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15 행복원주 법웅사
도심속의 숨은 안식처 법웅사
어떠한 경우라도 항시 사랑하고 존중하며
어른을 공경하고 진실한 남편과 아내로서 도리를 다 할 것을 맹세합니까?
<혼인서약서>
양인은 일가친척과 친지를 모신 자리에서
일생동안 고락을 함께할 부부가 되기를 굳게 맹세하였습니다.
이에 주례는 이 혼인이 원만하게 이루어진 것을 여러분 앞에 엄숙하게 선언합니다.
<성혼선언문>
행복원주에 기고를 시작한 이래, 해마다 연초에는 띠에 맞춘 스토리를 소개했는데 원주는 쥐와 관계있는 곳이 없다. 어쩔 수 없이 쥐 그림이라도 있는 곳을 생각해보니 학성동의 옛 1군사령부 軍법당인 법웅사가 있다. 군 조직 통.폐합에 따라 4성장군 관할로 영관급(領官級) 군법사가 주지로 있던 법당이 위관급(尉官級) 주지법사로 격하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불교 포교당으로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는 <도심속의 숨은 안식처> 법웅사로 찾아가 본다.
법웅사
법웅사 소개는 법웅사 안내문을 그대로 전재한다.
예로부터 산자수명한 명산인 치악산 자락 도심에 자리한 법웅사는 육군 제1야전군사령부 불자들의 지극한 원력과 호국불교를 통한 신앙전력 강화를 위해 당시 주지 이지행 법사와 사령관 한신 대장, 원주지역 청신남녀들의 물심양면의 원호로 1971년11월13일 대한민국 야전군 사령부 최초의 군법당으로 창건되었다.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이셨던 청담 큰스님께서는 치악산 비로봉을 정면으로 마주보는 이곳을 불법의 유연찰토로 정하고 사찰을 건립하여 과거 신라,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흥법사, 거돈사. 법천사 등 한국불교의 찬란한 시대를 장식했던 북원문화권 사찰들의 역사적인 전통의 맥을 잇고자 창건불사에 많은 관심과 애정을 아끼지 않으셨다. 이에 사령관 한신 대장은 범종을 보시하여 불사를 크게 도왔다.
그 후 20여년이 지난 1992년 퇴락한 사찰중수를 위해 민.군 불자 및 원주사암연합회 스님들의 중창불사 발원으로 서두석, 최명준 법사가 계획하고 이희용 법사가 불사를 추진하여 천태종 전운덕 총무원장 스님과 용주사 주지스님 외 많은 사부대중의 도움으로 법당을 중창하기에 이르렀다.
전각으로는 일주문, 대적광전, 선운각(종각), 요사채, 종무소 등의 건물이 있으며 전통양식의 웅장한 대적광전에는 비로자나불을 비롯한 삼존불을 봉안하였고, 특히 본존불 복장에는 미얀마에서 이운해 온 부처님 진신사리 5과가 모셔져 있다.
또한 지장단과 신중단, 천불단, 화려한 장엄의 영단이 여법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항상 불보살님이 상주하는 도량으로 사격을 높여가고 있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군종특별교구 산하 법웅사는 원주불교의 포교거점 도량으로 장병불자들의 신심을 연마.수양하는 군법당으로서 뿐만 아니라 지역 불자들의 간절한 기도가 끊이지 않는 수행정진 도량으로 발전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굳이 부연하자면, 창건 초기의 법웅사는 지금처럼 웅장한 법당이 아니고 <대웅전> 현판을 달고 석가모니불을 모신, 샌드위치판넬로 지어진 가건물 형태로 지어졌었고, 1992년 중창불사 때는 <대적광전> 현판에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모니불 등 삼존불을 모신 목조형 콘크리트 건물로 지어졌는데, 조길조 법사가 불사를 수행하다가 이희용 법사가 마무리를 했다.
기존에 있던 석가모니불상은 홍천 11사단 군법당인 화랑사로 옮겨졌디.
법웅사 둘러보기
법웅사는 군장병의 신심을 연마하는 군법당이라서 다른 사찰에 비해 교육 분야의 활동이 왕성한 사찰이다. <법웅사 불교대학>을 운영하고 있기도 하고, 매주 일요일 법회에서는 주지법사의 법문을 통해 불교 이론교육도 병행하며, 일반신도 모임인 <거사림회>에서는 매월 불교유적과 사찰순례 답사를 진행하고 있다. 모든 사찰이 불교이야기가 풍성하지만, 법웅사는 특히 불교설화를 그림으로 표현한 벽화가 잘 조성되어 있다. 일일이 상세한 설명을 할 수는 없지만 하나하나 짚어보기로 한다.
<천왕사지 출토 석탑재>
일주문을 지나면 대웅전까지 넓은 마당이 있다. 마당 오른쪽 잔디밭에는 탑신석 하나와 옥개석 두층만 남아 온전하지 않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석탑이 자리잡고 있다. 탑신석에는 사면에 부처님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있는데, 동서남북 사방의 부처를 신앙 대상으로 삼는 사방불신앙(四方佛信仰)을 표현한 고려시대 전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본래 봉산동 경찰서 일대의 옛 절터인 천왕사지에서 출토되었다고 하는데 법웅사까지 온 사연은 알 수가 없고, 온전한 모습이 아니고 불완전한 모습이지만, 둥글둥글 세월을 견디고 박물관이 아니라 사찰의 경내에 있으니 제 자리를 찾은 듯 원만하게 서 있는 모습이 오히려 편안함을 안겨준다.
<참고자료>
사방불신앙(四方佛信仰)
불교의 사방불신앙은 동서남북 사방의 부처를 신앙 대상으로 삼는 불교신앙으로, 문헌에 나타난 사방불에 관한 최고의 언급은 ≪삼국유사≫의 사불산(四佛山)에 관한 기록이다.
이에 의하면 죽령(竹嶺) 동쪽 약 100리쯤 되는 곳에 높은 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587년(진평왕 9) 별안간 사면이 방장(方丈)만 하고 사방에 여래가 새겨진 대석(大石)이 하늘로부터 산꼭대기에 떨어졌다.
이 사방불은 홍사(紅紗)로 보호되어 있었는데, 왕이 이 말을 듣고 그곳에 가서 예배드리고, 절을 그 바위 곁에 세운 뒤 절 이름을 대승사(大乘寺)라고 하였다. 문경의 사불산에 이 기록대로 사방불이 실재하는지의 여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이 밖에 신라의 유물·유적 가운데 사방불은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
그 중 사방불이 표현된 석탑 또는 석조물로는 경주 남산 칠불암(七佛庵) 사면석불(四面石佛), 경주 굴불사지(掘佛寺址) 사방불, 경주경찰서 앞뜰 석탑 2기의 사방불, 경주 동천동 석탑사방불, 국립경주박물관 석탑 5기에 새겨진 사방불, 안강(安康)금곡사지(金谷寺址) 사방불, 경주 호원사지(虎願寺址) 사방불 등이 있다.
이 석조 유형물들의 정확한 성립연대는 알지 못하지만 굴불사지의 사면석불만은 ≪삼국유사≫에 언급이 있어서 대강 그 성립연대를 짐작할 수 있다. 경덕왕이 백률사(栢栗寺)에 행차하기 위해 산 아래 이르렀을 때 땅 속에서 염불하는 소리가 들려 땅을 파게 하였더니 사면에 사방불이 새겨져 있었으므로, 이에 절을 창건하고 굴불사라 이름하였다고 전한다. 이 기록에 의한다면 굴불사지의 사방불은 742년(경덕왕 1)에서 764년 사이에 발견된 것을 알 수 있다.
사방불의 사면에 어떤 부처를 모시는가에 대해서는 이론(異論)이 많다. 경전(經典)을 근거로 하면 대략 여덟 가지의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① ≪금광명경 金光明經≫ 및 ≪관불삼매경 觀佛三昧經≫에 의하면, 동방 아촉불(阿閦佛), 남방 보상불(寶相佛), 서방 무량수불(無量壽佛), 북방 천고음불(天鼓音佛)을 모시게 되고, ② ≪대보적경 大寶積經≫에 의하면 동방 집길상왕불(集吉祥王佛), 남방 사자용맹분신불(師子勇猛奮迅佛), 서방 마니적왕불(磨尼積王佛), 북방 바라기왕불(婆羅起王佛)을 봉안한다.
③ ≪대승대방광불관경 大乘大方廣佛冠經≫에 의하면 동방 정수최상길상여래(定手最上吉祥如來), 남방 무변보적여래(無邊寶蹟如來), 서방 대광명조여래(大光明照如來), 북방 보개화보요길상여래(寶開花普曜吉祥如來)를, ④ ≪지구다라니경 智炬陀羅尼經≫에 의하면 동방 지구여래(智炬如來), 남방 금광취여래(金光聚如來), 서방 실오여래(室悟如來), 북방 뇌음왕여래(雷音王如來)를 봉안한다.
⑤ ≪공작왕주경 孔雀王呪經≫에 근거하면 동방 약사유리광불(藥師琉璃光佛), 남방 정방불(定方佛), 서방 무량수불(無量壽佛), 북방 칠보당불(七寶堂佛)을, ⑥ ≪금강정유가중약출염송경 金剛頂琉伽中略出念誦經≫에 의하면 동방 아촉불, 남방 보생불(寶生佛), 서방 아미타불, 북방 불공성취불(不空成就佛)을 봉안한다.
⑦ ≪대일경 大日經≫ 제1권에 의하면 동방 보당불(寶幢佛), 남방 대근용불(大勤勇佛), 서방 무량수불, 북방 부동불(不動佛)을, ⑧ ≪대일경≫ 제5권에 의하면 동방 보당불, 남방 개부화왕불(開敷華王佛), 서방 무량수불, 북방 고음불(鼓音佛)을 봉안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역사상에 있어서 반드시 이 유형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던 사례는 허다하다.
일본의 대통 17년명(大統十七年銘) 사면불상(551)에 의하면, 정면에 석가모니불, 배면에 정광(定光), 왼쪽에 미륵, 오른쪽에 보현(普賢)으로 되어 있어, 사방불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석가삼존형식으로 나타나 있다.
신라의 경우 ≪삼국유사≫의 대산오만진신조(臺山五萬眞身條)에 의하면, 태자 보천(寶川)과 효명(孝明)이 속세를 버리고 암자를 지어 오대산에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5만의 진신을 보았고, 동서남북의 사방에 각각 관음(觀音)·미타·지장(地藏)·석가를 모셨다고 전한다. 이러한 유형은 신라인들의 독창적인 것으로서, 그들은 신앙대상으로서 이 4불을 도저히 제외할수 없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또한 시대가 경과됨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신앙, 특히 약사여래신앙(藥師如來信仰)이 성행되면서 약사여래의 주처(住處)로 믿어지는 동방에 약사여래를 모시게 된 것도 역시 그들이 경전의 유형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신라인의 신앙에 따른 독특한 면을 개발하였음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현존하는 신라의 사방불들은 모두 이러한 유형에 따라 재구성된 것으로 동방에 약사여래, 남방에 미륵불, 서쪽에 아미타불, 북방에 석가모니불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보이지 않는 법신불(法身佛)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상징적으로 내포한 하나의 불국토(佛國土)를 표현한 것이 신라의 사방불이다.
