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미단
부처님 모시는 불단 … 수미산 상징
사진설명: 영천 은해사 백흥암 극락전 수미단. 문양의 다양성과 조각 솜씨에서 우리나라 사찰의 수미단을 대표한다. 3단으로 구분된 구획 안에 연꽃, 모란 등의 식물과 봉황, 학, 상상의 동물들을 정교하고 섬세한 조각솜씨로 새겨 놓았다.
법당 안에 부처님을 높이 모시기 위해 만든 단(壇)을 불단, 또는 수미단(須彌壇)이라고 한다. 불단을 수미단이라고 하는 것은 수미산을 상징하는 정입방체 또는 장방형이 불단의 전형적인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수미단은 3단 형식으로 만들어지며, 그 위에 다시 1~2단의 수미좌를 만들어 불상을 봉안한다. 수미단은 부처님 상을 직접 모시는 장소인 만큼 정성을 다해 꾸미는데, 수미단을 장식하고 있는 각양각색의 문양들은 단순한 치장에 머물러 있지 않고 환상적인 수미산의 모습을 법당 내에 구현하고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를 선과 미로써 장엄하는 데 봉사하고 있다.
수미단의 원형인 수미산은 불교의 세계관 속에 존재하는 상상의 산이다. 불교의 세계관에 의하면 무한 허공중에 풍륜(風輪)이 떠 있다. 그 모양은 원반형이고, 크기는 둘레가 무수(無數), 두께가 160만 유순(由旬)이다. 풍륜 위에 수륜(水輪)이 떠 있는데, 그것은 두터운 원반 모양을 하고 있으며, 크기는 직경이 120만 3450유순, 두께가 80만 유순이다. 수륜 위에 금륜이 있고, 금륜 위 표면에는 산, 바다, 섬 따위가 실려 있는데, 그 중심에 솟아 있는 산이 수미산이다. 물에 잠긴 부분이 8만 유순, 물위에 나와 있는 부분이 8만 유순이라 한다. 수미산은 네 가지 보배, 즉 금.은.유리.파리로 되어 있으며, 어느 변도 다같이 8만 유순인 정입방체로 되어 있다. 그 정입방체의 측면 사방에 사천왕과 그의 권속들이 살고 있다.
또한 수미산 꼭대기에는 제석천왕이 사는 선견궁(善見宮)이 있는데, 그 궁성 안에는 훌륭한 전각과 잘 꾸민 동산이 있고, 백 천 만억의 천동(天童)과 천녀(天女)가 살고 있다. 부드러운 보배 땅에는 하늘 꽃이 널리어 있고, 가지가지 의복 나무에서는 좋은 의복이 나오고, 꽃나무에는 아름다운 꽃이 피고, 보배 나무에서는 귀중한 보배가 나오고, 장엄 나무에서는 여러 가지 장식품이 나오고, 음악 나무에서는 아름다운 가락이 흐르며, 수없는 하늘 사람들이 그 가운데서 노래하고 춤을 추는데, 이곳에 왕생한 사람도 그들과 함께 하늘 옷을 입고 오락가락하면서 쾌락을 받고 있다.(〈대방광불화엄경〉 40권본 제2권 참조)
현존하는 우리나라 불상의 대좌 중에서 정방을 기본 구조로 한 수미좌를 채용한 예를 찾아 볼 수 있는데, 청양 장곡사의 장곡사철조여래좌상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수미좌는 복련이 새겨진 저석(밑받침 돌)과 앙련이 새겨진 갑석(덮개 돌), 그리고 정방형의 중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정방형 형태의 대좌 위에 봉안된 불상은 수미산정에 올라 설법하는 부처님을 상징한다. 불탑에도 수미산과 선경궁 이미지가 적용되어 있다. 불탑은 기본적으로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의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탑의 기초가 되는 정방형의 기단부가 수미산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 위의 목조건물 형태로 된 탑신부는 수미산의 선견궁을 상징한다. 이러한 상징체계는 목재로 만든 법당 안의 불단에도 적용되어 있다.
현존하는 수미단 유적 중에 작품성이 높은 것으로 영천 은해사 백흥암 극락전 수미단, 양산 통도사 대웅전 수미단, 강화 전등사 대웅전 수미단, 동래 범어사 대웅전 수미단 등을 들 수 있다. 백흥암 극락전 수미단은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현존하는 수미단 중에서 문양의 다양성과 조형미, 조각기법 등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불단은 5단인 것처럼 보이지만 아래쪽과 위쪽 부분은 탑의 저석과 갑석 같은 것이므로 3단 형식이라고 봐야 옳다.
금산 청곡사 대웅전 수미단은 동자가 연꽃 줄기를 잡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풍경화가 아니라 정형화 된 일종의 문양이다.
불단 기저에는 귀면과 용을 조각하였고, 맨 위에는 안상(眼象)을 조각하였다. 1~3단에 걸쳐 전면과 좌우 각 측면에 각양각색의 문양들이 가득 차있는데, 쌍을 이룬 물고기를 제외한 대부분은 상상을 초월하는 신비로운 동물이다.
