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에 깃들인 역사와 미학
1. 탑-사리신앙의 원류
탑은 집이다. 부처님의 몸이 모셔져 있는 집이다. 탑 속에 사리가 있으면 부처님의 유골이 담긴 집이요, 경전을 모셔 놓으면 부처님의 영원한 몸[法身]이 모셔진 집인 것이다.
탑(塔)이란 본래 탑파(塔婆), 즉 스투파(범어;St pa) 또는 투파(팔리어;Th pa)의 음사(音寫)에서 유래한 약칭이다. 탑은 사리(舍利, ar ra)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발생한 불교의 독특한 조형물이다. 석가모니의 열반 후 불교도들은 인도의 장례법에 따라 화장(火葬)함으로써 그 유골인 사리를 얻게 되었고, 이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서 구조물을 쌓은 것이 바로 탑이다.
그런데 탑은 사리의 봉안 유무에 따라 탑파(塔婆) 이외에 지제(支提, Chaitya)라 불리기도 한다. 사리를 봉안한 탑을 '스투파'라 함에 대해서 지제(支提)는 사리가 없는 탑을 가리킨다. 따라서 '스투파'는 부처님의 신골(身骨)을 봉안하는 묘소(墓所)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 비하여, '차이티야'는 신령스런 장소나 고적을 나타내는 기념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리의 있고 없음을 구별하기란 사실상 매우 곤란한 문제이며, 따라서 이러한 정의는 하나의 해석에 불과할 뿐, 오늘날의 불교국에서는 탑과 지제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석가의 사리는 양적으로 제한된 것이므로 차츰 사리신앙에도 변화가 생기게 되었는데, 이는 불신관(佛身觀)의 변화와도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석가의 몸에서 출현한 진신사리(眞身舍利) 뿐만 아니라 불경인 법신사리(法身舍利)를 봉안한 모든 탑에 있어서도 단순한 탑이란 용어로 통용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불사리를 봉안한 탑과 함께 불교의 모든 기념물적인 성격을 지닌 '차이티야'까지를 포함한 넓은 의미로서 '탑'이라 말하게 된다.
물론 불교 최초의 탑은 석가모니의 불사리를 봉안한 것인데, 보통 근본8탑 또는 근본10탑이라 부른다. 석가모니가 열반하자 소식을 접한 주변의 7나라에서는 각각 '사리를 받아 큰 탑을 세우겠다'고 하면서 석가모니의 장례를 치른 말라족에게 사리를 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말라족이 거부하자 마가다국의 왕인 아자타삿투와 바이샬리의 릿차비족들은 무력으로라도 사리를 입수하겠다고 선전포고를 하였다. 사리의 분배를 둘러싼 전투가 일어나기 직전, '드로오나'라는 바라문이 중재에 나섰고, 마침내 사리를 8몫(마가다국의 아자타삿투, 바이샬리의 릿차비족, 카필라성의 석가족, 알라캅파의 부리족, 라마그라마의 콜랴족, 베티두비파의 바라문, 파바의 말라족, 쿠쉬나가라의 말라족)으로 나누어서 원만하게 분배하였다. 그들은 각기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탑을 세웠는데 이를 '근본8탑'이라 한다. 그리고 배분을 중재했던 드로오나는 사리가 들어 있던 병을 받아 병탑(甁塔)을 세웠고, 뒤늦게 당도한 핍팔리바나의 모랴족은 남은 재를 가지고 가서 회탑(灰塔)을 세웠다. 따라서 이를 모두 합하여 '근본 10탑'이라 부르는 것이다.
2. 불탑 건립의 목적
불탑 건립의 목적은 앞에서 지적한대로 사리신앙에 있다. 그래서 탑은 불상과 더불어 불교의 예배대상으로 널리 추앙되었다. 즉 불사리를 지닌 불탑과 부처님의 품격을 형상화한 불상이 가람의 중심에 위치함으로써 이른바 당탑가람(堂塔伽藍)을 형성하였다.
