가 주석했던 곳으로 아침 저녁으로 쌀씻은 물이 남한강변까지 흘렀다고 한다. 지광 국사가 유식학을 드높인 이곳에는 현재 당간지주와 돌비석만이 버티고 있고, 일제시대에 지광 국사의 현묘탑이 총독부로 옮겨져 지금은 경북궁 뒤뜰에 있다. 법천사는 봉명산의 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고, 작은 마을이 있다. 조선시대의 불세출의 인물인 한명회가 글을 읽었다는 서원은 온데간데 없고 법천리를 알리는 거대한 고목만이 나그네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지광국사현묘탑비」만이 봉명산 자락 법천사지에 우뚝 서 있다. 바로 여기가 고려 때 법상종을 일으킨 거찰이었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이 비석은 국사가 입적한 후 18년(1085)만에 정유산이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안민후(安民厚)가 글을 썼다. 전체 높이는 4.55미터이고, 비석 높이는 2.97미터의 거대한 이 비석이다. 비문을 살펴보면 이렇게 전하고 있다.
지광의 어머니의 꿈에 하천과 우물들이 흘러넘치는 꿈을 꾸고 잉태하였다. 어릴 때 이름은 수몽으로 불렸다. 어느 날 관상을 잘 보는 노인이 있었는데 스님의 손금을 보고 말하기를, “만약 네가 출가하여 스님이 된다면 반드시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지광은 19세 무렵 법천사에서 해린이란 법명을 받고 출가하기에 이른다.
출가한 그의 법음은 바다를 덮을 정도로 온 산하에 메아리쳐 해조음과 같다 하였다. 비문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전한다.
1067년 10월 23일 편안히 오른쪽으로 누워 잠이 들었다. 이날 밤에 이슬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국사께서 제자들에게 “바깥 날씨가 어떤가”하고 물었다. 제자들이 “이슬비가 내리고 있습니다”라고 하자 곧 입적하였다.옛날 사리불이 입적할 적에 무색계 천신의 눈물이 마치 봄에 내리는 이슬비와 같았으니 오늘밤에 내린 비인들 어찌 제천의 눈물이 아니겠는가. 슬프도다! 세수는 87세요, 승랍은 72세 였다. 임금은 부음을 듣고 크게 슬퍼하시고 특사를 보내어 빈소에 조문토록 하되 정중한 장례를 치르도록 하는 한편 지광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아울러 차향과 유촉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11월 9일 법천사의 봉명산 동쪽 좋은 곳을 골라 다비하니 그때 사람 과 귀신이 슬퍼하고 하늘은 어두워지고 짐승들까지도 슬퍼했다.
지광 국사의 비문은 우리나라 차문화사에 귀중한 자료로 자리잡고 있다. 지금까지 최치원이 찬한 쌍계사 진감국사의 비문은 차에 대한 최고의 금석학적 자료로 평가받아 왔다. 그러나 지광 국사의 비에는 무려 6군데나 차 관련 금석문이 나옴으로써 우리나라 차문화재로서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선불교가 중국에서 동쪽으로 건너올 때 중국 선승들이 신라인에게 법을 주면서 우려한 말이 ‘동류지설’이다. 동류지설이란 당나라에 선이 소멸되면 동쪽에서 선을 묻을 것이라는 뜻인데 동다(東茶)는 바로 동쪽 나라의 차를 말한다.
「지광국사현묘탑비」에는 물을 무척 강조한 대목들이 눈에 띈다. 그의 이름에서도 거룡(居龍) 해린(海鱗) 등이 눈에 띈다. 지광 국사가 법상종을 일으킨 법천사는 남한강물이 모여서 흘러나가는 곳으로 당시 수상교통의 요지였으며 흥원창이 설치된 곳이기도 하다. 『고려사』에는 흥원창을 설명하길 “고려시대 12주장의 하나로 이 지역의 세곡을 수납하여 보관하고 남한강 수로를 통하여 경창으로 보내는 곳이었다” 하였다.이귀례 회장은 비석을 읽어내려 가다가 ‘제호(醍)’라는 글을 발견하고 “차 중에 최고의 차가 바로 제호”라고 설명을 하였다. 비문의 마지막 구절 송덕시는 이렇게 전한다.
몸은 비록 건강하여 새지 않지만 이 생명은 머지 않아 끝날 것일세. 身雖不漏命也 云亡
아름다운 제호도 맛을 잃었고 향기로운 담피향(일종의 향나무)도 향기가 없네! 醍輟味歇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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