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면

상처를 치료하는 밥상 - 광릉 한옥집

難勝 2011. 8. 31. 13:26

 

 

 

 

상처와 상실의 시대에 위로가 되는 밥상

 

경기도 남양주시 '광릉한옥집'

조상님이 물려주신 최고의 맛, 탕국!

 

요즘 우리 집안 제사 풍습도 많이 변했다. 참석범위도 예전보다 훨씬 줄었고 모시는 시각도 0시가 아닌 저녁시간대로 옮겼으며, 절차도 그전에 비해 간소화되었다. 그래도 조상님에 대한 추모의 정과 함께 제삿밥 맛은 여전히 변함없다. 제수 준비하고 제관들이 모두 도착하기를 기다리다 보면 예정한 시각을 훨씬 넘겨 제사를 모시기 십상이다. 제사가 늦어지면 때가 겨워 시장기가 동한 상태에서 식사를 하기 때문에 밥맛이 꿀맛이다. 그러나 제삿밥 맛이 좋은 이유는 시장기만이 아니다. 제사 음식만큼은 들어가는 재료를 엄선한 다음 양념도 아끼지 않고 넣는데다가 정성을 다 하니 맛이 좋을 수밖에 없다.

 

그중에서 예나 지금이나 우리 식구들이 가장 맛있게 먹는 음식이 적(炙)으로 올렸던 쇠고기 육적과 탕국이다. 제사상에서 탕은 육탕 어탕과 함께 소탕(素湯)을 포함, 원래 삼탕으로 진설했다. 하지만 요즘에는 시제를 모실 때만 삼탕을 쓰고 일반 기제사에서는 제수 마련이 번거로운 탓에 두부에 다시마를 얹은 소탕 한 가지만 올려 단탕으로 쓰고 있다. 무를 썰어 넣은 국물에 조선간장으로 간을 맞추고, 이 소탕에 들어가는 두부와 다시마, 북어포 다듬을 때 나온 껍질과 대가리, 작게 자른 북어와 쇠고기를 넣고 오래 끓인 것이 바로 탕국이다.

 

주부들이 제수 준비를 할 때 제일 먼저 탕국 솥에 불을 댕기고 다른 음식을 준비한다. 처음에는 센 불로 끓이다가 우르르 다 끓어오르면 약한 불로 줄여서 제사가 끝나고 식사를 하기 직전까지 뭉근하게 계속 끓인다. 제사상에도 탕국을 올렸다가 도중에 숙랭(숭늉)과 교체를 하지만 식구들이 먹을 탕국은 제사를 진행하는 동안에도 계속 끓인다. 탕국은 오래 끓일수록 그 맛이 깊고 진하다. 무, 간장, 쇠고기, 북어, 다시마, 두부가 어울린 맛에다가 조상님이 감응하여 내려주신 맛이기에 더 자별하다. 그 시원하고 개운하면서 끝을 알 수 없는 감칠맛은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탕국 닮은 경기 북부식 장국 맛

 

안동에 가면 '헛제삿밥'이라는 음식이 있다. 특별한 날만 먹었던 제사 음식을 일상화 상품화 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음식이다. 나물로 비벼먹는 비빔밥 개념의 메뉴라는 점이 다소 아쉽다. 만일 내가 '헛제삿밥'이라는 메뉴를 개발했다면 단연코 탕국 위주의 밥상으로 꾸몄을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남양주시 '광릉한옥집'에서 탕국과 닮은 장국이 들어간 밥상을 발견하였다. 물론 한정식집이어서 제사 음식을 주제로 한 밥상은 아니었지만 함께 나온 장국은 제삿날 탕국에서 맛볼 수 있는 감동을 주었다. 혼례나 제례처럼 의례에 사용하는 음식은 보수적이어서 시간이 지나도 만드는 방법이나 맛이 다른 음식에 비해 크게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한 지역의 의례 음식은 그 지역의 음식 특성과 맛을 함축하는 경우가 많다. 이 집의 장국은 경기 북부지방에서 즐겨 먹었던 장국 맛의 특성이 농후하다.

 

이 집 장국은 멸치장국과 쇠고기장국을 각각 따로 국물을 낸 뒤, 이 둘을 합쳐 장국을 완성한다는 점이 특이하다. 멸치장국은 먼저 다시마를 넣고 끓인 뒤 멸치 + 무 + 파, 통마늘, 통후추, 양파를 삼베 망에 넣고 1시간을 더 끓인 후에 소금과 국간장으로 간을 맞춘다. 쇠고기장국은 양지를 다시마, 무, 파 등과 함께 끓인 뒤 역시 소금과 국간장으로 간을 맞춘다. 이렇게 낸 국물을 하나로 합치고 고명으로 쇠고기 편육, 삶은 다시마, 계란 황백지단과 두부를 넣어 모양을 낸다.