또, 불굴사지의 경우 서방에는 미타삼존(彌陀三尊)인 미타·관음·대세지(大勢至)를 조성하였고, 동방에는 약사여래, 그리고 북방에는 여래상이, 남방에는 2구의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다. 동방과 서방의 경우는 그들의 지물(持物)로 보아 확실히 미타삼존과 약사여래임을 확인할 수 있지만, 남방과 북방의 경우에는 심한 마멸로 인해 거의 모습을 분간할 수 없어 남북의 조각상을 미륵과 석가로 단언하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법웅사 호국통일탑>
법웅사 마당에는 3층탑이 한 점 있다. 사찰마다 으레 있는 탑이려니 여기겠지만, 호국통일탑으로 부르는 이 탑의 사연은 안내판의 기록을 그대로 소개한다.
호국통일탑공덕기
호국불교 정신을 이어받아 조국의 평화통일을 기원하며 용마부대의 발전과 전 장병들의 무운장구를 위하여 호국통일탑을 세운다,
불기 2541년 4월 20일
제57보병사단 사단장 소장 김효수
호국용마사 법사 현응 문병렬
법웅사 호국 통일탑 안치 연기문
`탑`은 범어(법어)의 스투우파(Stupa), 도는 팔리(Pali)어 투우파(thupa)의 음사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사리의 봉안 유무에 따라 탑파, 또는 지체(차이티야, caitya)라고 하는 별개의 용어가 있다.
먼저 사리를 봉안한 탑은 `스투우파`라고 함에 비하여 사리가 없는 탑을 `차이티야`라고 구별하기도 한다.`스투우파`는 방분(方墳), 원총(圓塚), 또는 고현처(高顯處) 등의 뜻으로 부처님의 신골을 봉안하는 묘소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 비하여, `차이티야`는 신령스런 장소나 고적을 나타내는 기념탑적인 것으로 영묘(靈廟), 정처(淨處), 복취(福聚) 등의 의미이다.
법운사 호국 통일탑은 원래 서울 중랑구 소재 육군 제57보병사단 호국 용마사에 세워졌던 탑으로서, 불심으로 조국 평화통일을 기원하고자 불기 2541년(서기 1997년) 4월 6일 당시 사단장 소장 김효수 장군과 호국 용마사 주지 현응 문병렬 법사의 발원으로 봉선사 회주이신 월운 큰스님, 도선사 주지 동광스님, 용문사 주지 정수스님, 홍국사 주지 화엄스님, 무진 법장사 주지 법장스님의 증명하에 수 많은 불자들의 동참 공덕으로 조성되었다.
이와 같은 거룩한 원력과 발원이 담긴 탑이 2011년 12월 1일 국방부 부대 개편에 따라 제57보병사단이 해체됨으로써 방치되게 되었던 바, 법웅사 주지 남장 김갑영 법사와 제1야전군 사령광 육군대장 박상규장군, 부사령관 육군 중장 지길원 장국, 공병부장 육군 준장 정종민 장군, 법웅사 총신도 회장 지일 남화여 거사, 거사림회 학능 정문수 거사, 등 불자들의 발원으로, 불기 2556년(서기 2012년) 5월28일 부처님 오신날을 기념하여 탑을 이곳 법웅사로 이운 안치하니 이 공덕으로 조국의 평화통일과 국군장병들의 무운장구, 대한민국의 영원한 번영을 이룩하고, 이 도량에서 기도드리는 모든 분들에게 제불보살님의 가피가 가득하기를 축원합니다.
불기 2556년(서기 2012년) 5월 28일 부처님 오신 날
법웅사 호국통일탑 이운 안치 발원제자 일동 합장 분향
※ 차이티야
불교의 예배 대상인 스투파를 모신 성소(성소) 또는 사당(사당)이다. 최초의 사당은 나무나 짚으로 만든 건물이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인도에는 마우리아 시대 이후에 그러한 지상 건물의 형식을 본떠 만든 석굴사원이 많이 남아있어 원래의 형태를 짐작케 한다. 암벽을 파서 인공적으로 만든 석굴사원은 석조건축이라기보다는 조각에 가깝다. 초기 석굴사원의 전형적인 예로는 기원전 1세기초에 바자(Baja)석굴을 들 수 있다. 이 차이티야 굴은 중앙부의 넓은 공간(네이브)과 그 주위의 좁은 복도로 구성되어 있고 두 공간은 열주로 구분된다. 석실 가장 안쪽의 반원형 공간에는 암괴를 깎아 만든 스투파가 있다. 이러한 구조는 스투파 주위를 돌면서 예배하고 사원 내에서 여러 의식과 집회가 거행될 수 있도록 설계되었음을 말해 준다, 스투파 또한 차이티야의 한 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
<비두리 귀부 및 이수>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비두리 산31에 있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0호 ‘비두리 귀부 및 이수’도 한 때 법웅사에 있었다. 비신은 없어진 채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 있는 이 문화재의 본래 위치는 문막읍 후용리 용바위골이라고 하는데, 법웅사 창건 후 경내로 옮겨왔다가 1976년 비두리 주민의 건의에 따라 지금의 자리에 옮겨 보존했고, 1982년 11월 3일 강원도의 유형문화재 제70호로 지정되었다.
‘비두리 귀부 및 이수’는 차후 별도로 소개하기로 한다.
<범종각>
법웅사의 범종각은 선운각(禪韻閣)이라는 멋드러진 이름을 가지고 있다. 처음에는 범종 하나만 있어 평범하게 범종각으로 불렀으나 부처님께 소리공양 올리는 네 가지 물건인 불전사물(佛前四物) 중 운판과 목어를 추가하면서 선운각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종각의 사물(四物)은 범종 법고 운판 목어인데, 법웅사 종각에는 범종과 목어 그리고 운판이 있다. 법고가 빠졌으니 종각의 삼물(三物)이 있는 셈이다. 각자 용도가 있으나 범종은 지옥중생과 수행자, 법고는 축생(畜生), 목어는 물속의 중생, 운판은 날아다니는 중생의 구제를 위한다는 의미이니 온갖 생물에 대한 불가의 자비가 모여있는 곳이 범종각이라는 정도만 소개를 하고 다음을 기약한다.
우리가 흔히 아는 목탁도 목어의 일종으로 원래 목어는 물고기 모양으로 법웅사의 종각에도 있다. 목어의 유래는 전해오는 설화가 있다.
목어를 고기 모양으로 만든 데에는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있는데, 스승의 가르침을 잘 따르지 않던 어떤 스님이 병들어 죽게 되었고, 스님은 죽어서 물고기가 되었는데 등에 나무가 났다. 하루는 스승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널 때 한 마리 고기가 나타나서 생전의 죄를 참회하고 등에 난 나무를 없애주기를 애걸하므로 스승이 수륙재를 베풀어 고기 몸에 난 나무를 벗게 하고 그 나무로 고기 모양을 만들어 달아놓았다. 게으름을 경책하려는 스승의 배려였다고 한다. 법웅사 대적광전 안에 그 사연이 담긴 벽화가 그려져 있다. 넘실대는 강물에 등에 나무가 있는 물고기가 눈물을 흘리는 그림이다.
선운각의 범종에는 특이한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 일반적 종성(鐘聲)
원차종성변법계(願此鍾聲遍法界) 원컨대 이 종소리가 온 법계에 두루 퍼져
철위유암실개명(鐵圍幽暗悉皆明) 철위지옥 어두움이 모두 다 밝아지고
삼도이고파도산(三途離苦破刀山) 삼악도의 고통을 여의고 도산지옥 부서져서
일체중생성정각(一切衆生成正覺) 일체 중생 모두 함께 정각을 이루어지이다
* 법웅사 범종 명문
내 아들들아
- 채바다 -
병사여 내 아들들아
가슴 활짝 열고 어깨를 펴라
이 땅 이 하늘이
자랑스런 너의 조국임을
그 용맹 그 기상 그 젊음으로
조국의 심장에 맥박치는
종소리 되어라
선운각이라는 범종각의 이름 때문에, 간혹 전북 고창군의 도솔산 선운사(兜率山禪雲寺)를 떠올리는 분도 있고, 1970년의 <정인숙 살해사건>을 연상하는 짓궂은 분도 있지만, 선운사나 정인숙이 일하던 요정인 선운각(仙雲閣)과는 한자가 다르다.
법웅사의 선운각(禪韻閣)은 선정(禪定)에 들어 은은하게 피어나는 운율(韻律)로 이해하면 된다.
이 선운각에서는 지붕을 받치는 공포(栱包)와 공포 사이의 포간불(包間佛)도 있으니 인연따라 만나볼 수 있다.
<참고자료>
<정인숙 살해사건>은 제3공화국 당시의 의문사 사건이다. 고급 요정 종업원인 정인숙이 1970년 3월 17일 밤 11시경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부근의 강변3로에서 교통사고를 가장한 총격 암살된 사건이다. 정인숙의 차를 운전하던 넷째 오빠 정종욱은 넓적다리를 관통당하였으나 생존해 있었다. 정종욱은 택시 기사에게 도움을 청하여 구조되었다.
정인숙은 명지대학교 중퇴 후 선운각이라는 요정에 호스티스로 일하고 있었다. 1960년대 후반에 미혼인 상태로 아들을 한 명 출산하였는데, 그 아들이 당시 정권 최고위층의 자녀라는 소문이 있어서 정치계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반인 사이에서도 큰 스캔들이 되었다.
정인숙은 고급 요정 선운각(仙雲閣) 출신 호스티스다. 그녀가 남긴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정인숙의 수첩에 각계 고위 인사의 이름과 연락처가 기록되어 있었는데, 재벌 회장 몇 명과 박종규 대통령 경호실장, 이후락 주일 대사,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등의 고위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박정희 대통령까지 적혀 있었다.
특히 당시 국무총리인 정일권은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었고, 미국 워싱턴 포스트에서 이 사건을 다룬 기사에 정일권의 사진이 실리기도 했다.
<대적광전>
법웅사의 본당은 화엄경의 연화장세계가 대정적의 세계라는 의미의 대적광전(大寂光殿)으로, 일반적으로 사찰에서 연화장세계의 교주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봉안하는 불교건축물이다.
연화장세계는 『화엄경』과 『범망경』을 근거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있는 세계이며, 큰 연꽃 속에 일체의 국토와 사물을 간직한 불국토를 의미한다. 화장세계(華藏世界), 연화장장엄세계해(蓮華藏莊嚴世界海)’라고도 한다.
화엄종의 맥을 계승하는 사찰에서는 주로 이 전각을 본전(本殿)으로 건립하여 화엄경에 근거한다는 뜻에서 화엄전(華嚴殿), 화엄경의 주불(主佛)인 비로자나불을 봉안한다는 뜻에서 비로전(毘盧殿)이라고도 한다.
이 대적광전에는 원래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한 삼신불(三身佛)을 봉안하여 연화장세계를 상징하게 된다. 원래 법신(法身)·보신(報身)·화신(化身)의 삼신불로는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석가모니불을 봉안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선종(禪宗)의 삼신설에 따라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 원만보신(圓滿報身) 노사나불(盧舍那佛),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 석가모니불의 삼신을 봉안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비로자나불의 좌우 협시보살(脇侍菩薩)로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봉안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법당 내 오불(五佛)을 봉안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 삼신불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를 봉안하며, 아미타불의 좌우 협시보살로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약사여래의 협시보살로는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을 봉안하게 된다.
이는 약사전(藥師殿)과 극락전(極樂殿)을 대적광전에서 함께 수용한 형태로, 우리나라에서 중요하게 신봉되는 불보살들이 모두 한 곳에 모인 전각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볼 때 대적광전은 사찰 내에서 가장 큰 당우가 된다.
