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아득한 옛날, 염라대왕이 명부로 사람들을 불러들여 살아서 지은 죄를 심판하고 있었다.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은 지옥으로 보내고, 착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은 극락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한데 염라대왕 앞에 불려나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죄는 조금도 짓지 않고 좋은 일만 했다고 자랑을 늘어놨다. 염라대왕은 생각다 못해 사람의 한 평생을 환히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을 만들었다. 누구든 그 거울 앞에 서기만 하면 사실 여부가 드러나게 마련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비구니 스님이 염라대왕 앞에 서게 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스님은 옷을 입지 않은 발가숭이였다. 염라대왕은 이 해괴한 장면에 눈살을 찌푸리며 호통을 쳤다.
『어이하여 그대는 옷을 입지 않았는고?』
『…….』
고개를 떨군 채 묵묵히 염주만 굴릴 뿐 스님은 말이 없었다.
『어찌하여 옷을 벗었느냐 말이다.』
염라대왕이 다시소리를 치자 스님은 조용히 고개를 들어 입을 열었다.
『아뢰옵기 부끄럽사오나 소승은 평생 게으른 탓으로 몸 가릴 옷 한 벌 없이 예까지 왔습니다.』
『게을러서?… 아무래도 무슨 사연이 있는 게로구나. 여봐라 판관! 게 있느냐.』
『예-.』
『저 여승에게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 것 같으니 거울 앞에 나서게 하여 잘 살펴보도록 해라.』
비구니 스님은 시키는 대로 거울 앞에 섰다.
이때 거울 속에서는 세찬 눈보라가 일고 웬 거지 여인이 속살이 드러난 낡은 옷을 걸친 채 강추위에 몸둘 바를 몰라했다.
이를 발견한 비구니 스님은 자신의 승복을 벗어 주면서 기운을 차리도록 격려했다.
『스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 어떻게 갚아야 좋을는지요.』
여인은 흐느끼며 고마워했다.
이 광경을 본 염라대왕은 기분이 흡족하여 껄껄 웃었다.
『허허 그러면 그렇지. 승려의 몸으로 곡절없이 옷을 벗었을 리가 있겠느냐. 여봐라, 엄동설한에 떠는 걸인에게 자신의 옷마저 벗어준 이 여승은 극락으로 드실 분이니 비단옷을 내어드리고 풍악을 올려 길을 안내토록 해라.』
『예이-.』
이렇게 해서 발가벗은 비구니 스님은 비단옷을 입고풍악이 울리는 가운데 극락으로 들어갔따.
이 일이 있은 지 며칠 후. 열두 사자는 지금의 고성인 안창 땅에서 이름난 부자 하나를 염라대왕 앞에 불러왔다.
『네가 그 유명한 안창 땅 부자렷다.』
『그러하옵니다.』
『그래 네 평생 좋은 일은 얼마나 했으며, 무슨 죄를 지었는지 상세히 일러보아라.』
『제 평생 죄라고는 털끝 만큼도 지은 일이 없사옵고, 좋은 일이야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허허 그래? 그럼 어디 너의 선행을 들어보자.』
『헤헤, 제 인심이 어찌나 후했던지 나라 안 거지들은 모두 제집으로 모였습니다. 그 행렬이 20리도 넘게 줄을 섰다면 대왕님께서도 가히 짐작하시리라 믿습니다.』
『네 말에 한치 거짓이 없으렷다.』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으로 아뢰겠사옵니까.』
『판관은 이 부자를 거울 앞에 세우고 그 행적을 살피도록 해라.』
순간, 거울 속에서는 걸인 두 사람이 굳게 닫힌 대문을 마구 두들기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 못된 부자놈아, 동냥은 못 줄망정 왜 사람을 때리고 문을 잠그느냐?』
『야 이놈아, 동냥을 안 주려면 쪽박이나 내놔라.』
걸인들은 대문을 발길로 차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부자는 그만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음 괘씸한 놈 같으니라고.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감히 그런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늘어놓았느냐. 다음 일을 보여줄 테니 꼼짝 말고 서 있거라.』
염라대왕이 노하여 벽력같이 소리를 치자 판관은 분부대로 부자를 다시 거울 앞에 세웠다. 거울 속에서는 소와 말들이 구슬프게 소리내어 울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저것은 어찌 된 장면이냐?』
『예, 이것은 이 부자가 소와 말을 부려먹을 때만 풀죽을 쑤어 먹이고 놀릴 때는 굶겨 놓은 탓으로 저렇게 슬피 울다가 죽은 것이옵니다.』
염라대왕은 화가 나서 사자들에게 명을 내렸다.
『여봐라, 이놈은 더이상 비춰 볼 것 없이 냉큼 끌어다가 등짝에 지옥 도장을 찍어 떨어뜨려라.』
부자는 뻔뻔스럽게도 억울하다고 발버둥쳤으나 열두 사자들이 달려들어 불이 활활 타는 지옥으로 떨어뜨렸다.
그 후 염라대왕은 「어떻게 하면 인간들에게 죄를 짓지 않도록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를 곰곰히 생각했다.
사람이 죽으면 심판을 받고, 평생 한 일이 그대로 비치는 거울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염라대왕은 궁리 끝에 신하들을 불러놓고 인간세상에다 심판하는 모양을 만들어 보여주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판관들도 사자들도 모두 찬성했다.
『그러면 조선의 명산 금강산에다 심판하는 모양을 바위로 만들어 인간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줄 것이니라.』
이리하여 염라대왕은 금강산 장안사 남쪽에 냇물을 만들고, 이승에서 저승으로 건너가는 냇물이라 하여 황천강이라 명했다.
그리고는 그 냇물 위에 앞뒤의 모양이 똑같은 거울 모양의 큰 바위를 세웠으니 그 바위가 명경대다. 그 앞에는 염라대왕봉이 버티고 서있고 그 옆에는 소머리 모양의 우두봉이 있다. 이는 짐승에게도 죄를 짓지 말라는 뜻에서 세웠으며, 그 좌우로 죄인봉, 판관봉, 사자봉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데 이 모양이 꼭 심판하는 광경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여 누구나 그곳에 가면 마음이 엄숙해진다고 한다.
그리고 금강산 황천강 푸른 물에 씻고 명경대를 비롯 염라대왕봉, 우두봉, 죄인봉 등의 바위를 보고 나면 그 사람의 황천길이 밝아져 극락에 가게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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