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의 불교학에 중요한 획을 그었던 것은 바로 원효(元曉, 617~686년)의 교학이었다. 유식학과 화엄학의 연구자들이 중국에서 배웠거나 중국에서 들어온 이론에 토대를 두고 자신의 사상을 전개해 갔던 것과 달리 원효는 중국의 불교학 이론들과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구축하였다. 그의 교학체계는 신라 불교학의 중요한 흐름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그의 사상은 중국과 일본의 승려들에 의해서도 적극적으로 수용되어 후대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원효는 경주 근처 압량군(현재 경산군 지역)에서 나마(奈麻)의 관등을 갖는 중급관료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십대의 나이에 출가한 후 여러 스승을 찾아다니며 수학했던 그는 진덕여왕 4년(650)에 의상과 함께 중국 유학을 시도했지만 고구려의 해상 봉쇄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송고승전』에서는, 이 때 원효가 무덤 속에서 해골의 물을 마시고 모든 것이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을 깨닫게 되어 중국 유학을 포기했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원효는 중국에서 전래된 경전과 주석서들을 스스로 해석하고 이를 전통적인 교학과 조화시키면서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성립시켜 갔다.
현재 알려진 원효의 저술들을 살펴보면, 그는 그 당시에 연구되고 있었던 거의 대부분의 불교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각각의 사상에 대하여 독자적인 이해를 제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출가자로서의 생활원리에 충실하고자 했던 의상과 달리 원효는 일반 사회의 문제들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통일 전쟁기인 661년 겨울 당나라와 신라의 군대가 고구려를 공격하다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원효는 당나라가 보낸 암호문서를 해독하여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게 하였고, 과부가 된 공주와 결혼하여 설총(薛聰)을 낳아 유학자로 키우기도 하였다.
원효는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 주는 보살의 중생제도와 대중교화를 중시하였는데, 특히 유마거사와 같은 승속불이적(僧俗不二的)인 태도를 중시했다. 원효가 왕실의 공주와 결혼하게 된 배경에는 통일전쟁을 주도했던 왕실과의 공감도 중요하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백성들에게 덕을 베푸는 정치를 강조한 왕실의 모습이 중생제도를 중시한 원효의 사상과 통하는 면이 많기 때문이다.
원효가 처음에 크게 영향을 받았던 불교사상은 반야공관(般若空觀)사상 및 법화와 열반의 일승(一乘)사상이었다. 불교 대중화의 선배였던 혜공과 대안은 모두 반야공관사상의 대가로서 원효는 이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며 반야공관사상을 수학하였다.
그리고 원효는 중국 유학에 실패한 이후에, 의상과 함께 백제 지역으로 옮겨 와 있던 보덕을 찾아가서 열반경을 수학하기도 하였다. 법화경과 열반경은 모든 가르침들이 결국은 하나로 귀결되며, 중생들이 모두 참다운 가르침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일승사상의 대표적인 경전들이었다.
이처럼 원효는 처음에는 반야공관사상과 일승사상을 주로 수학했지만 얼마 후에는 당시 중국에서 성행하고 있던 유식학을 적극적으로 공부하였다. 그는 중국 유학을 단념한 후 중국에서 전래된 저작들을 통하여 유식학의 내용을 깊이 있게 분석하고, 이를 해설하는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원효의 유식학 관련 저술은 14종 40여 권으로, 총 90여 종에 가까운 그의 저술 가운데서도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분야이다.
그런데 유식학은 현상계의 유적(有的) 측면을 분석하고 소승과 대승의 차이를 강조하는 삼승(三乘)의 교학으로서, 원효가 초기에 수학했던 반야공관사상 및 일승사상과는 대립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특히 유식학은 성불할 수 없는 중생이 있다는 오성각별설을 주장하여 모든 중생의 성불을 주장하는 일승사상과는 서로 모순되는 입장이었다. 원효는 이후 이러한 사상적 차이를 해명하고 조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했는데, 그 과정에서 독자적인 사상체계가 형성될 수 있었다.
원효가 반야공관 및 일승사상과 유식학의 사상적 차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주목한 것은 기신론의 사상체계였다.
기신론에서는 일체 존재들은 중생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마음, 즉 일심(一心)의 발현이며, 그것은 심진여문(心眞如門)과 심생멸문(心生滅門)으로 구분되지만, 양자는 동일한 마음의 고요한 측면과 움직이는 측면을 구분한 것으로서 실제로는 하나로 동일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원효는 기신론의 사상을 여러 불교이론을 종합하는 사상으로 평가하였다. 그는 『대승기신론별기』에서 기신론이야말로 “여러 논서들 중에서 우두머리요, 많은 논쟁을 없앨 수 있는 주인이다”라고 선언하였다. 이처럼 기신론을 높이 평가한 원효는 기신론에서 이야기하는 일심을 대승의 핵심사상으로 파악하기에 이른다.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존재들은 일심의 발현과 다를 바 없으며, 그 일심은 모든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이라는 것이 대승사상의 핵심이라고 파악한 뒤, 불법의 목적은 이러한 일심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와 동시에 원효는 금강삼매경을 중시하였는데, 차별이 없는 절대의 진리를 체득할 수 있는 관행(觀行)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금강삼매경의 핵심을 ‘일미관행(一味觀行)’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일미’란 차별이 없는 절대적인 경지를 가리킨다. 여기서 ‘일(一)’은 나누어지기 이전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전체로서의 하나이다.
원효는 『금강삼매경론』에서 금강삼매경의 내용은 기신론의 일심을 체득하기 위한 체계적인 수행법을 제시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이와 같이 원효는 기신론에 입각한 자신의 교학체계에 입각하여 그 의미를 새롭게 해석해 냄으로써 『금강삼매경론』을 공관사상에 그치지 않고 차별과 무차별을 초월한 진리의 본래 모습을 드러내는 사상을 제시한 경전으로 읽어 내었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에서 금강삼매경의 내용은 일승과 삼승, 공관과 유식을 포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원효는 기신론과 금강삼매경에 의거하여, 서로 대립하는 이론들은 진리를 서로 다른 측면에서 이야기한 것으로 이해하여 조화시킨 뒤, 불교의 근본 목적은 차별을 초월한 절대적 진리인 일심을 체득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서로 대립되는 이론들이 실제로는 대립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 원효의 화쟁(和諍)사상은 바로 이러한 입장에서 나온 것이었다.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에서 원효는 그 당시 불교학에서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이야기되는 개념들이 실상은 동일한 진리의 모습을 다른 차원에서 다른 방법에 의해 설명한 것이라고 해명하고, 진리의 참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언어의 개념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효의 사상은 신라의 불교계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 이르기까지 폭 넓게 영향을 주었으나, 그의 사상체계를 그대로 계승한 이들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한편, 신라의 불교가 교학 방면에서 발전한 것은 인쇄술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불국사를 조성하면서 법당 앞에 세운 석가탑에 봉안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은 8세기 초엽 목판으로 인쇄된 경전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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