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면

'춘자싸롱' 멸치국수와 제주 올레길 먹거리 맛집

難勝 2011. 8. 18. 19:01

 

 

 

제주도 서귀포 표선면 '춘자싸롱' 멸치국수

 

노랑 냄비에 담겨나오는 2500원 춘자 멸치국수

구수하면서 비린내 없어

6000원 각재기국 내는 돌하르방식당 78세 주인 "밥 더 먹으라" 채근

순박한 인심으로 버무린 싸고 맛있는 음식은 제주도의 보석

 

제주도에 태풍 오던 날 서귀포 동쪽 표선 해안 도로를 드라이브했다.

벼르다 온 제주도인데 방안에 묶여 있기가 억울했다. 남원 신흥리에서 표선 해비치 해변까지 가는 해안 길 내내 집채만 한 파도가 밀어닥쳤다.

 

광포하게 들끓는 바다에 겁이 나면서도 가슴이 다 후련하다.

광풍노도를 눈에, 카메라에 담다 보니 몸은 눅눅하고 속은 헛헛하다.

이럴 때 딱 좋은 곳이 있다.

 

면 소재지 표선리, 코끼리마트 맞은편 국숫집으로 갔다.

간판도 없이 유리문에 '춘자 멸치국수'라고 쓰여 있다. 작은 홀엔 긴 나무탁자 둘이 전부다. 낮 두 시가 지났는데도 여행자들이 자리를 채우고서 호로록호로록 국수를 먹는다. 차림으로 보아 올레꾼인 것 같다.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제주도 올레길을 걷는 사람들이다.

 

홀에 붙은 단칸방은 미닫이문을 열어놓아 세간이 고스란히 들여다보인다. 작고 낡은 TV, 선풍기, 냉장고, 전기밥솥, 그리고 돗자리 하나가 깔려 있다. 혼자 사는 예순일곱 강춘자 할머니의 정갈하고 야무진 살림 솜씨가 엿보인다. 손맛은 더 짭짤하다.

 

손잡이 달린 노랑 알루미늄 냄비 가득 국수가 나왔다.

잘게 썬 파, 깨와 고춧가루가 고명으로 얹혔다.

국물이 얼마나 진한지는 코끝에 와 닿는 멸치 향이 먼저 알린다.

한 모금 뜨니 "카" 소리가 절로 난다.

 

깊고 얼큰하면서 비린내가 없다. 이름난 육지 멸치를 들여다 쓴다고 한다. 면발은 중간 굵기 중면이다. 20~30분에 한 번씩 삶아뒀다 말아내기 때문에 조금 불어 있는 게 아쉽다. 제주도에 오면 항상 김치 맛이 불만스러운데 이 집 깍두기는 사근사근 시원한 게 제맛이다.

 

작고 볼품없는 가게일망정 국수 냄비엔 맛을 제대로 내겠다는 춘자 할머니의 진심이 한가득 담겼다. 욕심은 한 톨도 안 보인다. 마음까지 따끈하게 덥혀주는 한 냄비가 2500원. 30년 전 가게를 열었을 때 700원으로 시작해 1988년 1500원, 2002년 2000원, 그리고 작년 초 2500원으로 올렸다.

 

처음 가게는 면사무소 건너편 골목 안에 있었다.

가게 이름도 없이 작은 블록집에서 국수를 팔았다.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해장거리로 그만"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춘자싸롱'이라는 다소 야한 이름을 얻었다. 재작년 가게를 길가로 옮겨 나온 뒤로도 해장 손님이 많아 아침 일곱 시 반에 문을 연다.

 

춘자싸롱은 외지 사람에게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소설가 성석제는 음식 에세이집 '소풍'에 '제주도에서 춘자싸롱 국시말고는 국시로 안 본다'고 썼다. 이젠 올레꾼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됐다. 인터넷 검색에도 '춘자싸롱'으로 치면 지도가 뜬다.

 

 

제주시 일도2동 주택가 골목길, 식탁 여섯 놓인 돌하르방식당도 아침 열 시부터 빈자리 찾기가 어렵다. 문을 닫는 오후 세 시까지 각재기국과 멜국을 맛보려고 사람들이 줄을 선다. 각재기는 전갱이를, 멜은 멸치를 가리킨다. 등 푸른 생선 전갱이를 국으로 끓이면 비린내가 심할 것 같지만 아니다.

 

실한 전갱이 한 마리가 들어간 각재기국은 뜻밖에 담백하고 개운하다. 배추에서 우러난 단맛과 구수한 된장이 어우러진 덕분이다. 멜국은 더 고소하다. 이 드문 맛이 한 뚝배기에 6000원이다. 얼마 전 1000원이 오른 값이다.

 

주인장 강영채 할아버지는 올해 일흔여덟이다. 빨간 티셔츠에 야구 모자를 쓰고서 내내 유쾌하게 주방 일을 도맡는다. 손님이 사진을 찍을라치면 잠시 조리 기구를 놓고 하트 사인을 그려 보인다.

 

이따금씩 찌렁찌렁한 목소리로 "밥 더 먹으라"고 채근한다.

그는 "쓸 만큼만 벌겠다"며 세 시에 문 닫고 일요일·공휴일마다 쉰다.

 

 

제주 사람들이 많이 찾는 연동 앞뱅디식당도 맛 깊은 각재기국과 멜국을 차린다.

앞뱅디는 '마을 앞 넓고 평평한 땅'을 이른다.

 

 

서귀포 천지동 용이식당은 독특한 돼지고기 두루치기로 유명하다.

불판에 돼지고기를 익히다 푸짐한 파채와 콩나물을 부어 뒤적여 먹는다. 최근에 6000원으로 올랐지만 여전히 헐한 별미다.

 

 

토평동 동성식당 두루치기 맛도 좋다.

 

 

표선 광동식당은 돼지고기를 양푼째 갖다 주고 양껏 먹으라고 한다.

 

 

대정읍 모슬포항의 40년 된 산방식당은 밀냉면이 시원하다.

5000원 하는 푸짐한 밀면 한 그릇에 8000원짜리 돼지 편육 시켜 소주 한잔 곁들이면 부러울 것이 없다.

 

 

제주시 애월읍 '숙이네 보리빵'은 한 개 400~600원 하는 보리빵과 쑥보리빵을 판다.

거친 듯 친근한 옛맛을 못 잊어 여행자들이 줄을 선다.

 

 

올레길이 나면서 많은 사람이 걷기 위해 제주도를 찾아든다.

그래도 관광 수입엔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볼멘소리가 제주도에 없지 않았다.

올레꾼들이 싸게 자고 싸게 먹고 가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제주도가 지닌 매력이다.

 

사람들이 주머니 사정 따라, 취향 따라 다양한 볼거리와 먹을거리를 즐길 수 있다면 제주도는 더욱 풍요로운 관광지가 될 것이다. 화려하진 않아도 싸고 맛있는 음식을 인심좋게 차려내는 음식점들은 제주도가 지닌 또 다른 보석이다.

 

[오태진의 길 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