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일이 게 있느냐?』
『예, 여기 있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이 길을 떠날 터이니 자기 전에 준비하도록 해라.』
『예, 스님.』
중국 당나라 곡산의 도연 스님에게서 진성을 닦고 귀국하여 광주 백암사에 오랫동안 주석해온 경양 정진선사(878∼956)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30년 가까이 법석(法席)을 펴온 광주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정진선사는 대중에게 인사를 했다.
『출가 사문이란 본래 운수납자라 했거늘 내 이곳에 너무 오래 머물렀소. 오늘부터 발길 닿는 대로 길을 떠나 법을 펴야 할 자리가 보이면 다시 그곳에 터를 잡아 불법을 전하려 하니 백암사는 여러 대중이 합심하여 법을 널리 펴고 가람을 수호토록 하시오.』
『스님, 그렇다고 이렇게 불쑥 떠나시면 저희들은 어떻게 합니까?』
스님은 대중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상좌 법일을 데리고 만행에 나섰다.
정진 스님의 발길을 자신도 모르게 충청도 땅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마 고향이 공주인 탓인지도 모른다.
『스님, 오늘은 이 마을에서 하룻밤 묵어 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 될 것 같구나.』
백암사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던 정진선사는 충북 청원군 문의면 남계리에 있는 해발 약 80m의 나직막한 고개 아랫마을에서 하룻밤을 쉬어 가게 됐다.
『주인장 계십니까?』
『뉘신지요?』
『지나가는 객승입니다. 길가다 날이 저물어 그러하니 댁에서 하룻밤 묵어 가게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누추하지만 들어오시지요.』
고개 아래 조그마한 초가집 주인은 친절했다.
『옥분아, 스님들이 하룻밤 쉬어 가실 것이니 아랫방을 말끔히 치우도록 해라.』
초가집에는 안주인이 없는 듯 장성한 딸 옥분이와 그 아버지만이 살고 있었다.
옥분이는 다시 밥을 짓고 소찬이나마 정성껏 마련하여 스님에게 저녁 공양을 올렸다.
그날 밤, 편히 잠자리에 든 정진 스님은 참으로 이상한 꿈을 꾸었다. 장마철도 아닌,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가을철인데 남계리 마을에 큰 장마가 진 것이었다. 물은 삽시간에 온 마을을 덮었다. 마을 사람들은 가재도구를 챙겨 피난처를 찾았고 소, 돼지, 닭 등 가축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등 마을은 온통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스님은 초가집 바로 뒤에 있는 언덕으로 올라 동리를 향해 소리쳤다.
『여러분! 가구나 집안 살림 그리고 재산에 연연치 마시고 모두 삽 한 자루씩만 들고 이 고개로 올라오십시오. 만약 재물에 연연하게 되면 목숨을 잃게 되니 제 말을 들으십시오.』
마을 사람들은 갑작스런 폭우 속에 낯선 스님이 나타나 소리를 치니 모두 스님의 말에 따랐다.
스님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흙을 파내 물꼬를 터서 무사히 수마를 이길 수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모두 스님께 합장하며 감사했다.
이튿날 아침 꿈에서 깬 정진선사는 간밤 꿈이 하도 이상하여 폭우를 피했던 고개에 올라가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곳엔 흙을 파냈던 자리가 역력하게 남아있으며, 물이 괴었던 자리가 뚜렷했다.
『이곳이 바로 법당을 세울 명당이로구나. 그러나 천년 후에는 물에 잠길 염려가 있으니….』
그 고개에 절터를 잡으려던 정진선사는 도력으로 천년 후를 내다보고는 다시 길을 떠나 그곳서 멀지 않은 진천 고을에 절을 세우고 법을 폈다.
스님이 떠나고 난 후 이 마을에서는 물이 넘친 곳이라 하여 이 고개를 「무너미고개」, 「수월치(水越峙) 」, 「수여(水餘)」라고도 불렀다.
그 후 천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선사가 묵었던 마을은 「대청댐」이 생기면서 물 속에 잠기게 됐다. 또 무너미고개에는 직경 4m의 도수터널이 뚫려서 대청호의 물을 청주로 흘려보내고 있다.
문의면도 무너미에서 유래된 지명.
정진선사는 신라 경애왕으로부터 봉종대사의 호를 받았으며 그 후 고려 태조와 광조에게 법요를 가르쳤고 광종 2년에는 사나선원에 있으면서 왕으로부터 증공대사란 존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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