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윤회의 굴레

難勝 2007. 10. 3. 04:50
 

머리가 파뿌리처럼 흰 노파 하나가 염라대왕 앞에 끌려 나왔다.

『그래 너는 어디서 뭘 하다 왔느냐?』

『예, 신라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다 왔사옵니다.』

『신라 땅이라니, 그 넓은 땅 어디서 살았단 말이냐?』

『예, 경주라는 고을이옵니다.』

『평생 뭘하고 살았는지 재미있는 세상 이야길 좀 자세히 말해 봐라.』

『예, 분부대로 아뢰겠습니다.』

노파는 허리를 굽실거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어린 딸과 아들 하나를 키우느라 평생 고생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래 혼자서 아들딸을 키웠단 말이냐?』

『예, 시집 장가 보내 놓고도 줄곧 집에만 있어 별다른 이야기가 없사옵니다.』

노파의 말에 염라대왕은 싱겁다는 듯 좌중을 한 바퀴 돌고는 한 마디 더 건넨다.

『그래 집 밖 세상은 제대로 구경도 못했단 말이냐?』

『그러하옵니다. 저는 집만 지켰기에 방귀신이나 다름없사옵니다.』

『뭐 방귀신? 이 늙은이 입이 매우 사납구나.』

염라대왕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벽력같이 고함쳤다.

『여봐라! 이 늙은이는 집만 지키는 방귀신이었다니 개새끼가 되어 아들집이나 지키게 해라.』

염라대왕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나졸들은 노파를 끌고 나가 개로 만들었다. 이승에 있는 노파 아들 박씨 집에서는 개 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배가 불러지더니 한 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어쩌면 꼭 한 마리만 낳았을까?』

아내가 예뻐 어쩔 줄 몰라하자 남편도 곁에서 맞장구를 치며 좋아했다.

『고거 참 예쁘기도 하구나. 아무래도 보통 강아지가 아닌 것 같구려.』

이렇듯 내외의 사랑을 받으며 강아지는 날이 갈수록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랐다. 강아지가 커서 중개가 되자 박씨 내외는 집안을 개에게 맡겨두고 온종일 들판에 나가 일을 했다. 대낮에 도둑이 들었다가도 개가 어찌나 사납게 덤벼 들어 물고 늘어지는지 도둑은 혼비백산하여 짚신마저 팽개치고 달아났다. 그러나 신통하게도 동네 사람들에게는 꼬리를 흔들며 더없이 얌전하고 친절하게 반겼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이 개를 영물이라 부르며 귀여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삼복더위에 밭일을 마치고 돌아온 박씨는 갑자기 개를 잡아 먹고픈 마음이 생겼다.

『저걸 그냥 푹 삶아 놓으면 먹음직하겠구나. 거기다 술 한 잔을 곁들이면 그 맛이란….』

박씨는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그는 내일 아침 동이 트는 대로 개를 잡으리라 마음 먹었다. 개를 잡으면 혼자만 먹을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고기 구경을 못한 마누라도 포식을 좀 하게 하고 건너마을 누이집과 고개 너머 딸네집에도 다리 하나씩 보내리라 작정했다.

그러나 자고 일어나 보니 개가 기척도 없이 자취를 감춰 버렸다. 마을 어디 있으려니 싶어 부인을 내보내 찾도록 한 박씨는 콧노래를 부르며 숫돌에 칼을 갈았다. 칼날을 세워놓은 지 한참이 지났으나 개를 찾으러 나간 아내는 점심때가 되도록 돌아오질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박씨는 그만 화가 나서 아내를 탓하며 자기도 찾아나서는데 마침 아내가 마당으로 들어섰다.

『아니 여보, 개는 어떡하고….』

『아무리 찾아도 흔적조차 없습니다.』

『원 빌어먹을….』

아내를 나무라며 개를 찾아 나선 박씨 역시 해질녘 빈손으로 돌아왔다.

누구하나 본 사람조차 없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한편 고개 너머 박씨 딸은 새벽밥을 짓다가 성큼 부엌으로 들어오는 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자세히 보니 친정집 개였다. 반가워서 다가 쓰다듬어 주니 개는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숨겨 달라는 듯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싶어 박씨 딸은 밥을 주고 마루 밑에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개는 다시 눈물을 흘리며 마루 밑에 들어가 꼼짝도 안했다.

며칠 후 박씨 집에 스님 한 분이 들렀다. 스님은 문앞에 선 채 말없이 박씨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아니 스님, 왜 그리 쳐다보십니까?』

『허허, 큰 잘못을 저지르려 하는구려.』

『스님 무슨 말씀이신지요?』

『댁에 분명 개 한 마리가 있었지요?』

『아니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그 개가 며칠 전 자취를 감췄지요?』

박씨는 의아하게 생각되어 스님을 안으로 모셨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마루에 걸터앉은 스님은 뭐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 개는 바로 돌아가신 당신 어머니입니다.

당신 집을 지켜 주려고 개로 환생하여 오셨는데 잡아먹으려 하다니 쯧쯧쯧….』

『아니 뭐 뭐라구요? 개가 어머니라구요? 마… 말씀 좀 자세히 해주세요.』

기겁을 한 박씨는 스님 장삼자락을 잡고 어쩔 줄 몰라했다. 스님은 눈썹하나 까딱 않고 말을 이었다.

『그 개는 지금 재너머 당신 딸네 집에 숨어 있으니 어른 모셔다 효성을 다하도록 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대대로 가운이 멸할 것입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넋을 잃고 서 있던 박씨는 부랴부랴 누이네 집으로 달려갔다. 이 사연을 들은 누이도 펄쩍 뛰었다. 두 사람은 다시 개가 숨어 있는 박씨의 딸네 집으로 줄달음 쳤다.

『어머니 어디 계시냐?』

숨을 턱에 차게 몰아쉬며 다급하게 묻는 이 말에 딸은 영문을 몰라 어안이 벙벙했다.

『아, 네 할머니 말이다. 할머니.』

『할머니라뇨?』

『응, 저기 계시구나! 어머님, 어머님!』

박씨는 마루 밑으로 기어 들어가며 울부짖듯 「어미니」를 외쳤다. 고모를 통해 자초지종의 사연을 들은 딸도 그제서야 눈물을 흘렸다.

『어머님, 전생에 못한 효성 지금이라도 해드리겠습니다.』

박씨는 개를 등에 없어 팔도 유람을 시작, 이름 난 명승고적과 명찰을 두루 살폈다. 그러던 어느 날, 고향 근처에 다다른 박씨는 잠시 쉬다가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잠깐 좋다가 깨 보니 등에 업은 개가 없었다. 사방을 찾아보니 개는 앞발로 흙을 긁어 작은 웅덩이를 마련해 놓고 자는 듯 죽어 있었다. 박씨는 슬피 울며 그곳에 묘를 쓰고 장사지냈다. 그 후 박씨 일가는 가세가 번창하여 부자가 되었다.

경북 월성군 내남면 이조리 마을엔 아직도 이 무덤이 남아 있어 오가는 이에게 효심을 일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