尋劍堂

통일신라의 불교학 - 원측의 유식사상

難勝 2007. 9. 8. 04:38
 

통일신라시대 교학연구에서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낸 사람은 원측(613~696년)이었다.


전기에 의하면, 원측은 신라의 왕족 출신이었다고 한다. 3세에 출가한 후 10여 세의 나이에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중국에서 여러 유명한 불교학자들의 강의를 들으면서, 범어와 서역 여러 나라의 언어를 습득하는 등 불교학을 연구할 수 있는 소양을 쌓아 나갔다.


젊은 시절에 이미 불교학자로서의 명성을 쌓았던 그는, 645년 현장(玄斡, 600~664년)이 인도에서 유식학(唯識學)을 공부하고 돌아온 이후에는 이를 중점적으로 연구하여 유식학자로서의 위상을 굳건히 하였다. 특히 658년에 황실에 의해 서명사(西明寺)가 개창된 후에는 그 곳에 머무르면서 유식학의 강의와 주석서 집필에 몰두하였고, 노년에는 측천무후의 발원에 의해 추진된 불경 번역사업에 초청되어 증의(證義)의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그의 저술로는 『해심밀경소』, 『성유식론소』, 『유가론소』 등을 비롯한 10여 종이 있지만, 현재 전하는 것은 『해심밀경소』, 『인왕경소』, 『반야심경찬』 등이다. 또한 다른 문헌에서 인용하고 있는 내용을 모은 『성유식론소』의 복원본이 근대에 편집되었다.


원측의 저술 중 대부분은 현장이 번역한 신유식의 경론들에 대한 주석서로서 신유식의 이론을 체계화하는 것이었다. 현장에 의해 소개된 신유식의 이론은 원측에 의해 사상적으로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현장은 경론의 번역에 집중하느라 유식학에 대해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저술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 신유식의 이론적 체계화는 원측에 의해 처음 시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원측은 저술에서 자신이 이전에 수학하였던 구유식인 섭론학과 현장이 소개한 신유식의 이론적 차이를 자세히 분석한 뒤, 신유식의 이론이 보다 합리적이라고 밝히고 있다.


원측의 저술에는 신유식의 비판의 대상이 된 구유식의 이론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이미 구유식의 소양을 가지고 있던 원측이 구유식과 신유식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려는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원측의 제자로는 신라 출신인 승장과 도증이 알려져 있는데, 승장(勝莊)은 원측 사후 그의 부도를 건립했으며, 귀국하지 않고 중국에서 불경의 번역작업 등에 참여하였다.


도증(道證)은 원측이 입적하기 전인 692년에 신라에 귀국하였으며, 그를 통하여 원측의 사상이 신라에 전해지게 되었다. 도증에게는 7종의 유식학 저술이 있었는데 모두 흩어지고, 다만 『성유식론요집』의 단편만이 규기 문도들의 저술에 비판적으로 인용되고 있다. 도증은 이 책에서 성유식론에 대한 원측, 규기 등 여섯 명의 주석을 종합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원측의 해석에 중점을 두고 있다.


도증이 원측의 유식학을 전하기 이전에도 신라에서는 유식학이 연구되고 있었다. 원효는 현장이 번역한 논서의 내용을 이전의 유식학 논서들과 대조하여 종합하려고 노력하였는데, 주로 구유식의 입장에서 신유식을 이해하려는 입장이었다.


백제 출신으로 통일 직후에 활동한 것으로 보이는 의영(義榮)도 구유식의 입장에 서 있었다. 일본 문헌에 인용된 내용에 따르면 그는 신유식의 오성각별설(五性各別說)1)을 강하게 비판하였다고 한다.


경흥 또한 백제 출신으로서 신문왕(681~691년)에게 국로(國老)로서 존경받았고, 10여 종의 유식학 주석서를 저술했지만, 현재는 그 단편만이 전해지고 있어 상세한 사상적 입장을 알기는 어렵다.


의상에게 화엄학에 대하여 질문한 적이 있는 의적(義寂) 역시 원래는 유식학자로 그의 『성유식론미상결(成唯識論未詳訣)』이 도증의 『성유식론요집』에 인용되어 있다.


도증의 귀국 이후에 활동한 유식학자로서는 도륜(道倫)과 태현(太賢)이 있다. 도륜은 『유가론기(瑜伽論記)』 100권을 지어서 중국과 신라 승려들의 견해를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으며, 태현은 20여 종의 유식학 관련 저술을 남겼다. 특히 태현은 후대에 신라 유식학의 조사로서 추앙받았는데, 그의 『성유식론학기(成唯識論學記)』에는 원측과 규기의 견해가 대등하게 인용되고 있다.


* 별도 해설 자료


유식사상은 소승불교의 부족한 교리를 보충하고 용수의 공사상이 후세에 지나치게 공허한 사상으로 치우쳐가는 것을 바로 잡아주고자 나타난 사상으로 우주의 궁극적 실체는 오직 마음뿐으로 외계의 대상은 단지 마음이 나타난 결과라는 불교사상이다.

세친(世親)의 유식삼십송에서 정립된 사상으로 유가학파의 근본 철학인 유식사상은 일반적으로 바깥에 있다고 생각되는 대상들은 인식작용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제8아뢰야식(阿賴耶識)에 저장되어 있는 종자로부터 생긴 것으로 견분(見分)이 상분(相分)을 인연하여 생긴, 결국 자기 자신의 인식수단으로 자신을 보는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대상은 결정적인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인식을 통해 비로소 존재되는 것으로 생각되는 2차적인 현상일 뿐이라고 본다.

유식이란 말은 인간을 중심한 정신과 물질 등 내외의 모든 것은 오직 심식(心識)에 의존하며 심식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즉, 정신과 객관세계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평등하게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정신이 주(主)가 되어 나타난 객관세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