후불탱화(後佛幀畫)는 전각의 규모에 따라 1폭의 삼신탱(三身幀)을 봉안하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 법신탱·보신탱·화신탱 3폭을 각각 불상 뒤에 봉안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대적광전이 대웅전과 동등한 위치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보통 신중을 모신 신중단(神衆壇)과 영가를 모신 영단(靈壇)을 함께 마련하게 되며, 신중단에는 신중탱화를, 영단에는 감로탱화(甘露幀畫)를 봉안한다.
내부의 장엄도 화려하여 보통 주불 뒤에는 닫집인 천개(天蓋)를 만들고 여의주를 입에 문 용 등을 장식하며, 천장에는 보상화문(寶相華文)과 연화문(蓮華文) 등을, 벽의 상단에는 화불(化佛)과 비천(飛天)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화려하게 장식한다.
비로자나불 한 분만 모실 때는 적광전(寂光殿), 비로전(毘盧殿)이라 한다.
<대적광전의 벽화>
법웅사 대적광전의 외벽과 전각 안의 벽에는 다양한 벽화가 그려져 있어 불교 설화의 가르침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외벽에는 석가모니불의 일생 중 중요한 장면 여덟가지를 그림으로 표현한 팔상도(八相圖)와 수행단계를 소(牛)에 비유한 심우도(尋牛圖)가 그려져 있고, 전각 안우측 벽에는 연등불에게 꽃을 바치는 전생의 석가모니, 혜가단비, 목어이야기, 한산과 습득 벽화가 그려져 있고, 좌측 벽에는 흰 뼈와 검은 뼈, 법을 받는 육조(육조) 혜능대사 벽화가 있으며, 지금은 영가단에 가려졌지만 무인도에 버려진 형제, 안수정등 등의 벽화가 있다.
* 석가모니 팔상성도
팔상도는 석가모니의 일생을 8장면으로 압축하여 묘사한 그림으로, 인도에서는 BC 2세기경에 이미 석가모니의 생애를 묘사한 불전도가 성립되었으며, 그 내용은 출생, 성도, 전법륜, 열반의 사상과 탁태, 출유, 출가, 항마를 모두 합쳐서 팔상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팔상도는 사찰의 팔상전이나 영산전에 봉안되며, 우리나라의 팔상도는 대개 ≪불본행집경 佛本行集經≫의 설을 참고로 하였다. 여덟 장면은 다음과 같다.
1. 도솔천에서 내려오는 상(兜率來儀相)
2. 룸비니 동산에 내려와서 탄생하는 상(毘藍降生相)
3. 사문에 나가 세상을 관찰하는 상(四門遊觀相)
4. 성을 넘어가서 출가하는 상(踰城出家相)
5. 설산에서 수도하는 상(雪山修道相)
6. 보리수 아래에서 마귀의 항복을 받는 상(樹下降魔相)
7.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포교하는 상(鹿苑轉法相)
8.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는 상(雙林涅槃相)
⓵ 도솔내의상에서는 네 장면이 전개된다. 즉 탱화의 왼쪽에는 마야궁(摩耶宮)에서 마야 부인이 의자에 앉아 흰 코끼리를 탄 호명보살(護明菩薩)이 내려오는 꿈을 꾸는 장면이 묘사된다.
바로 그 위에 입태전(入胎殿)이 있어서 입태되는 장면이 묘사되고, 그 위에는 소구담이 도적으로 몰리어 죽는 장면이 묘사된다. 오른쪽에는 정반왕궁(淨飯王宮)이 있고 여기에는 왕과 왕비가 꿈꾼 내용을 바라문에게 물어보는 장면이 묘사된다.
⓶ 비람강생상에서는 여섯 장면이 묘사된다. 첫째 마야 부인이 궁전을 떠나서 친정으로 가던 도중 룸비니 동산에서 무우수(無憂樹) 나뭇가지를 잡고 서서 오른쪽 겨드랑이로 아기를 낳는 장면, 둘째 태어난 아기가 한 쪽 손은 하늘을, 한 쪽 손은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외치는 장면, 셋째 제천(諸天)이 기뻐하면서 갖가지 보물을 공양하는 장면, 넷째 용왕(龍王)이 탄생불을 씻겨 주는 장면, 다섯째 왕궁으로 돌아오는 장면, 여섯째 아지타선인의 예언 장면 등으로 묘사된다.
⓷ 사문유관상에서는 네 장면이 묘사된다. 태자가 동문으로 나가 노인의 늙은 모습을 보고 명상하는 장면, 남문으로 나가 병자를 보고 노고(老苦)를 느끼는 장면, 서문으로 나가 장례 행렬을 보고 죽음의 무상을 절감하는 모습, 북문으로 나가 수행하는 사문(沙門 : 출가한 중)의 모습을 보고 출가를 결심하는 장 등이다.
⓸ 유성출가상에서는 보통 세 장면이 묘사된다. 첫째 태자궁에서 시녀들이 취하여 잠자고 있는 모습, 둘째 태자가 말을 타고 성문을 뛰어넘는 모습, 셋째 마부 찬다카가 돌아와서 왕비와 태자비에게 태자의 옷을 바치면서 태자가 떠났음을 보고하자 왕비와 태자비가 태자의 소재를 묻는 장면 등이다.
⓹ 설산수도상에서는 보통 여섯 장면이 묘사된다. 첫째 태자가 삭발하고 사문의 옷으로 갈아입는 장면, 둘째 찬다카가 돌아가는 장면, 셋째 정반왕이 교진여 등을 보내어 태자에게 왕궁으로 돌아갈 것을 설득하는 장면, 넷째 환궁을 거절하자 양식을 실어 보내는 장면, 다섯째 목녀(牧女)가 우유를 석가에게 바치는 장면, 여섯째 모든 스승을 찾는 모습 등이다.
⓺ 수하항마상에서는 네 장면이 묘사된다. 첫째 마왕 파순이 마녀로 하여금 유혹하게 하는 장면, 둘째 마왕의 무리가 코끼리를 타고 위협하는 장면, 셋째 마왕이 80억의 무리를 모아 부처님을 몰아내려고 하는 장면, 넷째 마왕의 항복을 받아 성도하는 장면이다.
⓻ 녹원전법상에는 네 장면이 묘사된다. 대개 상단과 하단으로 구분되는 경우가 많다. 상단에는 석가삼존불이 설법하는 모습이다.
하단에는 교진여 등의 다섯 비구에게 최초로 설법하는 모습, 기원정사(祇園精舍 : 中印度 舍衛城 남쪽에 있던, 석가와 그 제자를 위해 세운 절)를 건립하는 장면, 흙장난을 하던 아이들이 흙을 쌀로 생각하고 부처님께 보시하자 탑으로 바뀌는 장면 등이다.
⓼ 쌍림열반상은 보통 세 장면으로 묘사된다. 첫째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하는 모습, 둘째 금관에 입관된 부처님이 가섭의 문안을 받고 두 발을 관 밖으로 내보이는 모습, 셋째 다비하여 사리가 나오자 8대왕이 차지하기 위하여 다투는 장면과 바라문이 이를 중재하는 모습 등이다.
* 심우도
불교의 선종(禪宗)에서, 본성(佛性)을 찾는 것을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하여 그린 선화(禪畫)를 심우도라고 한다..
사찰의 벽화로 많이 그려지는 이 그림은 선의 수행단계를 소와 동자에 비유하여 도해한 그림으로, 수행단계를 10단계로 하고 있어 십우도(十牛圖)라고도 한다. 중국 송나라 때 만들어진 보명(普明)의 십우도와 곽암(廓庵)의 십우도 등 두 종류가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
조선시대까지는 이 두 가지가 함께 그려졌으나 최근에는 대체로 곽암의 것을 많이 그리고 있으며, 주로 사찰의 법당 벽화로 많이 묘사되고 있다. 중국의 경우에는 십우도 대신에 말을 묘사한 십마도(十馬圖)를 그린 경우도 있고, 티베트에서는 코끼리를 묘사한 십상도(十象圖)가 전해져 오고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보명의 것은 소를 길들인다는 뜻에서 목우도(牧牛圖)라고 한 반면, 곽암의 것은 소를 찾는 것을 열 가지로 묘사했다고 하여 심우도라고 한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 그리고 보명의 것에서는 마지막 열번째의 그림에만 원상(圓相)을 묘사하고 있는 데 대하여 곽암의 것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의 모든 단계를 원상 안에 묘사한 점이 다르다.
이 심우도의 대체적인 내용은 처음 선을 닦게 된 동자가 본성이라는 소를 찾기 위해서 산중을 헤매다가 마침내 도를 깨닫게 되고 최후에는 선종의 최고 이상향에 이르게 됨을 나타내고 있다. 곽암의 심우도를 각 단계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심우(尋牛)는 소를 찾는 동자가 망과 고삐를 들고 산속을 헤매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것은 처음 발심한 수행자가 아직은 선이 무엇이고 본성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지만 그것을 찾겠다는 열의로써 공부에 임하는 것을 상징한 것이다.
② 견적(見跡)은 소 발자국을 발견한 것을 묘사한 것으로, 순수한 열의를 가지고 꾸준히 공부를 하다 보면 본성의 자취를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된다는 것을 소의 발자국으로 상징한 것이다.
③ 견우(見牛)는 동자가 멀리서 소를 발견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는 본성을 보는 것이 눈앞에 다다랐음을 상징하고 있다.
④ 득우(得牛)는 동자가 소를 붙잡아서 막 고삐를 낀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 경지를 선종에서는 견성(見性)이라고도 하는데, 마치 땅속에서 아직 제련되지 않은 금돌을 막 찾아낸 것과 같은 상태라고 많이 표현된다. 실제로 이때의 소는 검은색을 띤 사나운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아직 삼독(三毒: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마음)에 물들어 있는 거친 본성이라는 뜻에서 검은색을 소의 빛깔로 표현한 것이다.
⑤ 목우(牧牛)는 거친 소를 자연스럽게 놓아두더라도 저절로 가야 할 길을 갈 수 있게끔 길들이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삼독의 때를 지우는 보임(保任: 깨달은 것을 더욱 갈고 닦음)의 단계로, 선에서는 이 목우의 과정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한번 유순하게 길들이기 전에 달아나 버리면 그 소를 다시 찾는다는 것은 더욱 어렵기 때문에 특별히 주의를 준 것이다. 이때의 소는 길들이는 정도에 따라서 차츰 검은색이 흰색으로 바뀌어 가게 묘사된다.
⑥ 기우귀가(騎牛歸家)는 동자가 소를 타고 구멍 없는 피리를 불면서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오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때의 소는 완전한 흰색으로서 특별히 지시를 하지 않아도 동자와 일체가 되어 피안의 세계로 나아가게 되며, 그때의 구멍 없는 피리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가히 육안으로 살필 수 없는 본성의 자리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상징하게 된다.
⑦ 망우존인(忘牛存人)은 집에 돌아와 보니 애써 찾은 소는 온데간데 없고 자기만 남아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결국 소는 마지막 종착지인 심원(心源)에 도달하게 하기 위한 방편이었으므로, 이제 고향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니 방편은 잊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뗏목을 타고 피안에 도달했으면 뗏목을 버려야 한다는 교종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⑧ 인우구망(人牛俱忘)은 소 다음에 자기 자신도 잊어버린 상태를 묘사한 것으로 텅빈 원상만을 그리게 된다. 객관이었던 소를 잊었으면 주관인 동자 또한 성립되지 않는다는 주객 분리 이전의 상태를 상징한 것으로, 이 경지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완전한 깨달음이라고 일컫게 된다.
⑨ 반본환원(返本還源)은 이제 주객이 텅빈 원상 속에 자연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비치는 것으로 묘사된다.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조그마한 번뇌도 묻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참된 지혜를 상징한 것이다.
