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金剛經) 강의(6)
4. 妙行無住分
復次須菩提 菩薩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 所謂不住色布施 不主聲香味觸法布施 須菩提菩薩 應如是布施不住於相何以故 若菩薩不住相布施 其福德不可思量 須菩提於意云何 東方虛空可思量不 不也世尊 須菩提 南西北方 四維上下 虛空可思量不 不也世尊 須菩提菩薩 無住相布施 福德亦復如是 不可思量 須菩提菩薩 但應如所敎住
해석(解釋):집착함이 없는 실천(妙行無住分)
"수보리여, 보살은 마땅히 법(法)에 집착하는 바 없이 보시(布施)를 행할지니라. 그것은 형색에 머물지 않는 보시이며 소리․냄새․맛․느낌, 마음의 대상에 집착하지 않는 보시이니라. 수보리여,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하여 형상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보살이 형상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저 동방의 허공을 가히 헤아릴 수 있겠는가?" "세존이시여, 헤아릴 수 없습니다." "수보리여, 남서북방과 상하(上下), 사방(四方)과 그 중간의 방향을 가히 헤아릴 수 있겠는가?" "세존이시여, 헤아릴 수 없습니다." "수보리여, 그와 같이 보살이 형상에 집착하지 않고 행하는 보시의 복덕도 또한 이와 같아서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수보리여, 보살은 오직 가르침대로 실천해야 하느니라."
강설(講說):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이란 불교의 오묘한 법으로 수행한다는 뜻입니다. 묘행(妙行)은 수행(修行)한다는 말이고, 무주(無住)는 마음을 닦을 때 어떤 조건 어떤 법에도 머물러서 집착하고 걸리는 데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일체의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이것이 곧 대승의 진리인데 네 번째로 묘행 무주의 도리를 말한다고 해서 제 사분(第四分)이라 한 것인데 주제는 보시(布施)바라밀입니다. 그 내용의 요의(要義)를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음을 깨치고 성불(成佛)하고서야 비로소 생사를 초월한 것이 아니고, 깨치기 전부터 마음은 안 죽는 것이고 천당지옥(天堂地獄)의 윤회(輪廻)를 하고 돌아다니며 인과응보(因果應報)로 갖가지 몸뚱이를 받아서 깨끗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온갖 것이 다 되기도 했지만 이 마음만은 문둥이도 아니고 재주 있는 것도 아니고 질량(質量)의 변화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일체의 현상계(現象界)에 걸릴 것도 없고 아무런 조건도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학문(學問)․지식(知識)․돈․권력(權力)․육체 생활(肉體生活)등에 얽매어 아무리 애써서 죽도록 해봐도 죽음 앞에 다다르면 다 헛것입니다. 온 세계 권력을 가지고 세계 돈 다 모아 봐도, 또 도서관(圖書館)의 지식 다 알아봐도 제일 큰 인생 문제(人生問題)인 죽음만은 면할 수 없습니다. 하루 밥 세 그릇 가운데 한 그릇이라도 못 먹으면 죽은 뒤에라도 찾아서 먹어야 한다는 것이 세상 사람들입니다.
보살은 이런 마음을 다 쉬라는 것이며, 세 그릇 먹는 것을 두 그릇 먹고 나머지 한 그릇 배고픈 사람 주자, 배고픈 사람 배를 채워 주었으니 복이 되고, 마음을 찾아 생사(生死)도 없어지고 의식주(衣食住)도 필요 없는 사람이 되어 오직 남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이익 되고 저렇게 하면 손해가 클 테니 절대로 그렇게 할 이유는 없다."하는 등의 망상을 버리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런 망상을 지니기 때문에 소위 업(業)이란 게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보살은 보고 듣는 것에 집착하지 않으며, 무심(無心)으로 행하면 하나도 마음에 남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업(業)이 녹는 것입니다.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첫 구절(句節)에 나오는 응무소주행어보시(應無所住行於布施)란 말은 비록 팔만 사천 계율(八萬四千戒律)을 다 지키고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닦고 육도만행(六度萬行)을 하지만 그런 모든 걸 다 마음에 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농사를 뼈 빠지게 짓더라도 그 농사지어 뭘 하겠다는 생각 버리고 그냥 농사만 지어라 장사를 해도 이 돈 벌어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 없이 아무 잡념(雜念) 없이 뼈빠지게 하라, 그래서 아껴 먹고 남는 것은 없는 사람에게 몽땅 다 베풀어 줘라" 그런 뜻입니다. 이런 보살의 보시하는 마음씨와 그 공덕(功德)을 말씀한 것이 이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입니다.
