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해설사 자료실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보물78호) - 강원도의 문화재

難勝 2011. 11. 17. 21:47

 

 

 

 

요약설명

고려시대의 탑비로 고승인 원공국사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현종 16년인 1025년에 세웠으며 비문에는 그의 생애와 행적, 그의 덕을 기리는 송덕문이 담겨있다.

비문은 해동공자로 불리던 대학자 최충이 짓고 글씨는 당대의 명필 김거웅이 썼다. 괴수의 얼굴을 한 거북받침돌(귀부) 위에 몸돌(탑신)과 머릿돌(이수)을 세운 것으로 몸돌에 비해 머릿돌은 약간 큰 편이다. 거북의 등과 머릿돌에 새긴 조각이 섬세하고 화려하여 고려 초 조각예술의 수준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소의 혼신이 옮긴 머릿돌과 받침대”

석공은 원공국사승묘탑비의 비와 좌대를 먼저 완성한 후 머릿돌(이수)과 받침대(귀부)를 만들기 위해 어렵사리 질 좋은 화강암을 구하고 혼신의 힘을 기울여 작품을 만들었다. 그러나 완성된 조각은 석공의 마음에 차지 못했다. 석공은 조각을 새로 만들기로 결심하고 석재를 다시 구해 기도를 올린 후 새로운 작품 만들기에 돌입했다. 몇 날 며칠이 지났을까? 밤낮의 구분도 없이 일한 후에 석공이 완성한 것은 원공국사의 법력이 모자람 없이 표현된 훌륭한 작품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먼저 만든 조각도 소중하다고 여겨 마을 한 켠에 잘 모셨는데, 정작 새로 만든 조각은 마을의 장정 10여 명이 힘을 합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때 낯 모를 승려가 찾아와 자기가 조각을 옮겨주겠다고 하더니, 마을에서 가장 큰 황소를 키우는 집에 가서 황소를 빌려 달라고 말했다. 황소 주인은 소에게 여물을 먹여놓고 승려가 나타나 소를 끌고 가길 기다렸으나 해질녘이 되어서야 나타난 승려는 소를 잘 썼다며 감사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소의 몸은 그대로 두고 혼신의 힘만 빌려다 썼다는 승려의 말에 소를 살펴보던 주인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소가 기진맥진해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황소 주인이 거돈사로 가보니 역시 머릿돌과 받침대가 합쳐져 조화로운 탑비가 완성되어 있었다. 탑비에 전해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상세설명

거돈사터에서 동쪽으로 약 110m 떨어진 곳에 세워져 있는 탑비로, 고려시대의 유명한 스님인 원공국사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원공국사(930∼1018)의 법명은 지종(智宗)이고, 세속에서 쓰던 성은 이씨인데, 비문에는 그의 생애와 행적, 그의 덕을 기리는 송덕문이 담겨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비몸이 작고 머릿돌이 큰 것이 특징적이다. 거북의 머리는 괴수 모양의 험한 인상을 한 용의 머리모양이다. 등에 새긴 무늬는 정육각형에 가까우며, 육각형안에는 卍모양과 연꽃무늬를 돋을새김하였다. 머릿돌에는 구름속을 요동치는 용이 불꽃에 쌓인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데, 매우 사실적이고 화려하다. 고려 현종 16년(1025)에 세운 것으로, 당시 ‘해동공자’로 불리던 대학자 최충이 글을 짓고, 김거웅이 글씨를 썼다. 비문에 새긴 글씨는 해서체인데, 중국 구양순의 서법을 이어받은 것이다. 이는 고려시대의 여러 비에 새긴 글 중에서도 매우 뛰어난 것으로 중국에 비교해서도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한편 이 비에는 머릿돌을 옮기려 할 때 수십 명의 장정들이 매달려도 끄떡않던 돌을 농가에서 빌려온 소 한 마리가 옮겼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