⑩ 입전수수(入廛垂手)는 지팡이에 큰 포대를 메고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가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때의 큰 포대는 중생들에게 베풀어 줄 복과 덕을 담은 포대로, 불교의 궁극적인 뜻이 중생의 제도에 있음을 상징화한 것이다.
* 연등불에게 꽃을 바치는 전생의 석가모니
석가모니가 전생에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을 하고 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어느 날 연등불(燃燈佛)이 오신다는 이야기를 들은 유동(儒童, 당시의 석가여래의 이름)은 모든 것을 버리고 연등불이 오시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연등불에게 무엇을 공양하면 좋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마침 한 처녀가 손에 꽃을 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유동은 그 처녀에게, 연등불을 바치고 싶으니 그 꽃을 자기에게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랬더니 처녀는 꽃을 주는 대가로 내세에는 자신을 부인으로 맞이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유동은 기꺼이 승락하고, 그 꽃을 받아 처녀와 함께 연등불 앞에 나아가서 오화(五華) 연꽃을 연등불에게 바치고 절을 하였다. 그리하여 내세에는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授記)를 받았다.
* 혜가(慧可) 팔을 자르다(慧可斷臂 혜가단비)
혜가(慧可) 대사는 중국 낙양의 무뢰(武牢) 사람으로, 어릴 때의 이름은 신광(神光)이고 성은 희(姬)가였다.
신광은 어릴 때부터 덕이 있고 책읽기를 좋아하여 뭇 서적들을 두루 읽었는데, 어느날 불서(佛書)를 읽다가 문득 얻은 바가 있어 출가하기로 마음먹었다. 낙양 향산사로 출가한 신광은 여덟 해 동안 좌선에 몰두하였다. 어느날 신광이 선정에 들었는데, 홀연히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말했다.
"머지않아 과위(果位: 깨달음의 지위)를 얻을 그대가 어찌하여 여기에 막혀 있는가? 남쪽으로 가라."
이튿날 신광은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팠다.
이를 본 그의 스승 보정 선사가 고치려 하자, 하늘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지금 신광은 뼈를 바꾸고 있는 중이다. 예사 아픔으로 생각하지 말아라."
그제서야 신광은 스승에게 신인이 말한 바를 이야기했다.
그러자 스승이 그에게 말했다.
"네 얼굴이 길하고 상스러우니 반드시 얻는 바가 있으리라. '남쪽으로 가라' 함은 소림을 일컽는 것이니, 필시 달마대사가 너의 스승이리라."
신광은 은사 스님을 떠나 소림굴의 달마 대사를 찾아갔다.
그때에 달마대사는 아홉 해를 기약하고 면벽(面壁: 벽을 향하여 좌선하는 것을 말한다. 달마대사가 소림사에 숨어 지내며 9년 동안 경론을 강설하지도 않고 불상에 절하지도 않으며 종일토록 벽을 향하여 좌선한 것을 두고 ‘면벽구년’이라 한다. 그 뒤부터 선승들은 선원에서 좌선하려면 반드시 벽을 향하게 되었다)하며 법을 전할 때가 무르익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광은 오로지 답답한 마음을 풀려고 아침저녁으로 달마대사를 섬기며 법을 물었다. 그러나 달마대사는 언제나 묵묵부답이었고, 그럴수록 신광은 자기를 채찍질하며 정진하였다.
'옛사람들은 도를 구하고자 뼈를 깨뜨려 골수를 빼내고, 피를 뽑아 주린 이를 구제하고, 머리카락을 진흙땅에 펴고, 벼랑에서 떨어져 굶주린 호랑이의 먹이가 되기도 하였다. 옛사람들은 무릇 도를 구함에 있어 이처럼 정성을 다하였는데,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그와 같이 행하지 못하는가?‘
그 해 동짓날 초아흐레 날이었다.
밤새 큰눈이 내렸는데, 신광은 달마대사가 선정에 든 굴 밖에 서서 꼼짝도 않고 밤을 지샜다. 새벽이 되자 눈이 무릎이 넘도록 쌓였고, 달마대사는 그때까지도 꼼짝 않고 눈 속에 서 있는 신광을 보았다.
"네가 눈 속에서 그토록 오래 서 있으니, 무엇을 구하고자 함이냐?"
"바라건대 스님께서는 감로(甘露)의 문을 여시어 어리석은 중생을 제도해 주소서."
"부처님의 위없는 도는 오랜 겁 동안을 부지런히 정진하며, 행하기 어려운 일을 능히 행하고 참기 어려운 일을 능히 참아야 얻을 수 있다. 그러하거늘 너는 아주 작은 공덕과 하잘 것 없는 지혜와 경솔하고 교만한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서 참다운 법을 바라는가? 모두 헛수고일 뿐이다."
달마대사의 이 말씀을 듣더니 신광은 홀연히 칼을 뽑아 자기의 왼쪽 팔을 잘랐다. 그러자 때 아닌 파초가 피어나 잘라진 팔을 고이 받히는 것이었다. 신광의 구도심이 이처럼 열렬함을 본 달마대사는 말하였다.
"모든 부처님들이 처음에 도를 구할 때에는 법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잊었다. 네가 지금 팔을 잘라 내 앞에 내놓으니 이제 구함을 얻을 것이다."
달마대사는 신광에게 혜가(慧可)라는 새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러자 혜가의 왼팔이 다시 본디의 자리로 가 붙었다.
"부처님의 법인(法印: 진리의 요체)을 들려주소서."
"부처님의 법인은 남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니라."
"제 마음이 편하지 못합니다. 스님께서 편안하게 하여 주소서."
"불안한 네 마음을 여기에 가져오너라. 그러면 편안하게 해 주겠다."
"마음을 아무리 찾아도 얻을 수 없습니다."
"내 이미 너를 편안케 하였느니라."
이 말 끝에 혜가는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음을 얻은 혜가는 달마대사로부터 법을 이어받아 중국 선종의 2대 조사가 되었다.
혜가 대사는 34년 동안 업도에 머물며 설법하다가, 552년에 제자 승찬에게 법을 전하고, 그 이듬해에 그의 나이 107살이 되어 입적하였다.
* 목어이야기(등에 나무가 난 물고기)
목어의 유래는 승려들의 생활 규범을 적어 놓은 <교원정규>와 중국 당나라 때 지어진 승려 생활 규범인 <백장정규>에 나온다.
옛날 어느 절에 덕 높은 스님이 몇 사람의 제자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고 제멋대로 생활하며, 계율에 어긋난 속된 생활을 일삼다가 그만 몹쓸 병이 들어 죽게 되었다. 죽은 뒤에는 물고기 몸을 받아 태어났는데 등 위에 큰 나무가 솟아나서
큰 고통을 받았다.
하루는 스승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는데 등 위에 커다란 나무가 달린 고기가 뱃전에 머리를 들이대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스승이 깊은 선정(禪定)에 잠겨 고기의 전생을 살펴보니, 이는 바로 병들어 일찍 죽은 자기 제자가 방탕한 생활의 과보(果報)로 고통받는 모습이었다.
이를 알고 가엾은 생각이 들어 수륙천도제(水陸薦度際)를 베풀어 고기의 몸을 벗게 하여 주었더니 그날 밤 스승의 꿈에 제자가 나타나서 스승의 큰 은혜를 감사해 하며 다음에는 참으로 발심하여 공부할 것을 다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자기 등에 있는 나무를 베어 고기 모양을 만들어 부처님 앞에 두고 쳐주기를 부탁했다.
그 소리를 들으면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교훈이 될 것이고, 강이나 바다의 물고기들도 해탈할 좋은 인연이 되겠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고기 등에 자라난 나무를 베어 고기 모양의 목어(木魚)를 만들게 되었는데, 이것이 차츰 쓰기에 편리한 둥근 목탁(木鐸)으로 변형되어, 예불이나 독경을 할 때 혹은 때를 알릴 때에도 사용하며, 그 밖의 여러 행사에 사용되고 있다.
일설에는, 고기는 잠을 잘 때도 눈을 뜨고 자므로 수행자도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해야 불도(佛道)를 성취한다는 뜻에서 고기 모양의 목어를 만들어 아침저녁으로 치게 하였다고도 한다.
* 한산과 습득(한산습득도 寒山拾得圖)
한산과 습득은 당나라 때에 살았다고 전해지는 전설적인 인물들이다.
이 두 사람은 풍간 선사라고 하는 도인과 함께 국청사에 살고 있었는데, 세상 사람들은 이들을 국청사에 숨어 사는 세 사람의 성자라는 뜻으로 국청삼은(國凊三隱)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모두 불보살님들로, 바로 풍간 선사는 아미타부처, 한산은 문수보살, 습득은 보현보살의 현신이라고 한다.
한산은 국청사에서 좀 떨어진 한암이라는 굴속에 살았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늘 다 떨어진 옷에 뾰족한 모자를 쓰고 커다란 나막신을 신고 다녔으며 때가 되면 국청사에 와서 습득이 대중들이 먹다 남은 음식을 모아주면 먹곤 하였다. 그리고 가끔 절에 와서 거닐기도 하고 때로는 소리를 지르거나 하늘을 쳐다보고 욕을 하기도 했다. 절의 스님들은 그런 그를 작대기로 쫓아내곤 하였는데, 그러면 한산은 손뼉을 치고 큰 소리로 웃으며 가버렸다.
습득은 풍간스님이 길을 가다가 버려진 남자 아기를 주워다 길렀다고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여졌는데, 국청사 주지스님은 습득이 자라자 법당 부처님 앞에 있는 촛대와 향로를 청소하는 일을 맡겼다. 하루는 스님이 법당 앞을 지나가는데 법당 안에서 말소리가 나는데, 그것은 바로 습득의 목소리였다.
“부처님, 밥 잡수시오. 안 잡수셔? 그럼, 내가 먹지.”
“부처님, 반찬 잡수시오. 안 잡수셔? 그럼, 내가 먹지.”
스님이 이상히 여겨 법당 문을 열어보았더니 습득이 부처님 턱 밑에 앉아 공양 올린 밥을 숟가락으로 퍼서 부처님 입에 갖다 대고는 자기가 먹으면서 연신, “부처님 밥 잡수시오. 안 잡수셔? 그럼. 내가 먹지.” 그러고 있는 것이었다.
화가 난 스님은 그를 부엌에서 설거지하는 일을 맡겨버렸다. 그는 부엌에서 그릇을 씻거나 불을 때는 일을 하였는데, 설거지를 하고 난 뒤에는 남은 밥이나 음식 찌꺼기를 모아 대나무 통에 넣고서는 한산과 어울려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어느 날 습득이가 마당을 쓸고 있는데 주지스님이 지나다가 ‘너 이름이 무엇이며, 어디에 사느냐?’하고 물었다.
습득은 일을 중지하고 손을 깍지 짓고 섰다. 주지스님이 그 뜻이 뭔지 모르고 가만히 서 있는데, 그 옆에 한산이 나타나서 가슴을 밀면서 ‘蒼天아 蒼天아’했다. 그랬더니 습득이가 한산에게 도리어 묻기를 ‘내 무어라 했느냐’ 하였다. 그러자 한산이가 말하기를 ‘어찌 東家(동가) 사람의 죽음을 모르고 西家(서가) 사람이 슬퍼하겠나’ 하더니 두 사람이 울고 웃고 춤추며 주지스님 앞을 지나 밖으로 멀리 뛰어나가 버렸다.
