尋劍堂

통일신라의 불교학 - 신라 후기의 불교계, 교학의 침체

難勝 2007. 9. 14. 04:26

 

8세기 중반 이후 신라사회는 커다란 변동을 겪게 되었다.


혜공왕대(765~779년) 후반에 귀족들의 모반이 연이어 일어나다가 국왕이 반란의 와중에 희생됨으로써 무열왕계의 왕통이 단절되고 중기 왕실은 막을 내렸다.


이후의 신라 후기 150년 동안은 귀족들 사이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이 계속되어 20명의 왕이 즉위하고, 그 중 상당수가 피살당하는 혼란의 시기가 계속되었다. 왕권이 약화된 가운데 귀족들은 자신들의 세력 유지를 위하여 자의적인 수탈을 강화하였고, 이에 못 견딘 백성들은 도적이 되거나 민란을 일으켜 저항하게 되었다.


그 결과, 중앙정부의 영향력은 감소되었고 지방에서는 독자적인 정치세력들이 등장하여 중앙정부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통일기에 제시되었던 정치적 원리는 완전히 붕괴되었고 이를 회복하기 위한 후기 왕실의 몇 차례 시도는 성공하지 못한 채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어 갈 뿐이었다.


신라 후기의 사회적 격변 속에서 불교계도 새로운 모습을 띠게 되었다. 통일기 이후 경주를 중심으로 발전했던 교학불교는 점차 후퇴하고, 선종을 비롯한 실천적인 수행들이 지방을 무대로 하여 발전해 나갔다.


교학의 침체

불교계의 변화는 경덕왕대(742~764년)의 후반부터 나타났다. 그 이전까지 활발하게 진행되던 교학의 연구는 급속히 침체하기 시작했다. 경덕왕대에 원로로서 활동한 태현은 유식학, 화엄학, 기신론 등에 관해 많은 저술을 하였지만, 태현 이후에는 새로운 교학연구나 저작활동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대신에 실천적 수행을 중시하는 불교적 흐름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먼저 그 동안 부석사를 중심으로 실천적 신앙을 중시하고 있던 의상계의 문도들이 중앙 불교계에 등장하여 왕실과 귀족들의 존경과 숭배를 받게 되었다. 경덕왕대 초반까지도 의상의 문도들이 중앙에서 활약한 모습은 보이지 않으며, 중앙에서 화엄학에 대한 이론화 작업을 주도하고 있던 원효와 가귀, 표원 등은 의상의 이론보다는 중국 화엄학자들의 저술과 기신론의 사상을 토대로 화엄사상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런데 경덕왕대에 들어와 의상계의 표훈이 국왕과 재상의 존경을 받으면서 불교계의 중심 인물로 등장하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표훈은 국왕의 부탁을 받고 후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늘에 올라가 천제와 상의했다고 전한다.


재상 김대성(金大城)은 표훈의 강의를 들었다고 하는데, 왕실의 도움을 받아 김대성이 창건한 불국사와 석불사에는 표훈과 함께 같은 의상계인 신림이 초대 주지로 초청되었다.


『삼국유사』에서는 경덕왕대 중반에 태현과 화엄학승인 법해(法海)가 가뭄에 비를 청하는 법력을 겨루어 법해가 승리하였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는 태현으로 상징되는 중기의 교학불교가 쇠퇴하고, 그 대신에 의상계의 화엄학이 대두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해석된다.


이렇게 중앙에 등장한 의상계의 화엄학은 신라 후기에 교학불교의 중심적 위상을 차지하며 발전하였다. 신라 후기에 의상계의 화엄학이 크게 대두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 당시 일본에 전해진 신라 불교학의 내용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의상계의 화엄학과 함께 경덕왕대 후반에 대두된 실천적 신앙으로 진표(眞表)의 미륵신앙이 있다.


진표는 벽골군(현재 김제군) 출신으로 12살 때 출가하여 금산사 순제(順濟) 법사로부터 점찰법을 배운 후에, 미륵으로부터 직접 점찰계법을 전수받기 위하여 변산의 불사의방(不思議房)에 들어가 간절한 참회수행을 시작하였다.


전기에 따르면, 간절히 수행한 끝에 미륵으로부터 점찰계본과 점찰간자 189개를 받았는데, 그 중에서 제8과 제9의 두 간자는 미륵의 손가락뼈로 만든 것이었다고 한다. 그 후에 진표는 산에서 내려와 미륵에게 받은 계법에 의거한 점찰법을 시행하여 많은 사람들을 교화시켰다.


진표 이후 영심을 비롯한 제자들은 점찰법을 계승하여 여러 지역에 사찰을 세우고 교화를 펼쳐나갔다. 그런데 진표가 직접 교화를 펼친 지역, 그리고 진표의 교화가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지역은 대개 과거 고(古)신라의 외곽 지역으로서 수도인 경주에서 볼 때에는 주변 지역이었다. 진표의 불교 역시 당시 중앙의 불교에서 볼 때에는 세련되지 못한 원초적인 신앙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지만, 오히려 변경 지역에 그의 교화가 널리 퍼질 수 있는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을 것이다.


9세기 이후에 진표의 사상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밝혀 주는 문헌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신라 말 후삼국 시기에 궁예가 미륵불을 자칭했던 것은 진표의 미륵신앙을 계승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