다음으로 지적할 것은 불탑 건립이 호국·호법과 같은 시대적 상황 그리고 종교적 동기와 연관을 맺으며 전개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목적은 곧 불탑건립의 외형적 동기를 부여해준다. 예를 들어 황룡사 9층목탑의 경우 삼국통일의 염원을 담아 건립되었다는 사실이 주목되며, 신라의 감은사의 창건 또한 왜병을 진압하고 국가를 보호하려는 호국적 발원에서 출발되었으며, 이곳에 건립된 3층석탑은 삼국통일의 기념비적인 쌍탑장엄을 이룩하였던 점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불탑의 건립은 신라 말기부터 일기 시작한 도참사상과도 더욱 밀접한 연관을 지니면서 지세나 형국에 따라 산천을 보호하려는 성격 아래 수많은 불탑이 건립되었다는 사실도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이 점은 특히 불탑 건립의 한국적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3. 탑의 기본형식과 종류
1) 인도
불교 전성기의 인도탑은 현재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완전에 가까운 것은 기원전 3-1세기에 세워진 중인도의 산치대탑이 남아 있는 정도이다. 이 탑의 구조를 보면 밑에서부터 기대(基臺)·복발(覆鉢)·평두(平頭)·산개(傘蓋)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기대(基臺)는 귀중한 것을 높은 대(臺) 위에 모셔서 경의를 나타낸다는 의미를 지닌 것이다. 복발(覆鉢)은 반구형(半球形)의 봉분이다. 마치 엎어놓은 발우(鉢盂)모양과 같다고 하여 복발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탑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부분이다. 그야말로 '스투파'에 담긴 뜻처럼, 흙을 쌓아 올린 분묘형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평두(平頭)는 네모진 상자의 모양으로 복발 위에 놓여지며, 신성한 곳을 둘러싸는 울타리라고도 한다. 그리고 이 평두의 한가운데는 높이 솟은 간(竿, 장대)이 있고 그 위에 산개(傘蓋)가 있다. 산개는 우산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서 생겨난 이름이다. 인도나 중국에서의 햇빛을 가린다는 실용적인 의미와 함께 고귀한 신분을 상징하는 것으로 산개를 널리 사용하였다.
이러한 인도의 탑 양식은 우리나라 석탑의 상륜부에 남아 있다. 곧 상륜부의 노반(露盤) 상부는 인도탑 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최상층 옥개 상부에는 인도탑의 기단 형식에 해당되는 노반을 설치하고 그 상부에 복발을 놓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인도탑의 탑신 형식인 것이다. 다시 그 상부에는 앙화(仰花)나 보륜(寶輪)과 같은 장엄구가 설치되지만 이는 인도탑의 형식이 우리 나라의 탑의 상륜부로서 대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2) 중국
중국에서 탑이 건립되는 것은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파되어 불탑이 세워진 것과는 그 사정이 다르다. 중국에서는 옛부터 궁전건축을 중심과제로 하여 건축기술이 매우 발달했기 때문에 그 양식이 거의 완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중국에서는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에 이미 도교를 믿는 집단적 조직과 신선사상(神仙思想)이 고취되어 있었고, 이와 결부된 고층의 누각(樓閣)건축을 세우는 기술도 개발되어 있었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처음부터 인도탑과는 다른 모습의 독창적인 탑이 건립되었다. 중국인들은 인도탑을 상륜부로 삼고 그 아래 쪽으로 그들 나름대로의 고층 누각(樓閣) 형태인 기단부(基壇部)와 탑신부(塔身部)를 만들어서 탑의 중국적 변신을 이루어 놓았던 것이다.