행(行)이란 길을 간다는 뜻이 아니라 수행을 뜻합니다. 묘행(妙行)이란 불법을 수행한다는 의미입니다.
본문:復次須菩提 菩薩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 所謂不住色布施 不住聲香味觸法布施(부차수보리 보살어법 응무소주 행어보시 소위부주색보시 부주성향미촉법보시)
해석(解釋):"수보리여, 보살은 마땅히 법(法)에 집착하는 바 없이 보시(布施)를 행할지니라. 빛이나 모양에 집착하지 말고 보시하며, 소리나 냄새나 맛이나 촉감이나 이치에 집착하지 말고 보시해야 하느니라.
강설(講說):보시는 내적인 수련입니다. 포(布)는 넓다는 뜻이고(普), 시(施)란 베풀어 흩는다(散)뜻이니, 능히 가슴속의 망념과 습기와 번뇌를 흩어버려 사상(四相)이 끊어져서 쌓인 것이 없는 것을 참 보시라합니다. 보시에는 삼시(三施)가 있는데 재시(財施), 법시(法施), 무외시(無畏施)입니다.
보시란 선종에서 “放下着”(놓아버리다)이 참된 보시입니다. 인생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 집착을 놓아 버리는 것이고, 진정으로 놓아 버리는 것 이것이 바로 내보시입니다.
부차(復次)란 '그 다음'이란 뜻으로 첫 번째는 수보리가 어떻게 머무르며, 또 어떻게 마음을 항복시킬 수 있느냐고 물으니까, 부처는 바로 그렇게 머무르고, 바로 그렇게 항복시키라고 하였습니다.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말하셨습니다. 진정하게 수행하는 “보살은 법에 대해 머무는 바가 없다.(菩薩於法 應無所住) 이 마음은 어느 때 어느 곳이든 머무는 바가 없어야 한다.”고....
어법(於法)이라 함은 모든 법이란 뜻이니 언제 어디서나 어느 경우 어떤 환경에서 어느 누구에게나 그런 말입니다.
應無所住 行於布施-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한다. 무엇을 수행이라 할까요? 순간 순간이 공(空)이요 항시 버려, 사물이 다가오면 응하나 지나가면 남기지 않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행하고 나면 잊어버려 마음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좋은 일도 남아 있지 않는데 나쁜 일이야 당연히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나를 욕했다고 했을 때, 그 일 때문에 며칠 동안 잠 못 이루었다면 나는 바로 이 기분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한다고 말을 했는데 그 말을 가슴에 담아 놓고 사는 것도 그 곳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경계에도 머물지 않으면 이 말들은 그냥 바람처럼 스쳐지나 갑니다. 머무는 바가 있으면 영원히 내던져버릴 수 없습니다.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해야 합니다. 보시란 집착없이 나누는 일입니다.
기독교 마태복음 6장3~4절에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란 구절이 있습니다. 이것도 무주상보시의 의미로 생색을 내지 말고 보시행을 하라는 의미입니다. 또 보시(布施)에 시수물삼륜(施受物三輪)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삼륜(三輪)이 공적(空寂)하고 청정(淸淨)해야 한다는 뜻으로, 수레는 여기 있는 물건을 저쪽으로 옮기는 도구(道具)로서 세 가지 바퀴는 첫째 시륜(施輪)․수륜(受輪)․물륜(物輪)을 말합니다. 시륜(施輪)은 남에게 무엇을 주는 것을 뜻하고 수륜(受輪)은 주는 물건 받는 것을 뜻하고, 물륜(物輪)은 주는 사람이 있고 받는 사람이 있으면 주고받는 돈이나 밥이나 물건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주는 사람이 있고 받는 사람이 있으면 빚 갚을 사람이 생기고 빚 받을 사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런 조건 없이 주면 서로 채무관계가 성립되지 않으니 보시는 이렇게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所謂不住色布施 이른 바 색에 머물지 않는 보시인데 무엇을 색이라 하나? 색은 불교 이론에서 “유표색(有表色), 무표색(無表色), 극미색(極微色), 극형색(極逈色)”으로 나누어 말합니다.