또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국청사에는 절의 외진 곳에 가람신(伽藍神, 절을 보호하는 신)을 모셔둔 당이 있었는데 별로 돌보는 이가 없어서 문짝이 다 떨어져 나가고 지저분했다. 습득이 청소를 하고 사시 때마다 공양을 올려놓으면 지켜보고 있던 까마귀가 내려와서 마구 쪼아 먹었다.
하루는 이를 지켜보던 습득이 가람신에게 달려가 지팡이로 마구 때리며 ‘네 밥도 지키지 못하면서 어떻게 가람을 지켜? 이 못난 놈아!’하며 꾸짖었다.
이 날 저녁 주지스님 꿈에 가람신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보현보살께서 내 밥도 못 지킨다고 저를 마구 때리니 죽을 지경이요. 내 집에 문을 달아 주든지 아니면 공양 올리는 일을 보현보살에게 맡기지 말아주셔요’하는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이 이상한 꿈 이야기를 대중에게 하니 모두 똑 같은 꿈을 꾸었다고 소란들이었으며, 더구나 그게 바로 습득인 줄 알고는 더욱 신기해했다.
그들은 일없이 하늘을 보고 웃기도 하고, 큰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미친 사람 짓을 하면서도,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모두 불도의 이치에 맞는 말만 하였다.
어느 날 주지스님이 멀리 갔다가 산 아래 목장을 지나 돌아오는데, 한산과 습득이 소 떼와 더불어 놀고 있었다. 한산이 먼저 소 떼를 향하여 말을 했다.
“이 도반(道伴)들아, 소 노릇하는 기분이 어떠한가, 시주 밥을 먹고 놀기만 하더니 기어코 이 모양이 되었구나. 오늘은 여러 도반들과 함께 법문을 나눌까 하여 왔으니, 이름을 부르는 대로 이쪽으로 나오게. 첫 번째, 동화사 경진 율사!”
그 소리에 검은 소 한 마리가 ‘음메~’하며 앞으로 나오더니, 앞발을 꿇고 머리를 땅에 대고 나서는 한산이 가리키는 위치로 가는 것이었다.
“다음은 천관사 현관법사!”
이번에는 누런 소가 ‘음메~’하고 대답하더니 절을 하고는 첫 번째 소를 따라 갔다. 이렇게 서른 몇 번을 되풀이하였다. 백여 마리의 소 가운데 서른 마리는 스님들의 환생(還生)인 것이었다. 그들은 시주밥만 축내며 공부를 게을리 한 과보로 소가 된 것이다.
몰래 이 광경을 지켜 본 주지 스님은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끼고 마치 쫓기는 사람처럼 절로 올라가며 혼자 중얼거렸다.
‘한산과 습득이 미치광이인줄만 알았더니 성인의 화신임에 틀림없구나.’
한편 그 고을에는 여구윤이란 사람이 지방관리로 임명되어왔는데 그만 병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그 병은 어떠한 약과 의술로도 효과가 없었다. 이를 알게 된 풍간 선사가 그의 병을 깨끗이 고쳐 주었고, 이에 여구윤은 크게 사례하며 설법을 청했다.
하지만 풍간 선사는,
“나 보다는 문수와 보현께 물어 보시오.”
“두 분께서는 어디 계신지요?”
“국청사에서 불 때고 그릇 씻는 한산과 습득이 바로 그분들입니다.”
그리하여 자사는 예물을 갖추고 국청사로 한산과 습득을 찾아가니, 한산과 습득은 화로를 끼고 앉아 웃으며 떠들고 있었다. 그들에게 절을 올리자 한산은 자사의 손을 잡고 웃으며 말했다.
“풍간이 실없는 소리를 지껄였군. 풍간이 바로 아미타불인줄 모르고 우리를 찾으면 뭘 하나?”
이 말을 남기고 한산과 습득은 절을 나와 한암굴로 들어 가버렸는데, 그들이 굴로 들어가자 입구의 돌문이 저절로 닫히고 그 후로 두 사람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한다.
- 詩 1
그들은 시에도 능했는데 시를 지어서는 나뭇잎과 바위 등에 써놓았다고 한다.
한산과 습득의 천진난만한 생활을 알 수 있는 시(詩)가 하나 있다.
하하하 허허허 웃으며 살자
걱정 않고 웃는 얼굴 번뇌 적도다
이 세상 근심일랑 내 얼굴로 바꾸어라
사람들 근심 걱정 밑도 끝도 없으며
큰 도리는 웃음 속에 꽃피네
나라가 잘 되려면 군신이 화합하고
집안이 좋으려면 부자간에 뜻이 맞고
손발이 맞는 곳에 안 되는 일이 하나 없네
부부간에 웃고 사니 금슬이 좋을시고
주객이 서로 맞아 살맛이 나는구나
아래 위가 정다우니 기쁨 속에 위엄있네
하하하 허허허 웃으며 살자
- 詩 2(한산시집)
靑山見我無言以生(청산견아무언이생)
蒼空見我無塵以生(창공견아무진이생)
解脫貪愛解脫塵埃(해탈탐애해탈진애)
如水如風生涯以去(여수여풍생애이거)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참고) 우리나라에는 고려말 나옹선사(懶翁禪師)가 지었다는 비슷한 글이 있다.
靑山兮要我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愛而無憎兮 (료무애이무증혜)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여수여풍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 한산과 습득의 문답
옛날에 한산이 습득에게 물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비방하고 업신여기고 욕하고 비웃고 깔보고 천대하고 미워하고 속이니 어떻게 대처(對處) 해야겠는가?”
습득이 말했다.
“참고 양보하고 내버려두고 회피하고 견디어 내고 그를 공경하고 그와 따지지 않으면, 몇 해 후에는 그들이 그대를 보게 되리라.”
“그런 것을 비켜 갈 비결은 없는가?”
“내가 언제 미륵보살의 게송을 본 일이 있으니, 들어 보게나.”
늙은 몸이 누더기 옷 입고
거칠은 밥으로 배를 불리며
해진 옷 기워 몸을 가리니
모든 일에 인연을 따를 뿐이네
어느 사람 나를 꾸짖으면
나는 좋습니다 하고
나를 때리면
나는 쓰러져 눕고
얼굴에 침을 뱉어도
마를 때까지 그냥 두네
내 편에선 애쓸 것 없고
저 편에선 번뇌가 없으리
이러한 바라밀이야말로
신묘한 보물이니
이 소식을 알기만 하면
도가 차지 못한다 걱정할 것 없네
사람은 약하나 마음은 약하지 않고
사람은 가만해도 도는 가난하지 않아
한결 같은 마음으로 행을 닦으면
언제나 도에 있으리
세상 사람들 영화를 즐기나
나는 보지도 않고
명예와 재물 모두 비었거늘
탐하는 마음 만족을 모르네
황금이 산처럼 쌓였더라도
덧없는 목숨 살 수 없나니
자공(子貢)은 말을 잘 했고
주공(周公)은 지혜가 빠르고
제갈공명 (諸葛孔明)은 계책이 많고
번쾌(樊快)는 임금을 구했으며
한신(韓信)은 공이 크지만
칼을 받고 죽지 않았던가
고금(古今)에 수없는 사람들
지금 얼마나 살아 있는가
저 사람은 영웅인 체하고
이 사람은 호남자(好男子)라 하지만
귀밑에 흰 털이 나게 되면
이마와 얼굴은 쭈그러지고
해와 달은 북 나들 듯
세월은 쏜 살과 같네
그러다가 병이 들게 되면
머리를 숙이고 한탄할 뿐
젊었을 적에
왜 수행하지 않았던가 하네
병 난 뒤에 지난 일 뉘우쳐도
염라대왕은 용서하지 않나니
세 치 되는 목숨 끊어지면
오는 것은 송장뿐
옳다 그르다는 시비도 없고
집안 일 걱정도 않으며
나와 남을 분별함이 없고
좋은 사람 노릇도 아니 하네
꾸짖어도 말이 없고
물어도 벙어리인 양
때려도 성내지 않고
밀면 통채로 구를 뿐이네
남이 웃어도 탓하지 않고
체면을 차리지도 않으며
아들 딸이 통곡하여도
다시는 보지 못하고
명예와 재물 그렇게 탐하더니
북망산천으로 이웃을 삼네
온 세상 사람들
두 얼이 빠졌으니
그만이라도 정신 차려서
보리의 도를 닦아 행하라
씩씩한 대장부 되어
한 칼로 두 조각 내라
불구덩에서 뛰어나
쾌한 사람 되어 보게
참된 이치를 깨닫게 되면
해와 달로 이웃하리라
* 흰 뼈와 검은 뼈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여러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다가 풀이 무성한 산속에서 땅에 흩어진 사람의 뼈 한 무더기를 발견하고는 정중히 엎드려 절을 하였다. 그때 곁에 있던 제자 아난이 이를 보고 이상하게 여기며 석가모니 부처님께 물었다.
"세존이시여, 삼계의 도사요, 사생의 자부이신데 어찌하여 그런 해골바가지에게 절을 하십니까?"
"아난이여, 네가 출가하여 나를 따른 지 이미 오래인데 어찌하여 아직도 이런 도리를 모르느냐? 저 해골이 전날 내 부모 형제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지금 이 속에는 옛날 나의 아버지의 뼈와 어머니의 뼈가 섞여 있구나."
"무엇을 보시고 어머니와 아버지의 뼈를 구별하십니까?'
"어머니의 뼈는 검고 가볍고 아버지의 뼈는 희고 무겁다. 어머니는 한 번 자식을 낳을 때마다 서말 석되의 피를 흘리고 그 자식을 기르는데 여덟 섬 네 말의 젖을 먹이는 까닭이며, 수태로부터 생육에 이르기까지 뼈를 깎는 고통을 겪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네 가지 은혜가 있으나 부모의 은혜보다 더 중한 것은 없다."
부처님께서는 말을 마치시고 흩어진 뼈를 한곳에 모아 고이 땅에 묻어 주었다.
부모님의 은혜와 사랑을 일깨워 주기 위하여 부처님께서는 그 많은 제자들 앞에서 손을 모으고 뜻을 거두어 해골더미에 공손히 절을 하였던 것이다.
* 홍인과 혜능
혜능대사가 오조 홍인대사로부터 법을 받기 전까지는 글도 모르는 가난한 가정의 젊은이였다.
우연히 장터에서 금강경 강의를 듣고 발심해 홍인대사를 찾아 법을 구하였다.
홍인대사는 그가 큰 그릇임을 첫눈에 알았지만 주변의 시선을 느껴 방앗간에서 방아를 찟는 소임을 주었다. 어느 날 홍인대사는 자신의 대법을 상속할 제자를 선출하기 위해 누구라도 깨달은 진리를 자신에게 제시하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신수대사는 홍인대사가 잘 다니는 벽에 글을 써놓았다.
身是菩提樹 신시보리수
心如明鏡臺 심여경명대
時時動拂拭 시시근불식
勿使惹塵埃 물약사진애
몸은 바로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명경대 같으니
항상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먼지가 끼지 않게 하리라
비록 무기명이지만 신수대사가 아니면 이런 글 쓸 사람이 없다고 대중들은 그의 시를 보고 야단이었다. 방아를 찧던 혜능도 어린 사미승이 이 글을 외우는 것을 듣고 그 전말을 자세히 알았다. 그날 밤 혜능은 한 사미승에게 자기가 구술한 것을 그 게송 옆에 써 달라고 부탁했다.(그는 글을 몰랐다.)
