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에조 보고서

難勝 2011. 4. 27. 21:03

에조 보고서

 

〈에조 보고서〉는 을미사변 직후 조선 정부 내부(內部, 요즘의 내무부) 고문의 직책을 가지고 있던 이시즈카 에조(石塚英藏)가 일본 정부의 법제국 장관인 스에마쓰 가네즈미(末松謙澄)에게 별도로 보낸 장문의 보고서이다.

 

목차

1 작성자

2 발견 과정

3 보고서 전문의 발견 과정

4 보고서의 내용

5 참고 자료

6 주석

 

 

작성자

일인들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할 당시 현장에 있던 20대의 젊은 낭인이었던 이시즈카 에조를, 1988년 《민비암살》(閔妃暗殺)을 발간한 일본의 저명한 전기작가 쓰노다 후사코(角田房子) 여사가 자신의 저서에서 “민비의 유해 곁에 있던 일본인”이라고 설명하였다. 이때 내부 고문은 정식 직책이 아니라 명목상의 직책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시즈카 에조는 낭인으로서 명성황후 시해에 참여하기 이전에는 법제국 참사관을 지냈으며, 에조의 보고서는 현장 총지휘자라고 할 수 있는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조선 주재 일본 공사의 재가를 받지 않고 이전 상관에게 보내진 셈이었다.

 

 

발견 과정

〈에조 보고서〉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7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철저하게 숨겨져 있다가 일본의 역사학자 야마베 겐타로(山邊健太郞, 1905∼1977)인데, 그는 1964년 《코리아평론》 10월호에 〈민비사건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하였고, 1966년 2월 《일한병합소사》(日韓倂合小史)를 이와나미(岩波書店)에서 발간했다. 여기에서 “사체 능욕”이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썼고, “명성황후 능욕설”의 원조가 됐다. 《일한병합소사》가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된 때는 1982년 6월이다. 신학자 안병무 선생이 《한일합병사》(범우사)로 제목을 바꾸어 번역했는데, 문제의 ‘능욕설’ 대목이 존재한다. 이 능욕설 대목은 야마베 겐타로가 〈에조 보고서〉를 근거로 서술하였다는 근거로 여겨지지만, 그의 책에서 보고서의 존재는 거론하지 않았다.

 

야마베 겐타로가 〈에조 보고서〉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책은 1966년 9월 발간한 《일본의 한국병합》(日本の 韓國倂合)이다. 친북조선 계열 출판사에서 발간된 이 책은 국내에 번역되지 않았다. 야마베 겐타로의 언급 이후 ‘능욕설’은 재일 사학자 박종근, 나카쓰라 아키라 등이 거론한 바 있다. 그러나 ‘능욕설’의 전적(典籍)이라 할 수 있는 〈에조 보고서〉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의 저서에도 등장하지 않았다고 김진명 씨는 주장한다.

 

〈에조 보고서〉가 다시 언급된 때는 1988년이다. 앞서 거론했던 쓰노다 후사코 여사의 《민비암살》(김은숙 한국교원대 교수 번역, 조선일보사 출간)에 잠시 등장한다.

 

 

보고서 전문의 발견 과정

소설가 김진명이 쓰노다 후사코 여사의 《민비암살》을 읽다가 그 행간에서 명성황후의 죽음에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음을 깨닫고, 그 책을 번역한 김은숙 교수를 통해 후사코 여사로부터 대여섯 권의 전적을 소개받았으나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그 뒤 한국과 일본을 찾아다녔지만 찾지 못했고, 후사코 여사마저 “기억이 희미하다”라며 물러섰다.

막다른 골목에서 김진명은 평소 알고 지내던, 동경 히토츠바시 대학에서 외교사를 전공하는 권용석에게 보고서를 찾아 달라고 부탁하고 귀국한다.

 

김진명이 한국에서 지내던 어느 날 권용석이 그에게 책 몇 권과 자료를 보내었다.

그중에는 《일본의 한국병합》도 있었고, 그 책을 읽다가 김진명은 ‘능욕’ 장면 중 일부를 발견하였지만, 에조 보고서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진명은 문득 짚이는 것이 있어 《일본의 한국병합》을 다시 꺼내들었다.

문득 ‘야마베 겐타로가 〈에조 보고서〉를 발견한 장소를 어딘가에 밝혀놓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에조 보고서〉를 언급한 그 책의 223쪽 주석에 출전이 “국립국회도서관(國立國會圖書館) 헌정자료실(憲政資料室) 장(藏) <헌정사편찬회문서(憲政史編纂會文書)”라고 밝혀져 있었다고 한다.

 

김진명은 일본의 권용석에게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 가서 그 문서를 찾아 팩스로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던 〈에조 보고서〉 전문은 장장 107년 만에 그렇게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보고서의 내용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원인과 발단에서부터 실행자와 사후 대책까지 충실하게 기록하고 있는 〈에조 보고서〉의 분량은 각 2쪽씩을 차지하고 있는 목차와 서문을 포함해 모두 12쪽이다. 아울러 보고서는 (1)발단, (2)명의, (3)모의자, (4)실행자, (5)외국 사신, (6)영향 등의 소제목이 붙어 있는 6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

 

또한 “명성황후 능욕설” 및 명성황후의 최후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다.

 

“ 먼저 낭인들이 20명 정도 궁에 쳐들어와서 고종을 무릎 꿇게 만들고 이를 말리는 세자의 상투를 잡아 올려서 벽에다 던져 버리고 발로 짓밟았다.

그런데 명성황후를 발견하자 옆구리 두 쪽과 배에 칼을 꽂은 후 시녀들의 가슴을 다 도려내고 명성황후의 아랫도리를 벗겼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20명이 강간을 했다....

살아있을 때도 하고 한 6명 째에 죽어있었는데도 계속 했다..

 

시체에 하는것이 시간이고 살아있는 인간에 하는게 윤간인데 명성황후는 屍姦과 윤간을 다 당했다.

그리고 그것을 뜯어 말리는 충신의 사지를 다 잘라버렸다. (에조는 하지 않았다)

 

어떤 놈들이 한 나라의 황후를 그렇게 대하는가. 이 경우는 고대에도 근대에도 절대 찾아볼 수 없다.

그렇게 한 후 너덜너덜해진 명성황후의 시체에 얼굴부터 발끝까지 차례대로 한 명씩 칼로 쑤셨다.

죽은 후에도..(이건 에조도 함)

 

그리고 여자로써 가슴도 도려내는 큰 수치를 당했다.

그것을 길거리 서민들이 다 보고 있는데서 시행했다.

그 다음에 명성황후 시체에 기름 붓고 불로 활활 태웠다. ”

 

- 이시즈카 에조(石塚英藏) , 〈에조의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