탑이 문자로써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후한(後漢) 시대부터라고 하지만, 조각품이나 실례(實例)로서 그 형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북위(北魏)의 탑이 가장 오래다. 운강 석굴에 새겨진 단층(單層)의 탑신에는 인도탑 모양의 지붕을 얹은 형식이 있는가 하면 여러 층을 겹친 층탑(層塔) 형식의 조각 등을 볼 수 있다. 따라서 탑의 대부분은 목조(木造)였으리라고 추측된다. 실제로 남북조시대(386-589) 초기부터는 실제로 많은 목탑이 건립되었으며, 수나라 때까지는 목탑중심이었다. 따라서 중국은 초기에는 인도탑과는 다른 목탑을 먼저 건립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당나라(618-907) 때부터는 전탑(塼塔)이 점차 많이 건립되었다. 전탑이란 벽돌을 구워서 쌓아 올린 탑이다. 현존하는 중국의 가장 오래된 전탑으로는 북위(北魏) 정광4년(523년)에 건립된 신통사(神通寺) 사문탑(四門塔) 등이 전하며, 당나라 대의 대표적 전탑으로는 현장법사가 세운 자은사(慈恩寺) 대안탑(大雁塔)을 들 수 있다. 이 절과 탑은 648년에 건립되었으며, 대안탑은 4각 7층탑이다. 당나라 이후의 오대(五代)·송대(宋代)·요(遼)·금(金) 시대에도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전탑이 건립되었고, 원대(元代)부터는 목탑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와 같이 중국에서는 후대로 내려오면서 전탑 일색이 되었다.
3) 한국
① 목탑(木塔)
초기의 중국 목탑 양식은 우리 나라에 그대로 전래되어 삼국에서도 고루형(高樓形)의 목탑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물론 삼국시대의 목탑은 현재 하나도 남아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이미 광개토대왕 때 요동성 가까이에 7층의 목탑이 세워졌다고 한다. 이 기록에 따르면 적어도 4c말에는 우리 나라에 목탑이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발굴조사에 따르면, 고구려의 경우 목탑자리는 모두 사찰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에 자리잡고 있었고, 기단은 8각형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아 고구려의 목탑은 다층다각의 매우 큰 건물이었으며, 탑이 법당보다 더 중요한 위치에 있는 가람 배치를 이루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백제의 경우에는 부여와 익산 등지의 목탑자리에서 그 원형을 추리해 볼 수 있는데, 고구려의 목탑과는 달리 정사각형이 평면으로 되어 있었고, 위치도 중문(中門)·목탑·법당·강당을 일직선으로 연결하는 자리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 3국 가운데 건축기술이 가장 앞섰던 백제의 목탑이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목탑을 변환시켜 만든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과 부여 정림사지 석탑이 남아 있어 백제 목탑의 아름다움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미륵사지 석탑은 목조건축의 결구수법(結構手法, 얽어 짜서 조형물을 만드는 방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으며, 정림사지 석탑(국보 19호)은 좁고 낮은 단층 기단과 각층의 우주(隅柱)에 보이는 '엔타시스 양식'(기둥의 아래는 굵고 위로 올라갈수록 가늘어지는 수법), 얇고 넓은 각층의 옥개석 형태, 낙수면 4귀퉁이에 우동 마루형은 이 탑이 목탑에서 발전된 석탑이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신라의 대표적인 목탑은 황룡사 9층 목탑이다. 이 탑은 우리 나라 목탑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치면서 신라인의 정신적 조형물이 되었으나, 1238년 몽고의 침략으로 소실되었다. 탑 높이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225자를 환산하여 74.22m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왕건이 신라의 황룡사 9층을 본받아 개경에 7층목탑, 서경에 9층 목탑을 세워 후삼국 통일의 염원을 기원하게 된다.