유표색(有表色)은 빨강 파랑 노랑 등 세상의 온갖 색깔과, 길고 짧거나 크고 작은 등 바깥으로 드러날 수 있는 모든 것입니다. 우리 육체를 포함해서 지수화풍(地水火風)의 물질세계에서 겉으로 드러날 수 있는 모든 것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무표색(無表色)은 추상적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바깥으로 드러낼 방법이 없는 것. 원자력 같은 것. 원자 에너지 자체는 원래 비어(空)있습니다. 비어 있기 때문에 그 힘은 비할 데 없이 큽니다. 원자력이 존재한다고 하지만 바깥으로 드러내 보여줄 수 없습니다. 정밀한 기계로도 포착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무표색이라 합니다.
극미색(極微色)은 현재의 원자나 원자핵과 같이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습니다. 과학적 도구를 사용하면 볼 수 있습니다.
극형색(極逈色)은 아주 먼 것. 은하계 저 편의 것뿐 아니라 전 우주 속에 있는 어떤 것도 포괄됩니다. 색이란 地․水․火․風의 사대(四大)이며 우리 신체이기도 합니다. “보살은 마땅히 법에 대해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한다.”는 것은 색(色)에 머문 상태에서, 또는 대상을 의식하는 상태에서 보시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보시로 인한 복덕(福德)을 인천복덕(人天福德)이라 합니다. 그런데 복덕과 공덕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금강경(金剛經)에서는 복덕(福德)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중점이 복덕에 있지 공덕에 있지 않습니다. 무엇이 인생에 있어 최대의 복덕일까? 도를 깨닫고 도를 이루는 일입니다. 지혜는 인생 최대의 복(福報)이고, 지혜의 성취란 물론 보통의 지식을 가르키는 것이 아닙니다.
눈을 감고 앉아 염불을 하든, 참선을 하든, 주문을 외든, 모두 색에 머물러 보시를 행합니다. 입으로는 놓아 버린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내버리지 못합니다. 좌선하면 다리가 저려 견딜 수가 없습니다. 왜 견딜 수가 없을까? 색법(色法)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의식이 색신(色身)에 머물러 있지 않다면 아무런 감각을 느끼지 못합니다. 중생들은 이처럼 모두 색신상에서 수행을 하지만 보살은 색신에 머물지 않고 색신을 포함한 일체의 것을 모두 던져 버립니다.
눈을 통해서 집착될 수 있는 객관(客觀), 시각(視覺)의 대상(對象)으로 받아들이는 물질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하여 부주색보시(不住色布施)라 한 것입니다. 여기서 쓰는 빛 색(色)은 빛깔이나 물질의 모양 등 눈으로 볼 수 있는 일체의 객관을 뜻하는 글자이니 부주색(不住色)이란 말은 곧 눈에 끄달리지 말고 보시하라는 것입니다. 귀에 들리는 소리(聲)나 코로 맡는 향기(香)나 혀로 아는 맛(味)이나 몸으로 아는 촉감(觸)이나 어떤 사상․지식․도덕․윤리․신앙․종교 등의 법(法)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不住聲香味觸法布施-소리․향기․맛․감촉․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한다.
