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짚신 죽는다!" 전국서 고무신 불매 운동
위 사진은 "고무신이 강철보다 견고하다"는 과장섞인 광고(왼쪽,조선일보 1924년11월4일자)와 고무신 대신 짚신을 신자는 캠페인성 기사.(1931년3월9일자)
한때 대한민국 신발 시장의 85%를 차지했다는 '국민 신발' 고무신의 역사는 1916년쯤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본지의 고무신 관련 기사에서 생산·소비 통계가 잡힌 첫해가 1916년이기 때문이다.(1931년 3월 9일자) 짚신을 신던 서민들에게 질기고 물이 안 새는 고무신은 경이적인 물건이었고, 최대 히트 상품이 됐다. 1916년은 고무신 생산·수입액이 당시 화폐단위로 1만2149원이어서 짚신 생산액(565만8957원)의 500분의 1밖에 안 됐으나, 1930년이 되자 고무신 생산액이 1685만6447원으로 늘어나 짚신 생산액(260만7505원)의 7배나 됐다. 당시 인구가 약 1600만명이니 50전(약 1만원)짜리 고무신을 한 사람이 한 해 평균 2켤레씩 신었던 셈이었다.(1931년 3월 9일자)
그러자 농한기에 짚신을 만들어 팔던 농민들 한숨은 깊어갔다. 결국 고무신 불매 운동이 벌어진다. 함남 신흥군 원평면의 전동(典洞) 농민청년회는 농촌 생활 개신(改新)을 위한 대회에서 '고무화 침입 방지'를 결의했다.(1929년 9월 7일자)여러 보통학교 생도와 그 부형들이 "조선 사람 손으로 맨드러진 신(草鞋·초혜)을 벗고 이 고모신을 신는" 것은 "민족의 경제적 파멸 과정을 조장하고 잇는 것"이라며 고무신 배척에 나섰고(1931년 3월 9일자) 경기도 양주군 농민 150여명(1932년 6월 16일자)과 강원도 양구군 내 공립보통학교 생도가 고무신 신지 않기를 결의했다.(1932년 12월 13일자)
하지만 "얼마 안 가서 고무구쓰는 없어질 것"(1921년 8월 28일자)이라는 희망 섞인 예상은 빗나갔다. 1933년엔 이 땅의 고무신 공장 수는 70곳이 넘어섰다. 고무신 공장 여성 노동자가 많아지자 '고무공장 큰아기'라는 유행가까지 나왔다.
업체들 광고전은 1920년대부터 치열했다.
"강철은 부서질지언정 별표고무는 찢어지지 아니한다'는 과장 섞인 카피의 광고가 나오자, 또 다른 업체도 "지구표 고무신은 강철보다 견고함"이라고 맞받았다.(1924년 11월 4일자)
짚신 시장을 뺏은 것에 대한 거부감을 의식했는지 고무신 회사들은 "국산 고무신을 구입해 주면 그것도 자작자급(自作自給)"이라는 논리를 폈다. 1923년 9월 14일자의 고무신 광고는 "한 가지 두 가지씩이라도 우리 손으로 맨든 것을 장녀하야 줍시다"라며 국산 고무신을 신어 달라고 호소했다. 심지어 "이강(李堈) 전하가 손수 고르셔 신고 계시는" 신발이라며, 반일 의식이 남다른 것으로 전해진 순종의 동생 의친왕(義親王) 이강까지 고무신 광고에 끌어들였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전쟁 물자난으로 고무가 귀해지자 총독부는 고무신 제조를 금지키로 했다.(1938년 9월 2일자) 흰 버선과 함께 "조선 여성의 특유한 발맵시를 나타내는" 상징물이던 흰 고무신이 품절되자 개성(開城)의 여인들은 "금족령이나 당한 듯 문밖 출입을 자유로 못하는 형편"이 되기도 했다.(1939년 6월 6일자)
[조선일보에 비친 ‘모던 조선’][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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