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에 들어와 정치이념으로서의 불교의 영향력은 축소되었지만 불교의 사회적 비중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통일기에는 일반대중들의 불교신앙에 대한 참여가 확대되어 불교가 사회 전체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삼국시대의 불교가 주로 왕실이나 귀족들을 중심으로 한 지배층 위주의 신앙체계였다면, 통일 이후의 불교는 지배층은 물론 하층민까지 포함하는 사회 구성원 전체의 신앙으로 발전되었다.
불교 대중화라고 불리는 이와 같은 변화를 주도한 사람들은 통일전쟁기를 전후하여 활동하였던 일군의 승려들이었다. 이들은 왕궁이나 사찰이 아닌 시장과 마을을 다니면서 불교의 가르침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직접 서민적 신앙생활을 보여 주었다. 이로 인하여 일반대중들은 불교를 가깝게 접할 기회를 갖고 자신들의 신앙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진평왕대에 활동한 혜숙(慧宿)은 이러한 불교 대중화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본래 화랑의 낭도에 속하였던 혜숙은 600년에 안홍과 함께 중국 유학을 시도했지만 풍랑으로 실패한 후에는 시골에 숨어 살면서 일반대중들과 함께 수행과 교화를 하였다.
전기에 의하면, 그는 사냥하러 온 국선(國仙)에게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줌으로써 살생을 그치게 하였고, 그의 명성을 들은 국왕이 초청했을 때에는 일부러 여자와 같이 있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지배층보다는 민중 속에 있기를 택했다고 전한다.
혜숙에 이어서 불교의 대중화에 힘쓴 인물로 혜공(慧空)과 대안(大安)이 있다.
혜공은 원래 귀족 집안의 심부름꾼 출신이었지만 타고난 재능을 드러내어 출가할 수 있었다. 교학에 뛰어났고 종종 특별한 이적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출가한 이후에는 작은 절에 살면서 삼태기를 둘러쓰고 길거리에서 춤을 추고 노래하며 일반대중들과 함께 지냈다.
대안 역시 당시 불교계의 대표적인 학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왕궁의 초청이나 호화로운 생활을 거부하고 스스로 미친 척하며 거리에서 일반대중과 어울려 지냈다.
이와 같은 불교 대중화의 흐름을 계승하여 일반인들에게 불교신앙을 폭 넓게 전파한 인물이 원효(元曉)이다.
중급관료 집안 출신인 원효는 출가하여 불교학을 깊이 연구한 이후에 세간과 출세간의 걸림이 없음을 직접 실천하기 위하여 환속하였고, 이후에는 스스로 소성(小姓)거사로 자처하면서 광대들의 놀이도구를 가지고서 수많은 마을과 거리를 다니면서 노래와 춤으로써 불법의 가르침을 전했다. 또한 그는 모든 중생들이 염불을 통하여 극락에 왕생할 수 있다는 아미타 정토신앙을 강조했다. 이러한 원효의 교화에 의하여 미천한 사람들까지도 불교를 알게 되었고, 곳곳에서 ‘나무 아미타불’을 염송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대중적 불교신앙의 발전
불교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퍼지고 개인의 신앙으로서의 성격이 강화되면서 불교신앙의 내용도 대중들의 개인적인 평안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화되었다. 통일기에 가장 성행했던 것은 서방극락에 왕생하기를 기원하는 아미타신앙과 현세의 고통을 덜어 주기를 기원하는 관음신앙이었다.
아미타불에 대한 신앙은 이미 삼국시대에도 행해지고 있었다. 고구려에서는 승려들이 죽은 부모를 위하여 무량수불, 즉 아미타불을 만들어 봉안한 사례가 있고, 백제의 경우에는 현존 유물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일본의 사찰 연기설화에 백제에서 본 아미타불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남아 있다. 신라에서도 자장이 『아미타경소』와 『아미타경의기』를 저술하여 아미타신앙에 대하여 소개했었다.
그러나 삼국시대의 자료에는 아직 서방극락에 왕생했다는 구체적인 이야기들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런데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오면 서방극락에 왕생하기를 기원하는 아미타신앙의 적극적인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실제로 왕생했다는 신앙 사례들도 등장하고 있다. 또한 신앙의 주체도 하층민들을 포함하는 사회구성원 전체로 확대되고 있다. 아미타 불상이 대량으로 만들어진 때도 통일기에 접어들면서부터였다.