菩提本無樹 보리본무수
明鏡亦非臺 명경역비대
本來無一物 본래일무물
何處惹塵埃 하처야진애
보리는 본디 나무가 아니요
명경 또한 대(臺)가 아니다
본래 아무것도 없었는데
어디서 티끌이 일어나리오
신수대사보다 한층 더 탁월한 이 시를 보고 대중의 논란은 분분했다. 그 때 홍인대사가 이를 보았지만 혜능의 몸에 위해가 있을 것을 두려워해 신을 벗어 그의 게송을 지워 버렸다. 그리고 그날 밤 그의 방에 혜능을 몰래 불러 금강경을 한번 강의하고 달마대사로 부터 전해 받은 가사와 발우를 전수하여 선종 제6조 대사로 인가하였다.
* 무인도에 버려진 형제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승지겁의 먼 옛날에 남인도 마열바질이라는 나라에 장나(長那)라는 장자가 있었다. 그는 마나사라라는 아름다운 부인과 행복하게 살았는데, 조리와 속리라는 이름을 가진 형제가 태어났다. 형이 8살, 아우가 5살 되던 해에 부인이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고, 몇 년이 지나서 장나는 여러 사람의 권유에 못 이겨 새 부인을 맞이했다. 새 부인은 죽은 부인과 모습이 비슷하여 아이들도 좋아했다. 새 부인도 아이들을 불쌍히 여겨 퍽 귀여워 해주었다. 그런데 어느 해 흉년이 들어 양식을 구하기 위해 장나는 이웃나라로 식량을 구하러 갔다.
혼자 남은 부인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만일 돌아오지 않는다면 장차 저 아이는 누가 기를 것인가? 또 앞으로 내 자식을 낳게 되면 남편이 저 아이들에게 먼저 재산을 상속해 줄 것 아닌가. 그러니 두 아이는 큰 장애가 될 것이다."
이렇게 마음이 변해버린 새 부인은 뱃사공을 매수하여 두 아이들을 멀리 갖다 버리도록 시켰다.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무인도에 버려진 형제는 좁은 섬을 미친듯이 뛰어다니면서 부모를 찾았다. 목이 터져라 불러도 들리는 것은 바람소리, 파도소리 뿐이었다. 조리와 속리는 피로가 겹치고 추위에 견딜 수 없게 되었다. 미역을 뜯어 먹으며 살다가 그것마저 구하지 못하자 마침내 굶어 죽게 되었다. 죽음에 이르러서 아우인 속리가 남에게 속아서 비참하게 된 처지를 한탄하였다. 말없이 듣고 있던 조리가 아우를 타이르며 말했다.
"나도 처음에는 세상을 저주하고 사람을 원망했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지 않느냐. 차라리 우리가 다음 세상에 태어날 때는 이 고통을 인연으로 삼아서 우리처럼 비운에 우는 사람을 구원해 주자꾸나. 다른 사람을 위로해 주는 것이 곧 우리가 위로받는 길임을 일찍이 배우지 않았더냐."
이 말을 듣자 아우는 얼굴이 밝아졌다.
속리는 형과 하늘을 우러러 보며 크고 거룩한 원을 세웠다.
"우리는 비록 여기서 죽더라도 다음 생에는 성현이 되고 보살이 되어 우리와 같이 불쌍한 사람을 구원해 주겠습니다. 또 빈곤하고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고 온갖 병을 고쳐주겠습니다."
이렇게 32가지의 서원을 세우고 숨져갔다.
형 조리는 열 손가락을 돌로 쳐 흐르는 피로, 누더기가 된 옷에 부모 잃고 버림받은 어린 영혼을 가슴에 사무친 아픔들을 대비의 발원으로 승화시켜 대비원(大悲願)을 써 내려갔다.
우리 형제가 죽으면 부모 없는 설움으로
슬픔에 젖은 사람에게는 대성자모자부(大聖慈父慈母)가 되고,
외로운 사람에게는 친절한 벗이 되고,
사랑하는 형제가 되며 헐벗은 사람에게는 옷이 되고,
굶주리는 사람에게는 밥이 되고,
병고의 중생들에게 명의가 되고,
양약이 되어 고쳐주고,
부처님을 만나지 못하는 중생에게는
부처님의 몸을 나누어 구제하겠노라
열 손가락이 문드러지도록 저 중생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즐거움을 주겠다는 손고여락(損苦與樂)이 되겠노라고 다짐했고......
열 발가락이 짓이겨지도록 시방세계를 쫓아다니며 고독한 영혼의 고통을 뽑아주고, 외로움을 달래어 기쁨을 주는 발고여락(拔苦與樂)이 되겠노라 발원했다.
바짝 말라 이미 미라처럼 되어버린 아우 속리 가슴에서 흘러나온 32가지 발원도 함께 다 쓰고는, 형제가 꼭꼭 부둥켜안고 대비원을 발원하는 기막힌 생을 마감했다.
외국 갔다 돌아온 아버지가 백방으로 두 아들의 행방을 찾아다닌 끝에 바다를 건너 무인도에 왔을 땐 두 무더기의 하얀 유골뿐이었다. 후처와 작당하여 죄악을 자행한 뱃사공은 호기를 잡은 듯 뺑소니를 치건만 가건 말건 관심 밖의 일로 흘려보내고 자식의 유골을 품에 안고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아버지도 비장한 심경으로 조약돌 사이에 널려있는 어린 자식들의 누더기 천 조각에 쓰인 피의 유서인 ≪대비발원문≫을 보고, 자신의 수족을 모조리 부수어 붓을 삼아 사십팔원의 혈서를 쓰고는, 불쌍한 두 아들의 뽀얀 백골을 찢어지는 가슴에 품고 절해고도에서 한 줌의 흙이 되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아버지는 후일 아미타여래이며, 조리와 속리는 대세지보살과 관음보살이다.
법웅사의 쥐 이야기
쥐 이야기
다가오는 2020년은 경자년(庚子年) 쥐띠해이다. 자(子) 축(丑) 인(寅) 묘(卯)로 돌아가는 십이지(十二支)에서 쥐(子)는 정북(征北)을 가리키는 방위신(方位神)이자 오후11시∼새벽1시이며, 달로는 음력 11월을 지키는 방위신이자 시간신(時間神)이다.
쥐는 형태적 생리적 특성상 발달된 감각 기관과 촉각을 담당하는 긴 수염, 무엇이든 무서운 집착력으로 갉아 먹는 앞니등 환경 적응력 또한 뛰어나고, 재물 영리 근면 다산 풍요의 상징 그리고 뛰어난 예지력 등을 상징한다.
십이지신 중 쥐를 자(子)字로 쓰는 이유는 다산의 상징이기 때문이라고도 하며, 십이지신 중 열두 띠 동물의 으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쥐가 띠 동물의 으뜸이 된 사연은 재미있는 설화가 전해온다.
아주 먼 옛날 하늘의 대왕이 동물들에게 지위를 주려고 했다. 문제는 선발기준, 대왕은 정월 초하루에 제일 먼저 천상의 문에 도달한 짐승부터 그 지위를 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각종 동물들은 저마다 빨리 도착하기 위해 훈련을 했는데 그 중에서도 부지런한 소가 제일 열심이었다. 하지만 쥐는 힘이 약한 자기는 도저히 남들보다 먼저 도착할 수 없다고 생각해 꾀를 냈다. 누구보다 열심히 연습하는 소의 잔등에 붙어 있다가 소가 천상의 문에 도착하는 순간 뛰어내려 1등을 차지했다.
* 풍요와 희망의 상징
쥐띠 해는 풍요와 희망, 기회의 해이다. 쥐해에 태어난 사람은 식복(食福)과 함께 좋은 운명을 타고났다고들 한다. 쥐가 우리 생활에 끼치는 해는 크지만 위험을 미리 감지하는 본능이 있고, 어려운 여건에서도 살아남는 동물이다.
쥐는 역사 속에서 다양한 문화적 표상으로 나타난다. 가야지역에서는 지붕 위의 고양이가 곡식창고로 올라오는 쥐 두 마리를 노려보는 집 모양 토기가 출토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곡식창고나 뒤주의 주인은 쥐였나보다.
쥐는 문화적으로 재물 다산 풍요기원의 상징이며, 미래를 예시하는 영물이다. 쥐는 훔치는 행위가 늘 지탄의 대상이 되는 반면, 그 근면성은 칭찬을 받아 왔다. 아무리 딱딱한 물건이라도 조그마한 앞니로 구멍을 내어놓은 일에서 근면성과 인내력이 감지된다.
쥐는 부지런히 먹이를 모아 놓기 때문에 숨겨 놓은 재물을 지키는 존재로 여겨졌다. 그래서 ‘쥐띠가 밤에 태어나면 부자로 산다.’는 말이 생긴 것이다.
우리 설화에 ‘혼 쥐’ 이야기가 있다. 도둑질을 생업으로 하는 사내가 낮잠을 잘 때, 코에서 팥알만 한 생쥐 한 마리가 기어 나왔다. 이를 바느질하던 그의 처가 보았다. 그래서 이 생쥐를 다리미며, 잣대, 다림질 판 등으로 길을 터 주었다. 그러자 그 생쥐는 복장(伏藏)인 황금더미 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래서 나중에 잘 살았다.
이 이야기에서도 쥐는 도둑과 재물의 연관성을 암시하고 있다.
쥐는 생태학적 특징에서 보듯이 번식력이 왕성하다. 십이지의 자(子)는 玆(자),滋(자)와 동음으로 ‘무성하다’에서 ‘싹이 트기 시작한다’는 뜻으로 싹트려고 하는 ‘만물의 종자’라는 다산(多産)의 상징이 된다. 또한 상자일(上子日) 풍속이나 쥐불놀이, 쥐와 관련된 주문이나 풍속에서 이러한 특성으로 풍요기원 대상으로 인식됐다.
* 쥐와 관련된 세시풍속
정월에 들어 첫째 자일(子日)을 상자일, 일명 ‘쥐날’이라고 한다. 이날 쥐를 없애기 위해 농부들은 들에 나가서 논과 밭두렁을 태우는 쥐불을 놓는다. 논밭에 낸 거름기를 빨아들여서 잡초가 잘 자란다. 이것이 겨울을 맞아 자연히 마르면 여기에 불을 놓아 해충을 제거하고 동시에 불탄 재는 거름이 되어 땅을 거름지게 한다. 또 마른 잡초들을 태워 버리듯이 쥐도 없어지라는 뜻에서 이날 불은 놓는다.
이렇게 함으로써 다음해의 농사가 잘된다고 믿었다. 쥐불놓기는 보름달의 달맞이 풍속과 겸해서 쥐불놀이와 함께 행해지는 일이 많아졌다.
음력 11월은 자월(子月)이라 하는데, 자월의 자일(子日)이나 자시(子時)에는 무슨 일이든 도모해도 이루어지지 않으며 헛수고뿐이고 종국에는 구설, 송사, 파산에 이른다고 믿었다. 자일(子日)에 쑥뜸을 뜨면 무슨 병이라도 고친다고 한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이 자일에 팥죽을 쑤어 먹으면 성격이 수그러진다고 한다.
쥐는 예로부터 농사의 풍흉과 인간의 화복뿐만 아니라 뱃길의 사고를 예시하거나 꿈으로 알려주는 영물로 받아 들여졌다. 쥐에게는 초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지진이나 화산, 산불이 나기 전에 그것을 미리 알고 떼를 지어 그곳에서 도망친다는 것이다. 이러한 쥐의 예지력 때문에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쥐는 예로부터 농사의 풍흉과 인간의 화복과 뱃길의 사고를 예지하여 꿈으로나 행동으로 알려주는 영물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파선이나 난선을 미리 쥐 신이 꿈으로 알려주거나 암시해 준다고 믿었다.
