尋劍堂

목불(木佛)을 태우다 - 단하소불(丹霞燒佛)

難勝 2011. 11. 23. 05:08

 

 

 

 

불상을 불태운 단하천연(丹霞天然) (736∼824)

 

단하천연(丹霞天然. 736∼824) 스님의 속성과 출생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스님은 처음에 유학(儒學)을 공부하였다. 그러던 중 공부가 거의 익었다고 생각이 되어 과거를 보러 서울로 올라가는 도중에 주막에서 한 선승을 만나서 담화를 나누게 된다.

 

그 스님은 단하천연 스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스님에게 “수재(秀才)는 어디로 가는가?” 하고 물었다.

스님이 대답했다. “제가 공부를 많이 해서 과거를 보러 서울로 갑니다.”

그러자 그 스님이 말했다 “세속의 명예를 얻어서 무엇을 하겠느냐? 그것보다는 공문(空門)에 급제를 해야 제대로 급제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그 스님의 말을 괴이하게 여기고 되물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러자 그 스님이 다시 말했다.

“공문(空門)의 급제라는 것이 바로 불문(佛門)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빌 공(空), 문 문(門), 공문에 급제를 해야 제대로 급제하는 것인데 그것은 자성불(自性佛)을 깨쳐서 스스로 도인이 되는 것이다.”

 

이 말을 듣자. 스님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스님! 공문에 급제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러자 그 스님이 말했다. “마조(馬祖) 스님께 가서 공부를 하라.”

이 말을 들은 스님은 느낀 바 있어 가던 길을 접고 그 자리에서 마조스님을 찾아가서 제자가 된다.

 

하루는 스님이 마조선사를 참례하러 갔다.

그런데 절을 하기도 전에 바로 큰방으로 들어가서 나한상의 목을 말타듯 타고 앉았다. 그러자 대중들이 경악하여 급히 마조스님께 아뢰었다. 마조스님은 그 말을 듣고 큰방으로 들어가 그를 살펴보고는 말하였다. “내 자식아, 천연(天然)스럽구나.” 스님은 이 말을 듣자 마자 즉시 나한상에서 내려와 절하면서 말하였다. “이름을 지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하여서 이후로 스님은 ‘천연(天然)’이라는 법호(法號)로 불리게 되었다.

 

스님은 설파한다.

“여러분은 온 힘을 다해서 반드시 몸을 보호해야 한다. 이 일령지물(一靈之物)은 네가 조작해서 얻은 모양과 이름이 아니다. 이 일은 담화(談話)를 해봐서 얻는 것도 아니며, 네가 본래 한 자리를 갖추어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다시 어떤 선(禪)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요즈음의 학인들이 분분히 떠들면서 참선을 말하고 또 묻지만, 나는 ‘도(道)는 가히 닦을 것도 없으며, 법(法)은 가히 증(證)할 것도 없다’고 말할 뿐이다.”

 

어느 해 겨울 유력(遊歷) 도중에 스님은 혜림사(慧林寺)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런데 스님이 너무 늦게 그 절에 도착하여서 그 절의 지객(知客) 스님이 공양도 주지 않고 방에 불도 때어주지 않았다. 춥고 배고파서 잠이 오지 않게 된 스님은 참다못하여 법당에서 목불(木佛)을 내려다 쪼개서 불을 피웠다.

 

이것을 본 절에서 난리가 났다.

그 절의 모든 스님들이 들고 일어나서 꾸짖자 스님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소승은 이 절의 부처님이 법력이 대단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리를 얻어볼까 하고 다비식을 거행했습니다.”

 

그러자 그 절의 주지(住持)가 스님에게 쏘아 붙였다.

“나무 불상에서 무슨 사리가 나오겠습니까?”

그러자 스님은 일갈(一喝)했다.

“사리도 나오지 않는 부처라면 불이나 피워 언 몸을 녹이는 게 마땅합니다.”

 

혜림사에서 스님의 행위는 오늘날까지 ‘단하소불(丹霞燒佛)’ 이라는 유명한 화두로 남아 많은 선승들이 상량(商量)하고 참구(參究)한다.

단하는 목불을 태우는 행위를 통해 중생과 부처가 같다는 평등사상을 실천해 보이면서 외재적인 권위로 군림해 있는 부처를 일상에서 보는 평상인으로 대체시켰다.

 

이는 혜능스님의 ‘귀의자심불(歸依自心佛)’, 마조스님의 ‘내 마음이 부처’, ‘평상심’의 사상을 이어받았으면서, 임제스님의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사상을 보다 직접적, 급진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스님은 ‘석가모니의 절대적인 권위’와 ‘불교 경전의 신성한 지위’를 부정한다는 방편(用)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선불교의 궁극적 목적(體)인 인간(人間)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목불은 불을 이기지 못하고,

니불은 물을 이기지 못하고,

철불은 노(爐)를 이기지 못하니,

도대체 부처는 어디에 있는 것이냐?

 

동쪽 창에 붉은 해가 두둥실 떠오르니,

금일은 필시 좋은 날이구나.

어허라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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