통일기의 아미타신앙의 구체적 사례들은 『삼국유사』에 자세히 들어 있는데, 죽은 사람들의 극락왕생을 바라는 것과 직접 염불수행을 통하여 극락에 왕생하는 모습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죽은 사람의 왕생을 기원한 사례로는, 문무왕이 동생인 김인문이 당나라의 감옥에 잡혀 있을 때 무사귀환을 위하여 관음도량을 열었다가 그가 죽게 되자 미타도량을 열어 서방 왕생을 기원한 것, 경덕왕 때에 귀족인 김지성이 죽은 부모의 왕생을 위하여 미륵상과 함께 아미타상을 조성한 것, 그리고 승려 월명사가 죽은 여동생이 극락에 왕생하기를 바라는 내용의 「제망매가」를 지은 것 등이 있다.
직접 염불수행을 통하여 극락에 왕생한 사례로는 포천산(布川山)에서 염불을 하던 다섯 명의 승려가 10년의 수행 끝에 성중(聖衆)들의 인도를 받아 극락으로 날아간 것과 노비인 욱면(郁面)이 간절한 염불실천 끝에 살아 있는 몸으로 곧바로 서방에 날아간 것, 그리고 가난한 농부인 광덕(廣德)과 엄장(嚴莊)이 낮에는 생업을 꾸려 나가면서 저녁에 염불수행을 계속하여 극락으로 왕생할 수 있었던 것 등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백월산에 살던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은 각기 미륵과 미타를 예념하며 수행한 끝에 성불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상의 사례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아미타신앙은 국왕과 귀족에서부터 하층민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신앙된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불교신앙이었다.
아미타신앙이 이처럼 널리 받아들여진 것은 간단한 염불만으로 사후에 곧바로 극락에 왕생할 수 있다고 하는 신앙의 내용이 일반인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교 대중화에 앞장선 승려들이 적극적으로 아미타신앙을 고취한 것도 커다란 역할을 했다고 본다. 원효가 그랬듯이, 그들은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아미타신앙을 통하여 하층민들에게까지 불교를 전파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관음신앙은 아미타신앙과 함께 통일기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신앙이었다. 삼국시대에도 관음신앙에 관한 주요 경전인 법화경이 널리 읽혔고 관음보살상들이 만들어졌지만, 통일기에 들어와서는 구체적인 신앙의 사례들이 보인다. 아미타신앙과 마찬가지로 일반인들에 의한 개인적 신앙이 확대되면서 사회 전반에 널리 유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통일기의 관음신앙의 사례들을 살펴보면, 현실의 어려움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 많다. 신앙의 주체 역시 국왕에서 하층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문무왕은 동생의 무사 귀환을 빌기 위하여 관음도량을 열었고, 효소왕 때에는 국선 부례랑이 북쪽지방에서 납치되자 부모가 백률사의 관음에게 빌어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하였다.
경덕왕 때에 장사하러 배를 타고 나갔던 장춘(長春)은 풍랑을 만나 표류한 끝에 중국에서 노비로 지내게 되었는데 어머니가 민장사의 관음에게 기도한 덕택에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다.
또한 눈먼 아이를 둔 희명(希明)이라는 여인은 분황사의 천수관음에게 기도하여 아이의 눈을 뜨게 하였고, 아들이 없던 최은함은 중생사의 관음에게 빌어서 뒤늦게 아들을 얻게 되었다.
그 밖에도 고승 경흥이 병이 들었을 때에는 관음보살이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나 춤을 추어 병을 낫게 하였고, 낙산사의 토지를 관리하던 조신(調身)은 연모하던 여인과 맺어줄 것을 관음보살에게 기도한 끝에 그녀와 결혼해 사는 꿈을 꾼 후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아미타신앙과 관음신앙은 각기 죽은 사람의 극락왕생과 현실에서의 어려움을 구제하기 위한 신앙으로서 그 역할을 달리하면서 널리 성행하였다. 삼국시대 때 주류를 이루었던 미륵신앙 역시 계속되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신앙 사례는 아미타신앙이나 관음신앙에 비하여 극히 적게 나타나고 있고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이야기나 김지성의 불상 건립에서도 보듯이 아미타신앙과 연결되어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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