선원들에게는 ‘쥐떼가 배에서 내리면 난파한다’거나 ‘쥐가 없는 배에는 타지 않는다’는 속신(俗信)이 있다. 따라서 쥐의 이변은 미래에 일어나게 될 특수한 사건의 상징적 예시로 보고, 아무런 변고가 없도록 제단을 설치하고 당의 주신(主神)과 더불어 제를 올리고 있다. 해안지역의 쥐 신 신앙은 농작물의 풍년을 기구(祈求)하는 것보다는 뱃길을 지켜 주는 쥐의 효험을 믿었기 때문에 항해의 안전을 위해 쥐 신을 모시고 있다.
* 속담
속담의 소재로 사용된 쥐는 약자, 왜소함, 도둑, 재빠름 등으로 표현되었다. 쥐와 고양이의 관계는 먹고 먹히는 천적으로 흔히 약자와 강자의 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약자로서 쥐는 언제나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자의 마지막 오기로서 강자에게 달려드는 역설도 있다.
쥐가 작거나 하찮음을 비유한 예가 많다. 쥐보다 더 큰 동물과 사물을 대비시켜 왜소함과 하찮음을 더욱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쥐구멍, 쥐꼬리, 쥐간에 이르면 그 왜소함의 표현은 극에 이른다.
그런가 하면 우리 속담에 쥐의 생김새라든지 행동, 습관 등의 생태를 보고 만들어 낸 것도 있다. 여기서도 도적, 왜소함, 약자 등을 표현한다. 특히 재빠르고 약삭빠름에 비김이 많다.
문학 작품에서는 쥐의 모습을 도적이라는 이미지로 많이 묘사했다.
정약용은 이노행(奴行)이라는 시에서 쥐를 간신과 수탈자에 비유했다.
쥐는 구멍 파서 이삭 낟알 숨겨 주고
집쥐는 집을 뒤져 모든 살림 다 훔친다
백성들은 쥐 등쌀에 나날이 초췌하고
기름 마르고 피 말라 뼈마저 말랐다네
들쥐는 백성의 곡식을 수탈하는 지방관리, 집쥐는 궁궐 내에서 국고를 탕진하는 간신배이다. 특히 인의(仁義)에 의한 덕치주의를 표방하는 유교는 국왕의 교화에 의한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한다.
이 시에서는 이런 군주의 정치가 쥐로 표상되는 간신배에 의해 피폐화됨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 옛말에 ‘나라에는 도둑이 있고, 집안에는 쥐가 있다.’는 말과 통한다.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도 있다.
晝語雀聽 夜語鼠聽 (주어작청 야어서청)
晝言雀聽 夜言鼠聆 (주언작청 야언서령)
아무리 비밀스럽게 한 말도 반드시 드러나게 되니 아무도 안 듣는 곳에서도 말조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 질병 치료사 쥐
질병의 온상으로 지탄받아온 쥐는 동물 실험실에서 의학발전의 밑거름이 돼 인류 건강 증진에 기여했다. 우리나라에서 실험용으로 쓰이는 동물은 500만 마리로 추산하는데 이중 70% 정도가 쥐라고 한다. 관리비가 적게들고 몸집이 작아 실험을 하기에 편리하다는 장점 때문이라고 한다. 실험 목적에 따라 감택된 쥐들은 엄격한 관리를 받는다. 습도와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건 기본이다. 또 이 쥐들은 본의 아니게 아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조명을 켜서 밤낮 주기를 일정하게 조절해주는 곳에서 산다.
쥐 종류에 다라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태어난 지 4∼6주된 쥐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마리당 적게는 수 천 원에서 많게는 10만 원대의 가격에 팔리기도 한다.
인류건강을 위해 여러 실험에 이용되며 힘겹게 생을 마감하는 지들에게 인간은 나름대로 예우를 갖춘다. 동물보호법 10조를 보면 동물을 교육, 학술연구, 기타 과학적 목적으로 실험하는 경우에는 가능한 한 고통을 주지 아니하는 방법에 의해야 한다, 동물을 사용해 실험을 행한 자는 그 실험이 종료된 후에는 지체 없이 당해 동물을 검사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또 실험실마다 위령제를 지내 그동안 실험에 사용한 동물을 추모한다고 한다.
<쥐와 관련한 이야기>
* 시골쥐와 도시쥐
‘시골쥐와 도시쥐’는 이솝 우화 중 하나로, 한국어로 번역된 작품에서는 ‘시골쥐와 서울쥐’라는 제목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어느날 시골에 사는 쥐가 도시에 살던 쥐를 초청했다. 두 마리 쥐는 밭에 있던 곡식들을 먹고 지냈지만 도시쥐는 시골쥐에게 이렇게 말했다. "시골쥐야, 왜 이렇게 지루한 생활 속에서 사니? 내가 사는 도시에 한 번 오지 않을래? 그러면 신기한 음식들을 배불리 먹을 수 있어."
시골쥐는 도시쥐와 함께 도시쥐가 살던 도시의 거리로 향했다. 도시의 한 건물에 도착한 도시쥐는 시골쥐가 본 적이 없던 음식들을 보여주었다. 시골쥐는 도시쥐의 답례 덕분에 맛있는 음식들을 먹고 있다고 말했다. 이 때 누군가가 문을 열면서 시골쥐와 도시쥐는 좁은 구멍을 찾기 위해 쏜살같이 달아나 버린다.
시골쥐와 도시쥐가 다시 음식을 먹으려고 하자 또 다시 누군가가 들어오게 된다. 시골쥐는 도시쥐에게 "이렇게 훌륭한 성찬을 준비했지만 위험이 이렇게 많은 것은 질색이야. 나는 밭에서 음식을 먹는 것이 성에 맞아. 그 곳이라면 안전하고 무서운 것도 없이 살 수 있으니까."라고 말하면서 급히 돌아갈 준비를 하게 된다.
* 둔갑한 쥐
사람으로 둔갑하여 주인 행세를 하는 쥐를 물리치는 내용의 설화. 집주인이 함부로 버린 손톱과 발톱을 먹어 온 쥐가 집주인으로 변하여 주인 행세를 하자, 진짜 주인이 고양이를 데려와서 사람으로 둔갑한 쥐를 물리친다는 이야기이다.
신이담(神異譚) 중 변신담(變身譚)에 속하며, ‘진짜 주인과 가짜 주인’, ‘진가쟁주(眞假爭主)’ 등으로도 불린다.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집주인이 함부로 버린 손톱·발톱을 오랫동안 주워 먹은 쥐가 주인으로 둔갑한다. 모든 가족이 가짜를 진짜로 여기게 되었으며 끝내는 원님의 판결로 진짜가 가짜로 몰려 쫓겨난다. 갖은 고생을 하며 떠돌아 다니다가, 원조자의 충고로 고양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다. 고양이가 가짜를 죽이자 쥐로 변했고, 진짜가 다시 주인이 되었다.
비슷한 이야기가 오래전부터 인도에 전해 온다. 주인이 집에 있지 않고 집을 떠난 사이에 변신한 쥐가 주인 노릇을 하는 변이형도 있다. 원조자로 여자가 등장하기도 하며, 원조자가 없이 스스로 고양이를 가져갈 생각에 이르기도 한다.
쥐가 둔갑하여 어린 신랑이나 아들이 되는 변화도 있다. 또한 둔갑하는 원인이 의관을 함부로 방치했기 때문인 경우도 있으며, 며느리가 쥐에게 밥을 먹이는 것과 같은 타인의 실수로 설정되기도 한다.
이 설화에는 사람이 자신이 지닌 것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분별하여 방심하는 사이에 허점이 드러나, 자기 상실에 이르게 되는 것을 경계하는 충고가 담겨 있다.
이 설화에 등장하는 가장 가까워야 할 사람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아내를 두고 ‘쥐 좆도 모른다.’는 속담이 유래하였다. 또한 고소설인 「옹고집전」은 이 설화와 인색한 주인이 동냥 온 중을 학대하는 이야기가 합쳐져서 이루어졌다.
* 은혜 갚은 쥐
옛날에 한 부잣집 노인이 창고 청소를 하기 위하여 머슴을 시켜 벼 가마니를 들어내는데 마지막 한 가마니를 들어내려고 하자, "그것은 그대로 놓아두라."고 하였다.
그래서 머슴이 "그 한 가마니는 무엇에 쓰려고 그러십니까?" 하자, 주인 노인이 "쥐도 먹고 살아야 할 것 아니냐."고 하셔서 그대로 그 한 가마니는 창고에 놓아두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있은 지 몇 해 후 어느 날, 머슴이 마당에 나와서 보니까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그래서 바로 "주인 어른, 좋은 구경거리 있으니 나와 보십시오." 하고는 불렀다.
이에, 부잣집 노인 부부가 방에서 문을 열고 마당에 나와 보니 큰 쥐 한마리가 머리에 쪽박을 둘러쓰고 뜰에서 뱅뱅 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이상하게 지켜보고 있는 순간, 수백 년 묵은 집이 굉음을 내며 그만 폭삭 무너져 내려 앉아 버렸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우리들도 세상을 살면서 부잣집 노인과 같이 더욱 더 여유있는 마음과 말과 행동으로 사람은 물론, 미물 곤충까지도 은혜를 베푸는 자비스런 후덕한 사람들이 되라고 일깨워주고 있다.
더불어, 비록 우리 인간들에게는 부정적인 의미로 각인된 풍요와 다산의 쥐이지만, 한번 입은 은혜는 절대 잊지 않고 기발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끝까지 보은하는 쥐를 통해서 절대로 배은망덕한 사람은 되지 말라는 가르침도 전해주고 있다.
* 사자와 은혜 갚은 쥐
한적한 오후 숲속에서 사자 한 마리가 잠을 자고 있었다.
이 때, 쥐 한 마리가 사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만 사자의 코를 밟고 지나가다가 사자를 깨우고 말았다. 사자는 눈을 뜨자마자 본능적으로 쥐를 사로 잡았다. 쥐는 부들부들 떨면서 살려달라고 빌었다. 사자는 불쌍하기도 하고 작은 쥐를 잡아먹기에는 자존심도 상하고 해서 웃으면서 쥐를 놓아 주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사자는 사냥꾼들이 놓아둔 그물에 걸리고 말았다. 사자는 그물에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지만 오히려 그물에 엉키고 도저히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사자는 희망을 잃고 자포자기하고 말았다.
이때 쥐가 사자의 울부짖음을 들었다. 자신을 살려준 사자의 목소리임을 알아챈 쥐는 사자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쥐는 이빨로 그물을 물어뜯었고, 사자는 뜯어진 그물 틈으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 쥐와 관련된 신화 ·무속 ·상징
쥐는 생활과 밀접한 테두리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한국인의 의식에는 이미지가 여러 가지 형태로 재구성 되어 있다. 가령 함경도 무가(巫歌)인 창세가(創世歌)에서, 천지창조 때 미륵(彌勒)이 탄생하여 해·달·별을 정돈하였으나 물과 불의 근원을 몰랐기 때문에 생식을 해야만 했다. 미륵이 생쥐에게 물과 불의 근원을 물었을 때 이를 가르쳐 준 대가로 이 세상의 뒤주를 차지하게 되었다. 즉, 쥐는 천지창조의 과정에서 현자(賢者)와 같은 영물로 등장한다.
흰쥐가 적진에 들어가 활과 화살을 쏠아 적을 패주하게 하고 죽어 그 쥐를 제사하는 서도신사(鼠島神祠) 전설도 있다. 쥐의 훔치는 행위가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으나 반면에 쥐가 부지런히 먹이를 모으는 근면성이 추장되어 부와 재물의 상징으로 보기도 한다.
