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학과 함께 통일신라의 불교학을 대표하는 것이 화엄학이다. 화엄학은 『화엄경』의 내용에 기초하여 모든 존재의 상호연관성과 부처와 중생의 동일성을 해명하고자 했던 사상으로서 당나라 초기에 지엄(智儼, 602~668년)에 의해서 기본적 이론체계가 마련되었다.
신라의 화엄학은 중국에 유학하여 지엄 문하에서 직접 배우고 돌아온 의상에 의해 성립되었다. 의상(義湘, 625~702년)은 경주의 귀족 출신으로서 10여 세에 출가하여 국내에서 불교학을 연마하였으며, 문무왕 원년(661)에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중국에서는 장안 근처에 있는 종남산으로 들어가 지엄 문하에서 화엄학을 수학하고 지엄 입적 후 문무왕 11년(671)에 신라로 돌아왔다. 귀국 이후 처음에는 자신이 출가했던 경주의 황복사에 머물다가 얼마 후 문도들과 함께 태백산으로 들어가 부석사를 창건한 뒤 그 곳에서 화엄학을 강의하며 지냈다.
의상의 화엄사상은 그가 저술한 『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에 잘 나타나 있다. 『일승법계도』는 화엄사상의 핵심을 7언 30구의 시로 요약한 법계도시(法界圖詩)와 그에 대한 해설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법계도시는 문장의 순서가 상하좌우로 회전하는 반시(槃詩)의 형태를 띠고 있어서 법계도인(法界圖印)이라고도 불리며, 지엄의 입적 직전에 교학의 완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지어 바친 것이라고 한다.
이 책에서 의상은 모든 존재가 본질적으로 서로 원융하며, 부분과 전체, 순간과 영원, 중생과 부처가 동질적이라고 말한다. 현상세계의 차별적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이 실제로는 서로 의지함으로써 각각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실상은 모두가 차별이 없는 중도(中道)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설명하기 위하여 의상은 상즉상입(相卽相入)과 십현문(十玄門), 육상(六相) 등의 이론들을 차용하고 있다. 이것은 지엄에 의해 창안된 화엄사상의 핵심적 이론들이었다. 특히 상즉상입을 설명하기 위한 구체적 논증으로 제시한 수전법(數錢法)은 지엄의 강의에 기초하여 의상이 창안한 것으로 후대 화엄사상의 이론을 설명하는 이론적 틀로서 널리 이용되었다.
이처럼 화엄사상의 핵심을 간명하게 정리하고 있는 『일승법계도』는 실로 의상사상의 요체라고 할 수 있으며, 이후 의상의 문도들은 이 책에 의거하여 화엄사상을 전개해 갔다.
이 밖에도 의상은 『입법계품초기(入法界品抄記)』, 『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 등의 화엄학에 관한 저술이 있다고 하는데, 그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의상은 화엄사상의 요체를 간명하게 정리하고 이를 실천하는 수행방법을 체계화하는 데 힘썼던 반면에, 화엄학을 이론적으로 정리하거나 다른 불교의 이론과 비교하는 데에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의 화엄학 저술들은 모두 간단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고, 오로지 실천을 중시했다는 점이 그 특징으로 꼽힌다. 이는 그와 동문이었던 법장이 화엄학의 이론을 체계화하기 위해서 방대한 저술을 남기고, 다른 교학과 화엄학의 차이를 규명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점이라 할 것이다.
의상에게는 많은 문도들이 있었는데, 특히 진정, 지통, 양원, 상원, 도신, 표훈 등이 유명하였다. 의상의 화엄학은 처음에는 문도들을 중심으로 제한적으로 유포되었지만, 신림과 법융, 표훈 등이 활약했던 8세기 중반 이후에는 불교계의 주요한 흐름으로 확립되었다.
하지만 신라의 유식학자들이 다양한 이론을 공부하고 여러 경전에 주석을 붙였던 것과는 달리, 의상의 문도들은 화엄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고 다른 불교이론들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는 의상의 문도들이 그의 학풍을 전수하여 교학의 체계화보다는 화엄사상의 구체적 실천을 중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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