연꽃 봉오리를 손에 들고 있는 인두조신(人頭鳥身)의 가릉빈가, 당초를 입에 문 귀면, 모란꽃 사이를 나는 봉황, 박쥐 날개를 단 비룡(飛龍), 인두어신(人頭魚身)의 물고기, 자라껍질을 등에 진 괴인(怪人)의 형상, 천마 등 모두가 초현실적이고 신비로운 동물들이다.
불경이나 불전설화의 내용을 보면 부처님의 지혜와 복덕, 신통과 위신력에 의해 나타나는 상서의 징조를 천인 또는 신비로운 동식물의 출현에 비유해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백흥암 수미단의 가릉빈가, 사람머리 물고기, 날개 달린 용, 천인, 봉황 등 초현실적인 물상들은 그러한 관념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중기에 제작된 범어사 대웅전 수미단은 문양 종류와 다양성의 측면에서는 백흥암 수미단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조각 솜씨나 장식 효과면에서는 결코 뒤지지 않는다. 인두어신의 물고기, 여의주를 물고 있는 봉황, 산예 등 상상의 동물과 함께 선계(仙界)의 상징인 학, 초화문(草花文) 등을 장식하였는데, 별도의 판자에 부조와 투각 기법을 동시에 사용해 문양을 새긴 후 미리 구획해 놓은 곳에 부착하는 방법을 취했다. 색은 흰색, 녹색, 빨강, 청색, 검정 색 등의 오방색을 기본색으로 사용하였다. 인물과 귀면은 정면관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용을 비롯한 동물들은 측면관으로 묘사되어 있다.
강화 전등사 대웅전 수미단은 별도의 판자에 투각기법으로 문양을 새긴 후 미리 구획해 놓은 곳에 붙이는 수법을 사용하였다.
수미단에 보이는 정교하고 섬세한 조각 솜씨가 그 위에 걸린 닫집에도 나타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수미단을 비롯한 불단 장엄구 제작 솜씨와 조각 기술 수준이 매우 높았음을 말해 준다. 범어사 수미단과 비슷한 내용의 장식문양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통도사 대웅전 수미단이 있다. 이 불단의 특징은 다른 절의 것과 달리 수계식에 3사(師)와 7증(證)이 단에 오를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는 점이다.
표충사 대광전 수미단의 경우는 위에서 살펴 본 것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연꽃, 모란꽃과 함께 비천, 흰 코끼리, 물고기, 새우 등을 그린 그림이 수미단 전면에 가득한데, 토끼가 자라 등에 올라 앉아 바다를 건너 어디론가 가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도 끼어있어 민화의 세계를 보는 듯하다. 코끼리는 보현보살의 탈것임과 동시에 길상의 의미를 가진 것이고, 새우는 등이 굽은 모양이 노인을 닮았다고 해서 해노(海老)라고도 하는데, 이 말을 ‘해로(偕老)’로 재해석하여 부부가 오랫동안 함께 사는 것에 자주 비유되었다.
우리는 때로 금산 청곡사 대웅전 수미단에서처럼 동자가 연잎 줄기를 잡고 놀고 있는 모습을 만나 볼 수 있다. 이런 형식의 문양은 청곡사 외에도 파계사 원통전 등 많은 사찰의 수미단에서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우리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동자가 연잎 줄기를 잡고 있는 모습이 하나의 패턴으로 정형화되어 여러 곳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런 형식의 문양을 동자집연경문(童子執蓮莖紋)이라고 하는데, 이와 유사한 형식의 문양을 인도 아잔타석굴에서볼 수 있다. 인도 신화에 의하면 비슈누가 여러 가지 동물과 식물의 모습으로 화현(化現)하기도 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나무 밑에 졸고 있는 신동(神童)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서 생각해 보면 동자집연경문의 동자는 신성(神性)의 또 다른 화현으로 볼 수 있으며, ‘손에 쥔 연꽃’ 은 현실적으로 불.보살의 모습이 나타나 있지 않더라도 불.보살의 현존을 의미하는 징표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수미단에는 물새를 그린 문양이 자주 등장한다. 왜 그럴까? 물새는 생활방식에 있어서 이중적 성질을 지니고 있다. 수면에서 헤엄을 치지만 물에 속박되어 있지 않다. 물을 벗어나면 새는 창공을 날아오르는데, 하늘은 아래에 있는 땅 못지않게 그에겐 편안한 곳이다. 물새는 위에 있는 천상과 아래 땅의 영역 어느 쪽에서나 구속받지 않고 산다. 물새가 지닌 있는 이와 같은 상징성은 무애(無碍) 또는 해탈과 상통한다. 이런 이유에서 불단 장식 문양으로 물새를 자주 그리는 것이다.
수미단에는 환상적이고 초월적인 수미산 세계가 표현돼 있고, 부처님의 지혜와 복덕, 신통과 위신력에 의해 나타나는 상서로운 현상들이 묘사돼 있다. 또한 불성의 화현(化現), 여기에 더하여 부처님에 대한 한없는 환희심과 외경심이 다양한 형태의 문양들에 의해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사찰 장엄이란 원래 외적인 꾸밈이나 단순한 장식의 의미보다는 지혜와 복덕을 닦아서 그 몸을 꾸미려는 지혜 장엄이나 복덕 장엄의 뜻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내적인 측면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수미단의 화려한 문양들은 결국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지혜와 복덕 장엄으로 승화된 의미 상징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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