조선시대에서도 태조가 신덕왕후 강씨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흥천사를 창건하고 1398년 5층 목탑을 세웠다고 한다. 현재 임진왜란 이전에 건립한 목탑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지만, 1605년 사명대사가 재건한 법주사의 팔상전(높이 22.7m)만이 유일하게 남아 과거 우리 나라 목탑의 윤곽을 짐작하게 하고 있다. 특히 팔상전의 구조를 통해 우리는 수행과 예배의 장소로 이용되었던 목탑의 참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밀폐되어 내부가 통해있지 않는 석탑이나 전탑과는 달리, 목탑 속에서는 예배를 비롯한 각종 의식이 이루어질 수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탑 바깥쪽을 돌면서 행하는 탑돌이 의식도 이 팔상전 안에서는 이루어질 수가 있었다.
② 전탑(塼塔)
우리 나라는 중국과는 달리 건물을 벽돌로 짓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더구나 지질구조상 우리 나라는 화강암 등의 석재가 풍부하고, 흙 또한 뻘보다는 모래 성분이 많다. 뻘 등을 이용하여 벽돌을 만든 다음 다시 그것으로 탑을 쌓는다는 것은 매우 비생산적인 노역이다. 따라서 우리 나라에서는 전탑이 크게 유행하지 못한 채 경상도 일부지역(안동 일대)에서만 전탑이 건립되었던 것이다. 현존하는 전탑은 안동 신세동 7층탑, 안동 조탑동 5층탑, 안동 동부동 5층탑, 송림사 5층탑, 신륵사 다층전탑 등 모두 5기뿐이다. 이들을 통하여 신라시대 전탑의 특징을 간추려 보면,
ⅰ. 기단부가 단층으로서 화강암으로 되어 있고
ⅱ. 지붕[屋蓋] 추녀가 매우 짧고 가파르며
ⅲ. 지붕의 상하에 매우 많은 층단을 마련하였고
ⅳ. 탑신의 초층에는 인왕상 등이 지키는 감실(龕室)을 설치하였다는 점 등이다.
전탑(塼塔)과 석탑(石塔)의 중간형태(또는 모전석탑과 전탑의 중간형태) 즉 모전석탑(模塼石塔, 전탑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석재로 만든 탑)의 전형인 분황사탑도 화강암의 기단부 위에 안산암이라는 회백색 석재를 벽돌 모양으로 잘라서 쌓은 탑이다. 탑의 기단부 사방에는 석사자(石獅子)가 지키고 있으며, 1층의 사방에는 각각 문이 있고 문의 좌우에는 금강역사가 지키고 있다. 이와 같은 구조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현존하는 신라 전탑의 특징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③ 석탑(石塔)
우리 나라의 불탑은 7c초에 이르러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미륵사지 석탑은 이를 대표하는 석탑이다.
전탑 이후의 신라 불탑은 그 양식을 그대로 추종하면서도 이를 변용 하여 더욱 간결하고 장중하게 처리하여 새로운 조화미를 성공적으로 구가하게 된다. 이른바 신라 석탑의 탄생이다. 그 대표적 예가 고선사지 3층석탑을 비롯하여 감은사지 동·서 3층석탑이다. 이들은 모두 신라 7c중엽에 건립된 석탑으로서 그 장중하고 웅장한 남성적 기백은 바로 신라 국력의 외형적 표출이라 할 것이다.
특히 감은사지 3층석탑은 신라 삼국통일의 기념비적 대탑으로서 신라 전형석탑(典型石塔)의 양식을 완성하였으며, 그 형태는 방형을 기본으로 하여 2중기단 위에 중층(中層)의 옥개석을 형성한 특수한 신라석탑의 형식적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
이후의 신라석탑은 감은사와 고선사의 석탑을 본받으면서도 차츰 그 규모가 축소되고 간략해지고 있다. 이와 같은 형식을 추종한 석탑은 이후 전국적으로 유행되었으며, 그 대표적 양식을 완성한 것은 역시 8c 중엽에 이룩된 불국사의 석가탑이다. 이 석탑은 상하좌우 어디에서나 잘 조화된 하나의 군형미를 형성하고 있고, 그 세련된 선과 형에서 한민족의 심성을 대변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찾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석가탑의 양식을 모범으로 하여 이후 신라의 석탑은 장소를 달리하면서 더욱 활발하게 건립되어 갔을 것이다.
