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원주 통신 - 갈팡질팡 하다가 내 그럴 줄 알았지

難勝 2011. 10. 27. 06:07

 

 

 

책 '원주 통신'

 

서로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공간… 작가들 제2의 고향

 

원주는 박경리의 도시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가 모차르트의 도시이고, 도시 전체가 모차르트의 오페라와 교향곡으로 가득 차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원주는 ‘토지’의 도시이다. 잘츠부르크 이곳저곳에는 ‘피가로의 결혼’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17세기 풍 흰색 가발을 쓴 남자들이 모차르트 오페라 팸플릿을 나눠주며 호기심 가득한 관광객들을 호객한다. 좋든 싫든 모차르트의 유령은 300여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그림자를 어깨에 걸치고 생업을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고흐의 해바라기, 괴테의 베르테르,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은 암스테르담과 프랑크푸르트, 코펜하겐을 우리 앞으로 새롭게 호출한다. 원주도 마찬가지여서 그곳에는 ‘박경리 문학공원’이나 ‘토지문화관’ 같은 선생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다. 통영이 고향인 작가가 삶의 뿌리를 내린 곳이 이곳이므로 이곳은 그녀에게 제2의 고향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토지’의 직접적인 흔적보다 개인적으로 더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 건 이기호의 단편 ‘원주통신’이었다.

 

단편은 마치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은 것처럼 일인칭 시점으로 시작된다. 원주 단구동이 고향인 주인공은 박경리 선생과 50m 떨어진 거리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선생과 만나서 직접 얘길 해본 적은 없었지만 그가 '박경리의 외손자'라는 소문은 그의 초등학교에 소문처럼 퍼지게 됐고, 덩달아 우쭐대며 그는 유명인사가 된다. 그러던 그가 작가의 꿈을 안고 신춘문예에 도전하지만 연거푸 떨어지고 낙향한다. 그때, 고향 친구에게서 받은 한 통의 전화가 그를 '이상한 토지의 나라'로 안내한다.

 

용구는 상에 붙어 있는 호출벨을 눌렀다. 그리고 동시에 방문을 향해 소리쳤다. "길상아!" 용구는 분명, 길상이, 라고 했다. 그러자 좀 전, 나를 안내했던 와이셔츠 청년이 쟁반 두 개를 겹쳐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우리 집 3번 웨이터 길상이. 왜 이상해?" 용구는 큰 소리로 내게 되물었다. "아니, 그냥 좀…." 그냥 좀, 그래서 안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길상이는 좀……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야, 뭐 우리집에 길상이만 있는 줄 아냐?"용구는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호출벨을 두 번 연속 눌렀다. 그러자 채 일 분도 지나지 않아 한 여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서희라고 합니다."

 

그를 박경리 선생의 외손자로 잘못 알고 있던 초등학교 동창이 원주에서 가게 하나를 개업한다. 일명 룸살롱 토지. 한 주먹 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그 친구는 시에서 상호명이 허가 나지 않자, 박경리의 외손자로 소문났던 그에게 진창 술을 먹여놓고 술값 대신 상호명 허락을 받아오면 용서해주겠다고 위협한다. 친구의 협박에 박경리 선생의 생가 앞까지 '걸어서' 간 그는 친구가 뇌물용이라며 건네준 양주 한 병을 홀짝대며 마시기 시작한다. 그는 박경리 선생에게 찾아가 과연 '토지'라는 이름의 룸살롱 이름을 허가받을 수 있을까?

 

고백하면, 어린 시절 나는 시인 서정주 선생이 살았던 예술인 마을에 살았었다. 정육점 이름마저 예술정육점인 그곳에서, 엄마는 때때로 연습장 앞장에 적혀 있는 '국화 옆에서'를 읽어주기도 했었다. 그때의 나는 시에 대해 쥐뿔 알지 못하면서도 엄마가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라는 시 구절을 읽으면 그렇게 슬플 수가 없었다. 하늘은 그냥 하늘이 아니었고, 새는 그냥 새가 아니었다. 새가 있어 비로소 하늘의 높이를 가늠할 수 있고, 새가 울어야 기어이 봄이 온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실제 고향이 있고, 마음의 고향이 있다. 원주는 작가들에게는 제2의 고향 비슷한 곳이다. 작가들의 집필실이 있는 토지문화관 텃밭에선 박경리 선생이 고추나 가지를 따거나, 풀 매는 살아생전 모습은 작가들에게 깊은 위로를 주었었다. 이곳에서 나는 글쓰기 비법에 대한 얘기도 곧잘 들었는데 장석주 시인에게선 '새벽 3시에 일어나 9시까지 작업'하는 그만의 '글쓰기에 최적화된 몸만들기'에 대한 얘기 들었고, 소설가 김언수에게는 새벽 4시까지 '소설공학'에 대한 얘길 듣기도 했었다. 그렇게 작가들은 원주라는 조금 특별한 공간을 나누며 서로의 외로움을 달랬다.

 

'원주통신'은 이기호 특유의 문체 때문에 깔깔대며 읽게 되지만 실은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다. 외로움이 만들어낸 '나는 박경리의 외손자'라는 거짓말이 어떻게 작가의 삶에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고찰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에는 원주에서 가장 유명하기도 한 '매지리 막국수'나 '영화은마차'같은 식당을 찾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소설을 읽고 원주의 단구동을 걷다가 문득 허리가 굽은 한 백발노인이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한국사를 관통하는 수백 명의 사람이 나오는 어마어마하게 긴 소설을 썼다는 사실에 위로받을 게 분명하다.

 

●원주통신: 이기호의 단편집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에 실린 단편으로 작가의 실제 고향인 원주를 배경으로 한 자전적 형태의 소설이다.

 

원주의 소설가 백영옥님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