쥐는 12지신(支神)에서 자식이라는 뜻의 자(子)로 표시되어 첫 자리에 두었으며 무한히 늘어나는 왕성한 번식력과 관계하여 다산(多産)을 상징한다. 속담신화의 소재로 사용된 쥐는 대부분 도둑을 가리키며, 작거나 하찮음에 비유한 것도 많다.
유교적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하는 사회에서 쥐는 부정한 동물이었다. 특히 정약용은 쥐를 간신과 수탈자에 비유했다. 아함경(阿含經)에서는, 인간의 일생에서 흰 쥐를 낮, 검은 쥐를 밤으로 비유하여 시간을 상징하고 있다.
법웅사의 쥐
앞서 법웅사의 벽화를 소개할 때 누락되었지만, 법웅사의 대적광전 안에는 안수정등도(岸樹井藤圖)라는 벽화가 있다. 지금은 돌아가신 분들을 천도하는 영단(靈駕檀)에 가려져 있다.
안수정등도는 불설비유경(佛說比喩經)에 나오는 안수정등 설화의 그림으로, 우리 사는 인생에 대한 비유적 그림이다.
안수정등의 岸樹(안수)는 '江 기슭의 나무', 즉, ‘절벽 끝의 나무와 같아 폭풍을 만나면 반드시 쓰러지기 때문이다’ 라고 비유한데서 연유하며 이를 하유(河喩)라고 한다.
☞ 이 몸은 마치 험준한 강 기슭에 위태롭게 서있는 큰 나무와 같아서 무너지기 쉽다.
井藤(정등)은 '우물속의 등나무 넝쿨‘ 이란 뜻으로, 인생을 살아가는데 등나무 넝쿨잡고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을 모면하려는 잠시 잠깐 동안에도 황홀한 꿀맛에 취해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인간사를 비유하여 묘사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벌판을 걷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뒤에서 성난 코끼리가 달려왔다.
그는 코끼리를 피하기 위해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한참 달리다 보니, 몸을 피할 작은 우물이 있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우물 바닥에는 무서운 독사가 혀를 널름거리고 있었다. 두려움에 위를 올려다 보았더니 코끼리가 아직도 성난 표정으로 우물 밖을 지키고 있었다. 게다가 어디선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주위를 살펴보니 흰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가며, 칡넝쿨을 갉아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뿐만 아니라 우물 중간에서는 작은 뱀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그를 노리고 있었다.
그는 두려움에 떨면서 칡넝쿨을 잡고서 매달려 있었다.
그 때 어디선가 벌 다섯 마리가 날아와 칡넝쿨에 집을 지었는데, 그 벌집에서는 꿀이 한 방울씩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그 꿀을 받아먹으면서 달콤한 꿀맛에 취해 자신의 위급한 상황을 잊은 채 꿀이 왜 더 많이 떨어지지 않나? 하는 생각에 빠졌다.
해석하자면 여기서 코끼리는 무상하게 흘러가는 세월을, 칡넝쿨은 생명줄을, 흰 쥐와 검은 쥐는 낮과 밤을 의미하며, 작은 뱀들은 가끔씩 몸이 아픈 것, 독사는 죽음, 벌 다섯마리는 인간의 오욕락(재물욕, 식욕, 색욕, 명예욕, 수면욕)을 말한다.
이와 같이 자신의 위험한 처지를 잊은 채 탐욕의 꿀맛에 취해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어리석은 인생인 것이다.
<참고자료>
한 나그네가 아득히 펼쳐진 너른 벌판을 가고 있었다. 나그네는 문득 뒤를 보다가 어마어마한 코끼리가 自己 뒤를 그림자처럼 따르고 있음을 알았다. 여기에서 코끼리는 인생의 무상함을 상징한다. 산더미 같은 그 육중한 코끼리의 발이 자신을 짓밟아 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이 일자, 나그네는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그네가 겁에 질려 도망치는 속력을 낼수록 코끼리도 대지를 쿵쿵 울리며 무서운 속력으로 쫓아왔다.
나그네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일파만파로 증폭되어 요동치기 시작했다. 죽기 살기로 정신없이 달아나다 보니 더 이상 도망칠 벌판이 없었다. 결국 막다른 절벽에 이르고 만 것이다.
비바람을 맞으며 자라왔을 나무 하나가 절벽 끝에 위태롭게 뿌리를 박고 서 있었고 나무를 감아 올라간 등나무 넝쿨 한 줄기가 절벽 아래의 우물로 축 늘어져 있었다. 나그네는 급한대로 등나무 줄기에 메달려서 ‘휴 이제 안심이구나. 저 덩치 큰 코끼리가 감히 이 우물 안까지 쫓아 오겠는가’ 하고 생각하며 안도의 숨을 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안심도 잠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나그네가 매달려 있는 지점의 사방에서 독사들이 혀를 날름거리며 나그네를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는데,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독이 강물처럼 줄줄 흐르고 있었다.
나그네는 아래로 내려가려고 마음먹고 밑을 내려다보았다.
오, 이런, 저 아래 바닥에는 독룡(毒龍)이 시뻘건 입을 벌린 채 위에서 내려오는 먹이를 받아먹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올라가면 저 위에서 지키고 있는 코끼리가 날 밟아 뭉갤것이요, 내려가면 저 아래에서 기다리는 독룡의 입속에 삼켜질 것이다. 여기 가만있어도 독사들이 이빨을 내 몸에 박아 올 것이다.
나그네가 처한 비극적 상황은 여기에 그친 게 아니었다.
등나무 넝쿨을 생명줄로 삼아 우물 중간에 잠시 매달려 있지만, 저 위의 나무 위에선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가며 등나무 넝쿨을 쏠고 있었던 것이다.
안 그래도 허공에 매달린 채 버티며 팔 힘은 다 빠져 가는데, 얼마 안 있어 쥐들이 쏠고 있는 이 넝쿨도 끊어져 바리고 말 것은 자명하다.
그때 문득, 나그네는 달콤한 뭔가가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머리를 들어 위를 쳐다보니, 절벽 위 나무에 매달려 있던 벌집에서 달콤한 꿀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나그네는 엉겁결에 입을 벌려 꿀물을 받아 먹었다.
한 방울, 두 방울, 세 방울, 네 방울, 다섯 방울......
꿀물이 나그네의 벌린 입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나그네는 꿀을 받아먹으며 그동안의 극도의 공포는 잠시 잊고 위안을 받았다.
그래, 이게 인생이야, 뭐 별거 있나?
지금 나 꿀 먹고 있다!
나그네는 독사도, 독룡도, 코끼리도, 넝쿨을 갈아먹는 쥐들도 잊어버린 채 꿀물이 주는 달콤한 환상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순간적인 쾌락에 안주하여 인생의 참된 길을 보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비유적으로 담고 있는 법문이다.
여기에서 광야는 생사를 비유하며, 그 나그네는 범부를, 코끼리는 무상을, 언덕위의 우물은 사람의 몸을, 나무뿌리는 사람의 목숨을 비유한다.
흰쥐와 검은 쥐는 밤과 낮을, 쥐들이 뿌리를 갉는 것은 사람의 목숨이 순간순간 줄어 드는 것을 비유하며, 네 마리 독사는 지수화풍(地水火風) 4大를, 꿀은 오욕락(五慾樂)을 비유한다.
우리가 항상 이와 같이 어디 한 곳 발 디딜 곳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지금을 산다면 현실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인생이란 커다란 망각의 늪에 빠져서도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안수정등의 의미를 바르게 깨닫고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 늘 잊지 않을 때 우린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특히 우리가 떨어지는 꿀방울을 눈, 코, 귀, 입, 촉각의 즐거움으로 비유하는데, 세존께서는 눈, 코, 귀, 입, 촉각의 즐거움을 말하는 이 오욕락이 곧 괴로움이라 하고 오욕의 상태를 벗어나는 것이 해탈임을 강조하셨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위에서 열거한 바와 같이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쳤음에도 당장 입에 떨어지는 달콤한 꿀 한 방울 때문에 모든 것을 잊고 살지는 않는지?
쾌락의 늪에 빠져 있지는 않는지?
남의 손가락질 안 받고 떳떳하게 살고 있는지?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 명예, 부로 행복을 느끼려고 한다.
이러한 물질적인 척도는 한 순간의 행복일 뿐이지 영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진정한 행복은 모든 집착을 버려야 한다.
군자삼락(君子三樂)이란 고사가 있다.
一樂은 부모형제가 무탈한 것이며,
二樂은 하늘을 우러러 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요,
三樂은 영재를 모아 후학들을 가르치는 것이 군자삼락이라고 했다.
사람이 살면서 완벽할 수는 없지만 정도를 지키며 살아가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다시 한 번 법웅사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맺음말
법웅사는 필자와 인연이 길고도 깊다.
흔히 아내를 <옆지기>라고 표현하는 분들이 많은데 필자는 <옆구리>라고 부른다.
소싯적 기억으로는 개그 프로그램에서 살 찐 사람을 <배 둘레 햄>이라고 표현한 적도 있는 것 같은데, 한 번 붙으면 빠지지 않는 게 옆구리살로, 한 번 인연이 되었으니 평생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미로 <옆구리>라고 했는데 정말 평생을 함께 하며 떨어지지 않는다,
철 없던 시절에 옆구리를 만난 곳도 법웅사고, 결혼식을 올린 곳도 법웅사고, 주례를 서 주신 분도 법웅사 군법사로 재직중이시던 권오성법사님이시고, 아이들이 원하는 학교 진학햐기를 기원하는 새벽기도를 6년간 모셨던 곳도 법웅사다.
올해의 마지막 날인 12월31일 자정에는 여전히 제야의 종 타종식이 봉행되고, 동참한 대중에게 떡국공양을 할 것이다. 필자의 불연(佛緣)이 다하여 동참하리라 장담은 못하지만, 새해를 맞는 편안한 밤나들이 정도로 가볍게 들를 수 있는 곳이 법웅사이니 새해 심중소구소원 빌어볼 겸, 숨어있는 문화재 친견도 할 겸, 둘러보시고 새해맞이 떡국 한 그릇 드시면 좋으리라 생각한다.
앞서 <안수정등도>에서 소개한 흰 쥐와 검은 쥐는 어차피 할 일은 하니까 우리네 인생은 흘러간다. 그러니 우리네 인생은 착한 일, 좋은 일 하며 마음에 께름한 일 없이 사는 것이 사는 것이 행복이리라.
아울러 쥐띠 해는 풍요와 희망, 기회의 해이다. 쥐는 문화적으로 재물 다산 풍요의 상징이며 미래를 예시하는 영물이다. 쥐는 생태학적으로는 번식력이 왕성하다.
2020년 경자년(庚子年)에는 독자 제위의 가정에 재물 풍성하고 자손 번창하시기를 기원한다.
일주문을 들어서면서 보이는 법당은 특별해 보이지 않는 건물이지만, 그 속에 담고 있는 것은 우리들의 가장 아름다운 자기다움, 즉 불성을 품고 있다. 단지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불성을 깨닫는 도량의 핵심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도심속의 안식처, 법웅사 대적광전이다.
가급적 개인사는 원고에 기록을 하지 않으려하지만, 모처럼 다루는 법웅사 소식이라 추억에 젖어 언급을 했으니 양해 부탁드린다.
- 원주시 문화관광해설사 難勝 목익상 -
해설문의 : 원주시청 관광과(033-737-5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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