수행을 하다보면 천상의 소리가 들리기도 합니다. 자신이 도를 깨쳤구나 느끼지만 그것은 도가 아니라 정신 착란입니다. 소리에 머물지 않아야 한다는 이치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좌선하다보면 향기가 날 때가 있습니다. 사실 향기는 아니지만 본인은 뚜렷이 그것을 느낌니다. 정경(定境)이 극에 이르면 인체 내부가 깨끗해지고 빛나며 또 향기가 납니다. 정말 건강한 사람은 침에서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의학적으로 인체 내부는 더럽혀지지 않습니다. 단지 인체 내부의 것이 외부 공기 혹은 세균과 접촉하면서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좌선을 하고 있을 때 내부에서 향기가 뿜어져 나올 때 내 공덕이 무량해서 향기가 맡게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향기에 머무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머무는 바가 없어야 하고, 있는 바 모든 것을 즉시 놓아 버려야 합니다. -방하착(放下着)
좌선을 하다보면 그만두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처음 앉아있는 사람은 두 다리가 저려 고통스럽겠지만 공부가 익은 사람은 앉아 있는 재미가 있습니다. 이것을 내적으로 접하는 오묘한 쾌감인데 신체 내적으로 아직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기묘한 쾌감에 접하게 됩니다. 그러나 보살의 경계에서는 선정에 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선정에 들다보면 중생 제도를 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법(法)이란 의식의 경계로서 관념이나 생각 또는 정신적인 측면의 것입니다. 신체 외적인 것을 일체 떨쳐버려 완전히 비게 해야 할뿐 아니라 의식의 방면까지도 완전히 떨쳐버려야 비로소 불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색(色)에 머물지 않는 것이 보시오, 소리와 향기 그리고 쾌감과 법(法)에 머물지 않는 보시입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되어야만 비로소 옳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여기까지 말씀하시고 다시, 수보리여! 하고 불러 제자에게 친절하게 또 다른 것을 말해주고자 하십니다.
본문:須菩提菩薩 應如是布施不住於相 何以故 若菩薩不住相布施 其福德不可思量(수보리보살 응여시보시부주어상 하이고 약보살부주상보시 기복덕불가사량)
해석(解釋):수보리여,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하여 상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보살이 상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니라.
강설(講說):대승보살도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이렇게 보시하고 또 수행해야 합니다. 상에 머물지 않아야 하고 일체의 현상을 마음에 남기지 않아야 합니다. 마음속에 어떤 것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그것은 이미 불법을 공부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마치 바람이 대나무 잎을 스치고, 기러기가 허공을 가르듯이 한번 지나가 버리면 그만이듯이, 하늘을 나는 새는 하늘에 어떤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수행인의 흉금은 바로 이래야 한다는 것이고 보시를 행할 때 이렇게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소동파의 시(詩)에
人生到處知何似 인생은 도처에서 무엇과 같다고 아는가
應似飛鴻踏雪泥 마땅히 나는 기러기 눈 밟듯 해야 하리
雪上偶然留指瓜 눈 위에 우연히 발자국 남더라도
鴻飛那復計東西 기러기 날아가면 다시 어찌 동서를 알리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인생은 무엇과 같습니까? 눈 오는 날의 새와 같다고 합니다. 설사 땅에 잠시 발자국을 남기더라도 날아가고 나면 다시 눈이 내려 발자국을 덮어버리면 눈 위에 우연히 남은 발자국은 그 새가 날아간 후 동서남북 조차도 함께 사라져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보살은 응당 상(相)에 머물지 않아야 합니다.
불법을 배우기 참으로 어렵고도 어렵다고 합니다. 호랑이를 그리다 실패하면 반대로 개가되어 버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불법을 배우다 실패하면 무엇이 될까요? 우리는 불법을 배우기 앞서 인간의 도리를 배우야 합니다. 그리고 일단 불법을 배우려고 마음을 먹었으면 상에 머물지 않아야 합니다. 상에 머물면 어떤 것을 배워도 결코 이룰 수 없습니다. 불법을 배우다 실패하면 그대로 중생노름만 할 뿐입니다.
본문:何以故 若菩薩不住相布施 其福德不可思量(하이고 약보살부주상보시 기복덕불가사량)
해석(解釋):왜냐하면 만약 보살이 형상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강설(講說):방금 보시하지만 상에 머물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보살이 만일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만일 보살이(若菩薩) 상에 머물지 않고, 객관의 현상에 대해 아무 욕심이 없이 집착하지 않고 남을 위해 도와주고 보시하면(不住相布施), 그 복과 덕이 한량없이 많기 때문이니라(其福德不可思量) 하셨는데, 가령 농사(農事)를 짓되 추수(秋收)를 해서 내 곳간에만 쌓아 두지 말고 누구든지 배고픈 사람 있으면 먼저 먹으라고 하자는 것입니다.
여기서 복덕(福德)이란 말이 나오는데, 공덕과 복덕은 다릅니다. 공덕은 공을 쌓고 덕을 누적시키는 것입니다. 마치 집을 짓는데 공사과정과 같습니다. 담을 쌓고 기둥을 세우면 공력이 어떤 구체적인 결과로 나타났을 때가 공덕입니다.
