尋劍堂

칠불통계게(七佛通戒偈)의 음미

難勝 2012. 3. 20. 05:54

 

 

 

諸惡莫作 衆善奉行 제악막작 중선봉행

自淨其意 是諸佛敎 자정기의 시제불교

 

모든 나쁜 짓을 하지 말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며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하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칠불통계게(七佛通戒偈)의 음미

“과거칠불 공통적 가르침은 ‘청정행’강조”

불교란 무엇인가? 이 물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불교인들이 물어왔고, 또한 부처님과 부처님의 직제자를 비롯한 수많은 불교인들이 이 물음에 응답해 왔다. 팔만대장경은 물론 지금도 수없이 출간되어 나오고 있는 불교서적은 이 영원한 물음에 대한 응답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 대한 정의는 이처럼 다양하고 복잡하며, 그런 만큼 어렵다. 하지만 우리들에게 불교를 참으로 쉽고 간략하게 정의해 주고 있는 게송이 있으니, 바로 ‘칠불통계게’이다.

경전에 의하면 석가모니 부처님 외에도 과거에 이미 여섯 분의 부처님이 계셨음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부처님은 비바시불, 두 번째 부처님은 시기불, 세 번째 부처님은 비사부불, 네 번째 부처님은 구류손불, 다섯 번째 부처님은 구나함모니불, 여섯 번째 부처님은 가섭불이다. 그리고 석가모니불은 일곱 번째 부처님이시다. 이 일곱 부처님을 총칭하여 흔히 ‘과거칠불’이라고 한다. 따라서 ‘칠불통계게’란 이러한 과거 일곱 부처님이 한 분도 빠짐없이 공통으로 금계(禁戒)의 근본으로 삼는 게송이라는 뜻이다.

물론 모든 부처님이 출현했던 초기에는 제자들의 마음이 청정하여, 세세한 계율을 제정할 필요가 없었고 다만 한 게송으로써 모든 경우의 계율을 회통했기 때문에 통계(通戒 또는 略戒)라고 했다는 설명도 있다. 어쨌든 칠불통계게는 과거칠불의 공통적인 가르침으로서, 시대와 지역을 초월한, 불교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정의라고 할 수 있다.

칠불통계게는 문헌에 따라 약간씩 표현의 차이는 있지만 내용은 동일하다. 우리나라에서 는 흔히 “모든 악은 저지르지 말고, 모든 선은 받들어 행하며, 스스로 그 마음을 청정하게 하라. 이것이 곧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라는 게송이 통용된다. 이 게송의 내용은 얼핏 보면 지극히 평범한 가르침인 것 같지만, 자세히 음미해 보면 불교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악을 경계하고 선을 권장하는 것이야 일반적인 도덕이나 다른 종교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뭐 그리 특별할 게 있느냐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그 마음을 청정하게 하라(自淨其意)’는 구절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거기에는 불교의 미묘한 사상적 입장이 깃들어 있고, 선악에 대한 불교의 독특한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

불교는 현실적 질서와 윤리를 중시하면서도 생로병사, 즉 죽음의 실존적 한계상황으로부터 우리들 중생을 해탈시켜 구제하는 것을 그 궁극적 목표로 삼고 있다. 동시에 불교는 그 어떠한 절대자나 초월자 그리고 그의 전지전능한 권능에 의한 구제를 인정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사물과 존재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諸法實相)을 지혜의 빛에 의해 깨달음으로써 구제를 성취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범부 중생들은 무명(無明)과 탐욕, 또는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에 의해 마음의 호수가 항상 흔들리고 혼탁해져 제법(諸法)의 실상을 바르게 볼 수가 없다. 하지만 호수가 고요하고 깨끗해졌을 때, 그 호수에는 호숫가의 꽃이나 나무, 두둥실 떠가는 하늘의 흰구름까지도 그대로 비치듯, 마음이 고요해지고 청정해졌을 때 일체만유의 참모습 또는 우주와 인생의 참다운 진리가 그대로 드러나 깨달음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 그 마음을 청정하게 하라’는 가르침 속에는 이러한 불교적 메시지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불교적 원리에 입각해서 선악의 문제를 바라본다면 어떨까. 일반 윤리에서의 선이 인간의 번뇌와 미혹을 전제로 하고 있는 반면, 불교적 선은 인간의 번뇌와 미혹을 배제하며 마음의 정화(淨化)를 요구한다. 번뇌와 미혹이 없는 청정한 마음만이 비로소 우주적 진리와 궁극적 실재를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불교에서의 선은 우주적 진리를 전제로 하는 선인 것이다. 〈대승의장(大乘義章)〉에서 “진리에 따르는 것을 선이라 하고, 진리에 어긋나는 것을 악이라 한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우주적 진리와 궁극적 실재는 아집과 아견(我見)을 추호도 용납하지 않는다. 마음의 정화를 이루어 끝없이 열려있는 사람만이 진리에 수순할 수 있고, 그래야만 진정한 선을 행할 수 있다. 불교윤리의 본질적 근거는 결국 진리에 수순하는 맑고 깨끗한 마음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칠불통계게의 내용 속에는 불교의 중도(中道) 이념이 내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중도실상의 세계는 생사와 열반, 세간과 출세간이 둘이 아니고(不二) 원융무애한 세계이다. ‘제악막작 중선봉행(諸惡莫作 衆善奉行)’의 가르침은 생사와 세간의 윤리적 질서를 강조하고, ‘자정기의(自淨其意)’는 열반과 출세간의 원리를 역설하고 있다. 우리는 한편으로 선인선과 악인악과의 인과의 세계에 두 발을 딛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不昧因果).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사를 벗어나 열반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인과의 세계, 선악의 세계에 침몰해서도 안 된다(不落因果). 칠불통계게에는 이처럼 생사와 열반을 아우르는 중도의 미묘한 이치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박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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