尋劍堂

통일신라의 불교학 - 선종의 수용 단계

難勝 2007. 9. 15. 05:10
 

 

신라 후기의 불교계의 가장 큰 변화는 선종의 수용이었다.


선종은 8세기 이후에 중국에서 급속하게 발전하며 불교계의 중심사조로 등장하였는데, 중국에 유학한 승려들을 통해 이 새로운 사조가 신라에도 차츰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9세기 중엽에는 선을 배운 다수의 유학승들이 일시에 귀국하면서 선종은 신라 불교계에서도 주요한 흐름으로 자리 잡았고 특히 새로 등장한 지방 정치세력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교학불교를 능가하는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신라에 선종이 처음 수용된 것은 8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에 유학했던 법랑(法朗)이 중국 선종의 제4조인 도신(道信, 583~654년)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귀국하여 호거산에서 선법을 전한 것이 그 최초이다.


법랑의 선법은 신행(神行, 또는 信行, 704~779년)에게 계승되었다. 신행은 법랑이 입적한 뒤에 중국 유학을 다녀왔다. 그는 제자들에게 선법을 전하면서 먼저 간심(看心)으로서 선을 닦게 한 후 근기가 익으면 방편(方便) 법문으로 가르쳤다고 한다. 이러한 가르침은 북종선의 수행법과 일치한다.


법랑과 신행에 의해 전래된 선법은 신수계통의 북종선으로 후대 중국 선종의 주류가 된 남종선 이전의 선사상이었다. 후대에 중국에서 남종이 선종의 주류로 확립되자 북종선은 급속하게 쇠퇴하였다.


신라에 남종선을 처음으로 전한 사람은 40여 년의 중국 유학을 마치고 헌덕왕 13년(821)에 귀국한 도의(道義)였다.


도의는 북한군(北漢郡, 현재 서울) 출신으로 선덕왕 5년(783)에 중국으로 유학하여 여러 지역을 다니다 강서성 홍주에서 마조의 제자인 서당 지장(西堂智藏, 735~814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서당에게 “진실로 법을 전할 만하다면 이런 사람이 아니고 누구에게 전하랴” 하는 말을 들으며 법맥을 전수받았다. 당시 백장선사는 “강서의 선맥이 몽땅 동국(東國)으로 가는구나”라고 극찬을 하였다고 전한다.


821년 법맥을 전수받고 귀국한 도의는 선풍을 널리 펴고자 하였으나 당시 신라는 교학 중심이라 선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당시의 불교계에서는 경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교외별전, 견성성불을 주장하는 선풍을 이해하지 못하여 도의를 배척하였다. 결국 도의는 설악산 진전사에 은거하고 후일을 내다보며 스스로 수행하면서 소수의 제자들에게 선을 전수하여야 했다. 오늘날 도의국사는 우리나라 선법을 가장 먼저 전수한 분으로 평가되어 한국불교의 대표 종단인 조계종의 종조(宗祖)로 추존되었다.


이처럼 초기의 선종은 아직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만 받아들여졌고, 때로는 기존 불교계로부터 배척당하여 널리 전파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830년대 이후 중국에서 남종선을 수학한 다수의 승려들이 귀국하여 선법을 선양하면서 상황은 크게 변하였다.


중국 불교계에서 선종의 영향력이 증대되는 것이 알려지고 선종에 대한 이해가 점차 확대되면서 선종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선사들의 교화력이 증대되면서 중앙과 지방의 정치세력들도 이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선사들의 활동 모습을 통하여 선종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도의와 마찬가지로 서당 지장의 문하에서 수학했던 홍척(洪陟)은 흥덕왕대(826~836년) 초기에 귀국하여 지리산에서 선법을 펼쳤다. 명성이 알려져 왕실에 초청되기도 하였던 홍척은 국왕 부자의 귀의를 받았으며, 왕실의 도움을 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선찰이 되는 실상사를 창건하고 많은 제자들을 교화하였다.


금마(金馬) 출신의 가난한 상인이었던 혜소(惠昭, 774~850년)는 애장왕 5년(804)에 당나라로 들어가는 사행선의 뱃사공으로 중국에 들어간 후 창주 신감(滄州神鑑)의 문하에서 출가, 수학하였다. 흥덕왕 5년(830)에 귀국하여 처음에는 상주의 장백사에서 교화를 펼쳤는데 점차 대중들이 많아지자 지리산 화개곡으로 옮겼고, 만년에는 보다 넓은 장소를 구하여 화개곡 근처에 옥천사(현재의 쌍계사)를 창건했다. 왕실에서도 그의 교화에 주목하여 경주 황룡사의 승적에 올려 주고 우대했다.


혜철(慧徹, 785~861년)은 삭주(현재의 춘천) 출신으로 부석사에서 화엄학을 공부한 후 헌덕왕 6년(814) 중국에 들어가 서당 지장에게서 선법을 수학하였다. 신무왕 1년(849)에 귀국하여 곡성 태안사에서 교화를 펼쳐 명성을 얻었고 왕실의 귀의를 받았다.


절중(折中, 826~900년)은 휴암군(황해도 봉산) 출신으로 처음에 부석사에서 화엄학을 공부하다가 도윤을 만나 선으로 전향하였다. 전란을 피하여 영월의 사자산에 주석하여 천여 명의 제자를 두었고 왕실의 존경과 숭배를 받았다.


웅진(공주 지역) 출신의 체징(體澄, 804~880년)은 설악산에서 도의의 제자인 염거(廉居)에게 수학한 후 희강왕 2년(837)에 동료들과 함께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자신이 배웠던 선법이 중국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고 곧바로 귀국하여 장흥의 가지산 보림사에서 도의의 선풍을 선양하였는데, 이를 가지산문이라 불렀다. 왕실의 후원을 받았던 그의 문도는 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후 가지산문의 선맥은 고려 말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에게도 이어졌다.


이상에서 보듯 830년에서 840년대에 걸쳐 중국에서 돌아온 선승들은 여러 지역에 산문을 개창하여 적극적인 교화를 펼쳤고, 그 흐름은 제자들에게 이어져 계속 발전해 갔다. 또한 이들 이외에도 지력문(智力聞), 신흥언(新興彦), 용암체(涌岩體), 진구휴(珍丘休), 보리종(菩提宗) 등으로 알려진 선승들도 같은 시기에 각기 산문을 개창하고 선풍을 떨쳤다고 한다.


짧은 기간에 이처럼 많은 선승들이 여러 지역에서 선법을 펼침으로써 선종은 이제 신라 불교계에 확실하게 정착되어 갔다. 불과 얼마 전에 도의가 기존 불교계에 의해 배척되어 설악산으로 은거하였던 것에 비교하면 단기간에 불교계는 커다란 변화를 겪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기간에 활동한 선승들은 대부분 중국에서 마조 문하의 제자들로부터 선법을 수학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그 후 한국의 선사상은 마조의 선에 토대를 두고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선종이 단기간에 널리 확대될 수 있었던 데에는 당시 선사들의 이러한 사상적 동질성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