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상심(平常心)을 도라 부르지 마라?
중화(中華)에서 선지식(善知識) 한 분이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 이르니, 이 나라의 잘난 큰스님이란 분이 ‘평상심을 도라 부르지 마라!’ 일렀습니다.
함께 회색 옷 입은 것이 부끄럽고 누가 그 책 볼까 가슴 조마조마하던 젊은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조주가 남전 스승께 도(道)가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남전 화상(和尙)께서 이르시길,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조주가 다시 묻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거기에 도달 합니까?”
화상께서 이르시길
“도달하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달아난다.”
여기에서 위대한 화상은 의도와 노력의 차이를 가르쳐 주십니다.
조주가 다시 묻습니다.
“하겠다는 생각(의도)을 버리고 어찌 도를 알 수 있겠습니까?”
스승께서 말씀하시길,
“도라고 하는 것은 알고 모르는 것과는 상관없다.
안다는 것(知性)은 어리석은 생각에 지나지 않으며, 모른다는 것 또한 단순한 혼란일 뿐이다.
만약 네가 터럭만큼의 의문도 없이 도를 깨우쳐 안다면, 너의 눈은 드높은 하늘처럼 모든 한계와 장애물을 벗어 버리고 일체를 다 볼 수 있게 된다.”』
이 말 끝에 조주는 깨닫게 됩니다.
여기에서 위대한 스승은 의도라는 실패작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의도란 결코 그대를 지금 이 순간에 머물지 못하게 합니다.
그것은 그대를 끊임없는 원심력상태에 집어넣어 신(神)과 함께 무(無)를 정복하러 가자는 말과 같다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노력이란 지금 이 순간에 머무르려고 애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 머무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 때문인지 철저히 파헤쳐 나가면 그 의문의 끝이 바로 ‘지금 여기 (法門)’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붓다는 ‘지금 여기’라는 도(道)의 문 앞에 중생(衆生)을 끌고 오려고 온갖 어중이떠중이에게조차 그 많은 법문을 하시는 것이고, 서로간에 복이 많아 상근기(上根機)끼리 만나면 이렇게 간결하게 해결하는 법입니다.
새길만한 이야기를 하나 더 덧붙이자면,
『어느 날 조주가 스승에게 묻습니다.
“존재의 비밀(有)을 깨달은 사람은 어디로 가야 마땅한가요?”
스승은 망설이지 않고 말씀하신다.
“산에서 내려가 아랫마을 한 마리 소가 되어야 한다.”』
위로는 스승을 통하여 도를 구하고, 구하여 얻었으면 다음은 아래로 내려가 빚 갚으라고 스승은 엄하게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승(大乘)의 행적(行蹟)입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하고 떠드는 것은 눈 먼 봉사가 횃불을 들고 길을 인도하는 것이 되니, 옛 어른은 삼가라 가르치는데, 그 새를 못 참아서 밑으로 기어 나와 포교당이라는 미명아래 세속에 물든 요즘 날의 젊은 승려들은 새기어 볼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말 잘하는 사람이 셋 있으니,
하나가 정치인이요,
두 번째는 약장사고
세 번째가 사기꾼입니다.
그대는 어느 범주에 속하는지 견주어 보시기 바랍니다.
내친 김에 하나 더 풀어보겠습니다.
『이 말에 조주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스승에게 철저히 깨닫게 해주셔서 고맙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스승은 덧붙인다.
“어젯밤 삼경에 달이 창문으로 비치었도다.”』
이 글은 여러 책에서 인용하나 단 하나도 속뜻(密意)을 알지 못한 채 베끼어 적어 놓았기에 풀어드리는 것입니다.
지금 스승께서는 조주가 월광삼매에 드는 것을 아셨다는 이야기 입니다.
이 삼매에 들게 되면 오밤중에 자다가도 일어나게 되니, 자동으로 가부좌를 틀고 앉게 되며 한쪽 벽면이 누군가가 허물은 듯 무너져 사라져 버리고 그 사이로 보름달이 중천에 걸려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산승(山僧)이 제일 처음에 맛보았을 때는 달을 가리는 솜털구름(미세한번뇌)이 바람에 지나쳐 흐르더니, 여러 번 삼매에 들 때마다 조금씩 사라져서 나중에 삼매에서 깨어나 보면 삶에서도 번뇌가 줄어든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달을 선가(禪家)에서는 ‘심지월(心地月)’이라 부릅니다.
바로 두 번의 혁명이 일어나고 난 후에 여섯 번째 차크라가 앞뒤로 열리어 비밀의 방이 보이게 되면 이곳에서 반공(半空)에 달을 그려넣는 것입니다.
제자가 월광삼매에 드는 것을 스승은 지켜보며 때를 기다리니, 이 얼마나 멋들어진 인연(因緣)인가!
‘평상심(平常心)’이란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의 다른 이름으로 내 안의 본바탕은 전혀 흔들림 없고 때묻지 않아서 맑고 깨끗한 모습으로 치우침 없는 도타운 사랑과 거룩한 지혜인 빛으로 이루어 졌나니, 모든 것을 비추어 보이고 어루만지되, 관리자인 에고가 사라져 버린 고요함을 밑바탕으로 하는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말하는 것입니다.
중생(衆生)들이 평상시에 다짐하고 훈련되어진 그 마음(衆生心)을 ‘평상심(平常心)’이라 해석하는 그런 사람을 이 나라에서는 정말 큰스님이라 부릅니다.
- 전윤스님 법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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