그런데 서탑 석가탑과 마주하고 있는 동탑 다보탑은 그 건축방식을 전혀 달리하고 있다. 각부의 양식은 더욱 화려·섬세하고, 보다 치밀한 세부의 결구수법(結構手法)을 지니고 있고, 온갖 기교와 장엄을 더하고 있어서 도저히 돌로 다듬은 것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석조 건축의 최고봉을 이루어 놓고 있다. 따라서 이 탑은 석가탑이 신라의 전형석탑(典刑石塔)이라 함에 대하여 그 놀라운 양식적 특수성 때문에 이형석탑(異型石塔)이라 불린다. 이와 같은 이형석탑(異型石塔)의 대표적 예로는 다보탑과 함께 구례 화엄사의 사사자석탑(四獅子石塔), 월성 정혜사지 13층석탑 등을 들 수 있다.
신라의 석탑은 8c중엽을 지나 9c로 접어들면서 도읍인 경주를 떠나 점차 지방으로 확산된다. 선불교(禪佛敎)의 전래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흥 보림사 쌍탑과 영주 부석사 3층석탑, 합천 청량사 3층석탑, 산청 단속사지 동서 3층석탑 등은 이 시기의 대표적인 석탑이다. 이들 석탑은 상층기단의 탱주가 1주(이전에는 상층기단 탱주 2, 하층기단 탱주 3)로 변화되어 있다. 다만 옥개석의 받침은 이전처럼 5단을 유지하고 있다.
그 뒤 9c말로 내려오면서 석탑의 규모는 더욱 작아지고 약화된다. 남원 실상사 동서 3층석탑과 대구 동화사 금당암 3층석탑 등이 이 시기의 것인데, 하층기단과 하층기단의 탱주가 모두 1주로 되어 있고, 옥개석의 받침도 4단 또는 3단으로 줄어들었다. 또한 신라말기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변형은 2층의 기단부가 단층으로 변화하는 경우인데, 문경 내화리 3층석탑과 봉암사 3층석탑에서 이와 같은 변화를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양식은 고려시대로 이어진다.
고려시대 석탑의 분포는 개경·평양·경상도·충청전라 등의 4지역을 중심으로 나누어진다. 우선 백제의 옛 땅인 충청도 지방에는 백제 때 건립된 익산 미륵사지 석탑이나 정림사지 석탑과 매우 유사한 목탑계 석탑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부여 무량사 5층석탑, 부여 장하리 3층석탑 등 옛 백제의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석탑이 8기가 있다. 평양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땅에는 8각 또는 6각으로 된 다층석탑이 많이 건립되었다. 이들 석탑은 현존하지 않지만 1938년 발굴조사에서 8각목탑지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다음으로 경상도 지역에서는 신라 계통의 석탑이 계승되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개경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는 어느 하나만을 고집하지 않고 두루 포용한 석탑을 건립하였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선종(禪宗)의 발달로 조사(祖師) 숭배의 풍조가 유행되어 석탑보다 부도나 석비의 제작에 더욱 힘쓰게 되었다.
한편 원나라의 지배로 인해 1348년 원나라 탑의 양식을 따른 경천사 10층석탑(국보 86호)이 원나라 공장(工匠)에 의해 건립되었다. 이 탑의 각층 각면에는 온갖 상이 빈틈없이 조각되어 있다. 특히 단조로운 형식으로 구성된 상륜부는 우리 탑의 상륜부와는 완전히 다른 라마교적 수법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후 조선시대의 탑까지도 거의 대부분 라마교식 상륜부를 취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의 탑은 반도의 동서에서 전탑과 목탑의 양식을 기초로 하여 7세기에 이르러 석탑의 신기원을 이룩하였다. 다른 불교국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조화와 통일을 구축한 석탑이야말로 오로지 믿음과 정성의 결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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