 

이 멸치장국은 70년대까지만 해도 경기도 북부지방에서 혼례를 치를 때 국수를 말아먹기 위해 만들었던 바로 그 육수와 만드는 방법이 비슷하다. 지금처럼 예식장이 보편화되기 이전 시절에는 집에서 잔치를 했다. 잔치기간 동안 혼주의 이웃들은 모두 집을 비우고 잔칫집에 부엌과 방을 빌려주었다. 대개 국수 끓이는 일은 동네 청년이나 아주머니들 몫이었다. 보통 이웃의 두세 집 부엌을 빌려 여기서 이들이 육수를 내고 국수를 삶아 손님들 상으로 날랐다.

 

소고기장국 역시 경기도 북부지방에서 제사용 탕국이나 일반적 고기국물을 내는 방법과 유사하다. 이 집은 조선시대 국수용 장국으로 많이 썼던 소고기장국과 요즘 국수용 장국으로 주로 쓰는 멸치장국을 모두 써서 두 맛의 장점을 극대화하려고 하였다. 또 차후에 고객이 원하면 이 국물을 기본 베이스로 국밥과 국수를 언제라도 병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실속 있는 상차림에 가격 저렴

 

보약처럼 정성을 들여 끓여낸 장국 말고도 이 집 정식은 1인분에 1만2000원이라는 가격에 비해 차림새가 아주 실속 있다. 주문을 하면 일차로 요리가 나오고 요리 음식을 먹고 나면 이어서 식사가 나온다. 먼저 나오는 한식 요리로는 잡채, 탕평채, 가오리회무침, 물김치, 불고기냉채, 삼색전, 오이고추김치가 있다. 모두 이 집 주인장인 최입분(76) 할머니의 손맛이 들어간 음식들이다. 담백한 탕평채와 불고기냉채가 특히 입맛을 끈다. 인정 많은 최 할머니는 젊어서부터 음식 솜씨가 뛰어나 동네에 잔칫집이 생기면 제일 먼저 불려가곤 했었다고.

 

요리를 먹고 나면 밥과 장국을 비롯한 반찬들이 나온다. 직접 돼지고기와 채소로 다져 만든 수제 떡갈비, 쫄깃한 새송이버섯 장조림, 먹을수록 당기는 황태찜에 손이 많이 간다. 그렇지만 취장아찌, 깻잎장아찌, 고추장아찌, 시래기나물, 취나물, 부지깽이나물, 토란대 등의 장아찌와 나물류에서 최 할머니의 섬세한 손맛과 체취를 느낄 수 있다. 이 장아찌와 나물은 어려웠던 시절 앞 세대 어머니들이 무시로 집안 식구를 위해 밥상에 올렸던 반찬이자 지금은 웰빙식품으로 각광받는 음식이다.

 

한정식 하면 불합리하게 차린 과장된 밥상과 부담스러운 가격이 떠오른다. 이 집은 가격을 저렴하게 책정하고 먹지도 않을 것이면서 가짓수만 늘려놓는 반찬이나 요리를 과감히 상에서 들어냈다. 주인과 손님 서로 간의 불편한 거품을 말끔히 없애 실속파 주부들이나 가족단위 손님들에게 인기를 얻을 것 같다. 휴일이나 한적한 시간에 광릉수목원으로 가족끼리 나들이 왔다가 이 집에 들러 오붓하게 식사하면 좋을 듯하다. 단, 매주 월요일은 쉰다고 한다.

 

 

잘 살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버린 것은 아닐까

 

잔칫날 이웃집 부엌에서 국수를 삶던 동네 총각들과 국물을 만들던 아주머니들의 흥에 겨운 분위기와 푸짐한 입담이 기자의 기억에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불과 몇 십 년 전 풍경이다. 그러나 서울의 확장과 수도권의 도시화로 경기 북부 지역의 마을공동체들이 무너지면서 이런 모습은 하나 둘 사라졌다. 아울러 이런 흥취와 신바람도, 구수한 장국 맛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함께 울고 웃어주던 이웃은 없어지고 파편화된 개인들만 남았다. 동네사람들의 신명이 떠나고 왁자한 흥겨움이 빠져나간 공간에 고층아파트들만 멀대처럼 서 있다. 진정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미국에 이민 가서 사는 절친한 친구가 가끔씩 귀국하면 아이들이 우리말을 잊을까봐 늘 걱정한다. 그럴 때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자네가 이다음에 죽으면 아이들이 축문과 지방도 영문으로 쓰는 것 아니냐’며 놀리고는 하였다. 그러나 정작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들도 우리 전통문화가 시나브로 사라져가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제례와 제삿밥은 비록 중국에서 들어온 유교문화의 산물이라고는 하지만 수백 년간 우리에게 체화된 우리 문화임이 분명하다. 전통문화는 한 번 버리기는 쉽지만 다시 복원하기는 쉽지 않다. 경기도 남양주에서 발견한 시원한 장국 맛과 정갈한 밥상에서 기자의 고향인 경기 북부지역의 사라진 풍습과 문화를 머릿속에 되살릴 수 있었다. 사라져간 것들에 대한 아픔과 아쉬움을 위로해주는 밥상이었고, '음식이란 문화'라는 말이 실감나는 경험이었다. 과연 먼 훗날 내 자손들이 탕국 맛의 깊이를 알기는 할까?

 

031-574-6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