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노스님의 법문을 듣고
어느 노스님(지금은 열반에 드신 아주 유명하신)의 법문을 책을 통해선가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어느 장군께서 6.25 사변 때 모 부대 연대장 근무시 부하장교를 즉결처분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당시 즉결처분으로 명령 불복종 자에 대한 총살권한이 부대장에게 있었는데 불성실한 장교를 직접 총살했다고 합니다.
그 후 이 장군에게 귀하디 귀한 외아들이 태어났고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 길렀던 외아들은 공부도 잘해 명문대 의대에 진학한 졸업반 시절 우연히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하게 되었다네요.
그 때 외아들을 잃은 장군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깊고 고통스러웠을 겁니다.
그 외아들의 49제를 지내는 마지막 날 법당에 아들영정 사진 앞에 서 있던 노장군은 분노에 찬 음성으로 네 이놈 하며 호통을 치다가 법당을 나가 버렸답니다.
놀랍게도 49제 마지막 날 법당의 아들영정 사진위에 환영이 나타났는데 그건 바로 25년 전 강원도 산골에서 직접 본인이 즉결처분해서 총살했던 부하장교의 얼굴이었다고 합니다.
장군께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부하장교를 총살한 그 시점에 얼마 후 외아들을 임신했었고 결국 그 총살당한 부하장교가 장군의 외아들로 환생해서 장군의 가슴에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떠나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당시 이 법문은 저에게 굉장한 충격으로 다가왔었습니다. 그 노스님은 바로 일타큰스님이셨습니다.
과연 이 법문대로 정말 그 아들은 총살당했던 그 부하장교의 환영이였을까요?
이게 과연 정말로 가능할까요?
왜 원한을 안고 죽어간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부자지간으로 태어날 수 있나요?
그리고 아들의 교통사고도 원한에 죽어간 부하장교가 아버지에게 행한 복수의 한 형태란 것인데 논리상 아버지에게 직접적인 고통을 가하는 형식의 인과응보가 아니고 오히려 아들의 죽음이 보다 1차적인 고통일 것이고 아버지는 간접적인 고통인데 인과응보가 이런 형식으로 작용한다는 것도 너무 우회적이고 기교적이지 않나요?
오히려 저는 아들의 49제 때 법당에서 본 부하장교의 환영은 이 노장군의 일생을 따라다닌 억울한 영혼이 나름 복수한 것으로 보는 게 더 정확한 것은 아닌지, 그 억울한 영혼의 한 풀이이거나 혹은 이 노장군의 그 총살형에 대한 본인의 오랜 세월 죄책감의 산물이거나 인과응보의 섭리로 보는게 정확하지 않을까요?
제가 좋아하는 이 법문을 항상 되새기며 저 자신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불교와 그 섭리에 대해 보다 겸손하게 살아야 함을 다짐하면서 여러분께 이 법문에 대한 나름의 깨달음을 구해 봅니다.
(펌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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