尋劍堂

빈자일등(貧者一燈)

難勝 2008. 5. 13. 06:08

가난하고 천한 여인이 있었다. 여인은 부처가 왔는데도 드릴 것이 없어 슬펐다. 온 종일 굶으며 구걸을 하여 한 푼을 얻었다. 한 푼어치의 기름을 사고 정성을 다해 등을 만들었다. 부처가 지나가는 길목에 작은 등불 하나를 밝혀 놓았다. 밤이 깊어가고 세찬 바람이 불었다. 왕과 귀족들이 밝힌 크고 화려한 등은 하나 둘 꺼졌다. 이윽고 여인의 등불만 남아 홀로 타올랐다. 부처의 제자가 끄려 하자 등불은 더 밝게 타오르며 세상을 비췄다. 빈자일등(貧者一燈). 부자들의 만 등보다 빈자의 한 등이 더 세상을 향기롭게 했다.



번뇌와 무지로 가득한 세상을 부처의 지혜로 밝히려 사람들은 등을 단다. 연등은 올해도 곱다. 그 빛으로 세상은 맑아졌을 것이다. 하지만 사찰에 가면 등에도 등급이 있다. 돈을 많이 내야 크고 화려하다. 등 공양에도 빈부의 차별이 있는 셈이다. 돈이 없는 사람은 여전히 등을 바칠 수 없다. 부처가 세상에 계신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은 없다. 부처가 변할 일은 없을 터이니 여전히 정성을 다한, 간절한 기도가 서린 등불을 보고 미소를 지을 것이다. 요즘 사찰마다 불사(佛事)가 한창이다. 진입로를 넓혀 찻길을 내고, 도량을 높이고, 요사채를 늘려 짓고 있다. 경내에 모신 부처님의 크기로, 탑이나 석등의 규모로 절이 위세를 떨치려 한다. 산사에서는 종일 목탁소리와 염불이 들려온다. 대개는 녹음된 것들이다. 이는 하나의 상징이다. 복제된 것들은 간절하지 않음이니, 사찰 근처의 새들까지 둥지를 떠나가게 만든다. 한국불교도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신도들의 기복신앙과 적당히 타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절은 인간이 무릎을 꿇는 마지막 땅이다. 신이 인간의 미욱함을 품어주는 구원의 공간이며 스님들이 자신을 매질하는 구도의 현장이다. 그래서 가람은 속세와 피안, 고통과 구원, 미망과 깨달음의 경계에 있다. 그런데 요즘 사찰은 그 경계를 허물고 자꾸 인간 쪽으로 내려오고 있다는 느낌이다. 자신의 복만을 비는 속인들의 어리석음을 꾸짖지 않고 탐욕의 크기만큼 부풀어 오르고 있다. 넘치면 스스로 절제하고 모자라면 넉넉해지는 사찰의 본 모습이 일그러져 가고 있다.

 

부처님 오신 날이다. 이런 걱정들을 가난한 여인이 밝혔던 '착한 등불'이 태웠으면 좋겠다.

 

퍼 온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