복덕(福德)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세상의 복덕인데 이것을 홍복(鴻福)이고, 다른 하나는 청복(淸福)인데 출세간의 복덕이라고 지난번 강의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청복은 홍복에 비해 얻기 어렵고, 세간에서 청복을 얻으면 도리어 적막하고 처량하여 두려워합니다. 상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상(人相)이나 아상(我相)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평안무사하고 청정한 것은 더할 수 없는 복보(福報)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복은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지혜의 성취는 공덕의 성취가 아니며, 모든 것을 던져 버릴 때에야 비로소 지혜의 성취에 이룰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상(相)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할 수 있다면 이런 복덕은 상상할 수 없이 크다고 한 것입니다.
본문:須菩提於意云何 東方虛空可思量不 不也世尊(수보리어의운하 동방허공가사량부 불야세존)
해석(解釋):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쪽 허공을 생각으로 다 헤아릴 수 있겠느냐.? 못하겠나이다, 세존이시여.
강설(講說):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동쪽으로 나 있는 허공은 그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측량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에 수보리는 불가능하다고 대답합니다. 동방으로 나 있는 전체 허공은 너무나 커 사람이 측량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須菩提 南西北方 四維上下 虛空可思量不 不也世尊(수보리 남서북방 사유상하 허공가사량부 불야세존)
해석(解釋):수보리야, 남쪽․서쪽․북쪽과 사방과 아래위 허공을 생각하여 헤아릴 수 있겠느냐.? 못하겠나이다, 세존이시여.
강설(講說):동남서북을 사유(四維)라 하는데 사유 외에도 상하가 있습니다. 부처님은 남방, 서방, 북방, 사유 상하 허공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측량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수보리는 불가능하다고 대답합니다. 만약 이것이 중국 경전이라면 한마디로 “상하와 사방의 허공을 측량할 수 있는가? (六合虛空 可思量不)? 물으니 “불가능합니다. 세존이시여”(不也 世尊)로 끝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두 번으로 나눠 묻습니다. 600권의 「대반야경」에서는 각 방향으로 나눠 낱낱이 묻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동방의 허공을 먼저 지적 했느냐하는 의문이 있을 것입니다. 각 경전을 보면 「아미타경」은 먼저 서쪽을 말하고, 「약사경」․「금강경」은 동쪽을, 밀종(密宗)은 먼저 북쪽을 언급하며, 대광명법은 남쪽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동방은 생기가 일어나는 곳으로 의미하며, 더불어 장생을 원할 때는 동방 유리광세계의 약사여래를 찾아야 합니다. 약사불은 동방세계의 불국이기 때문입니다. 동방세계는 生生不已-끊임없이 태어나는 삶의 법을 말합니다. 동방은 생기의 방향으로 태양이 동쪽으로부터 떠오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아미타경」은 왜 서방일까? 해는 서산으로 지며, 석양은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황혼에 가까우면 집에 돌아가야 하듯이 죽으면 서방정토 극락세계로 간다는 의미로 아미타경은 서방을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경문(經文)에 남서북방 사유상하(南西北方四維上下)라고 한 말들이 곧 그 말씀인데 사유(四維)는 네 간방을 가리킨 말입니다. 허공의 크기가 본래 한계(限界)가 없는 것이므로 얼마나 큰지를 비교할 수 없고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생각이 끊어져서 무심으로 하는 도심(道心)은 헤아릴 수 없고, “나라는 생각(我相)”․“남이라는 생각(人相)”․“중생이라는 생각(衆生相)”․“오래 산다는 생각(壽者相)”이 없어져서 머무는 것 없는 마음으로 아무 조건 없이 중생을 위해 보시하는 공덕은 무한대(無限大)의 허공처럼 생각으로 헤아려 알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한 것입니다.
본문:須菩提菩薩 無住相布施 福德亦復如是 不可思量 須菩提 菩薩但應如所敎住(수보리보살 무주상보시 복덕역부여시 불가사량 수보리 보살단응여소교주)
해석(解釋):수보리야, 보살이 상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도 또한 이와 같아서 생각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으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가르친 그대로 머물지니라.
