尋劍堂

비보사찰(裨補寺刹)

難勝 2011. 11. 21. 23:47

 

명산이나 풍경이 좋은 곳에 가면 어김없이 절이 있다.

이는 풍수지리설의 비보사찰(裨補寺刹) 개념 때문이다.

비보사찰(裨補寺刹)이란 땅기운이 너무 왕성해

그대로 두면 커다란 다툼이 일어날 수 있는 곳에

미리 절을 지어 땅기운을 다스린다는 개념, 혹은 그 지은 절(사찰)을 일컫는 말이다.


 

비보사찰(裨補寺刹)

 

비보사탑사상(裨補寺塔思想)에 의해 건립된 사찰.

 

비보사탑사상은 신라말·고려초의 승려 도선(道詵)에 의해 체계화되었다.

이 비보사탑사상은 밀교(密敎)의 택지법(擇地法)과 음양오행설에 근거한 풍수지리사상이 결합된 것이다.

 

도선의 비보사상이 최초로 적용된 사례는 고려 태조 왕건의 탄생을 도운 택지(宅地) 선정과 제택건립(第宅建立)이었다.

도선은 왕건의 부친이 송악(松嶽)에서 집을 지을 때 곡령(鵠嶺)에 올라가 산수의 맥을 살핀 다음 그 맥에 따라 집을 지으면 성자(聖子)가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그에 따라 왕건이 태어났고, 도선은 왕건이 17세 되던 해에 다시 나타나 왕건의 창업을 예언하고 출사치진(出師置陣)의 법과 천시지리(天時地理)의 이치를 일러주었다고 한다. 이에 왕건은 도선을 국사(國師)로 삼고 통일을 이룩했다.

 

한편 도선은 밀교의 택지법이나 풍수도참설에 의거하여 전국 산천의 역처(逆處)나 배처(背處)에 사찰을 건립하여 지기(地氣)를 보완해야 한다고 했다.

 

왕건은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여러 사원은 모두 도선이 산수(山水)의 순역(順逆)을 추점(推占)해서 창건한 것이다. 도선이 이르기를 '내가 점쳐서 정한 것 이외에 마구 새로 지으면 지덕(地德)을 손모(損耗)해서 국조(國祚)가 영속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했다"라고 언급하기까지 했다.

 

〈도선밀기 道詵密記〉에서 지정된 비보소(裨補所)는 3,800개소에 달한다.

비보사탑설을 태조가 신봉하자 이후 고려의 전 시기에 걸쳐 이 설은 크게 성행했고, 이에 따라 건립된 비보사찰은 국가에서 토지를 분급(分給)받을 정도로 신봉되었다. 그러나 비보사탑설의 지나친 유행과 국가의 혜택은 모든 사원의 비보사찰화를 빚으며 국가적인 폐해를 낳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고려말 신흥사대부들의 세찬 비난의 대상이 되면서 고려의 패망을 낳는 요인이 되었다.

 

비보사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풍수지리설에 입각하여 세운 절을 말합니다.

 

후 삼국말, 고려초의 풍수지리의 대가인 도선대사가 주장한 것으로,

지세, 산수, 강등을 종합해서 풍수지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쇠처(衰處)나 역처(逆處)는 불행을 가져다주므로 사람의 몸에 쑥을 놓고 뜸을 뜨듯이 비보사찰(裨補寺刹)을 세워 재앙을 막아야 한다는 이유로 요소에 세운 절입니다.

 

고려초에 비보사찰로 지정된 사찰은 전국적으로 대략 3,000에 달하였습니다.

왕건의 훈요십조에도 이런 비보사찰의 관리에 대한 언급이 존재합니다.

 

안동의 법흥사, 법림사, 임하사 등과 남원의 선원사, 대복사, 순천의 향림사, 도선암, 화순의 운주사와 삼암사(광양 운암사·승주 선암사·진주 용암사) 등은 대표적인 고을의 비보사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보사찰이 만들어진 것은 풍수지리적인 이유도 있고, 종교적인 이유도 있으며,국방과도 같은 현실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그렇게 노력해온 선조들과 선지식 스님들에 의해 오천년 역사를 유지해 내려오던중 조선조에 이르러 정치적인 이유로 불교에 대한 종교 탄압이 가해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우리 민족에게 중요한 정치.군사 .경제 역사 모든 것에 불교가 들어있으나 현재 우리 국민은 대부분 이것을 남의나라 이야기처럼 무관심하게 되었습니다.

 

서양 문물이 유입되며 각종 종교가 물밀듯 들어와 헌법으로 보장된 종교의 자유를 틈타 불교와 유교정신이 자리잡은 우리나라 국민정서를 흐리고 역사가 왜곡되는 시대가 된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