강설(講說):부처님께서 이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의 결론으로 “보살은 다만 가르쳐 준 그대로 머무르라(菩薩但應如所敎住)”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수보리존자께서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에서 처음에 부처님께 법문(法門)을 청(請)하여 여쭈어 볼 때 "어떻게 마음을 머무르며(云何應住) 어떻게 마음을 항복해야 하나이까(云何降伏其心)"한 물음에 대한 마지막 대답입니다.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불법을 공부하는 사람은 반드시 무상(無相)보시에 이르러 일체의 상(相)에 머물지 않아야 한다고 당부를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아가폐적 사랑”을 말합니다. “아가폐적 사랑”의 진정한 사랑은 “나”가 사라져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상(相)이 없는 집착이 없는 사랑입니다.
왜 사람은 보시를 행하고 자비로워야 할까요? 돈은 있다가 없어지지만 자비로 보시한 공덕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가운데 쌓이고 있습니다. 그 자비심은 나의 삶의 원천입니다. 흔히 금강경이 공(空)을 말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금강경 어디에도 공을 언급한 구절이 하나도 없습니다. 단지 허공을 들어 비유하고 있을 뿐입니다. 또 금강경(金剛經)은 우리에게 단지 상에 머물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머물지 않은 것은 구름과 물과 같은 것입니다.
부처님은 우리에게 하나의 수행법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진정한 불법을 얻기 위해서는 머무는 바가 없으면서도 모든 것을 내 버리지 않는 “보살은 마땅히 배운 바대로 머무는(菩薩但應如所敎住)” 그런 방법에 따라 수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수행이 진정으로 머무는 바가 없는 단계에 이르면 복덕이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장사를 하는데 세 종류의 자금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출자금-처음 장사를 시작할 때 필요한 자금이고, 둘째는 운영자금, 셋째는 비상자금입니다. 그러나 불법을 공부하는데는 단 두 가지 자본만 있으면 됩니다. 지혜의 자량(資糧)과 복덕의 자량(資糧)입니다. 자량이란 자본입니다. 복혜쌍수(福慧雙修)란 말이 있습니다. 돈과 부귀공명도 있으나 지혜가 없고, 어떤 사람은 지혜는 있으나 복이 없다는 말이 있는데, 부처님은 지혜와 복덕이 동시에 갖추고 있습니다. 지혜자량이 원만하고 복덕자량이 원만하면 곧 성불할 수 있습니다.
금강경(金剛經)에서는 진정한 복덕은 바로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수행이란 빗자루와 같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잡념을 모두 쓸어버리고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하는 것입니다. 상에 머물지 않는다는 이 구절이 바로 빗자루인 것입니다. 마음속에 망념이 있을 때 그것을 몽땅 쓸어버리고 이렇게 수행하는 것이 바로 배운 바대로 머무는(如所敎住) 것으로, 마음속이 수시로 공에 이를 수 있어 상에 머물지 않으면서 머무는(不住相而住)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야만 비로소 진정으로 불법을 배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금강경에서도 운하항복기심(云何降伏其心)을 나중 물었으므로 잘난 체하는 아상(我相)과 인상(人相) . 중생상(衆生相) . 수자상(壽者相)을 없애고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마음을 항복하는 것이라고 먼저 말씀하시고 나서, 운하주(云何住)에 대한 말씀을 대답하셨습니다. 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없애지 않고는 마음을 바로 가지고 바로 머무는 일(住)도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항복기심(降伏其心)을 먼저 말씀하시고 운하주(云何住)를 나중에 대답하셨던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열가지든 백가지든 끝에서부터 차례대로 말씀해 주셨으며, 49년동안 이 순서(順序)를 어기신 적이 없습니다.
제삼장 대승정종뿐(大乘正宗分)에서는 먼저 마음을 항복 받는 방법으로서 중생심(衆生心)을 가지고 내가 잘하거니 하는 생각 아예 하지말고 설법(說法)을 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사(第四)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에서 마음을 머무르는 법을 말씀하시기를, “보시를 하되 삼륜(三輪)이 청정(淸淨)하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주(住)하는 방법이 “주(住)하지 말고 하라”는 것이고, 또 만일 “주하지 않는데 주한다”, 그러면 그것 역시 주하는데 떨어진 것입니다. 마음을 주한다 함은 우리말로 마음 먹는다는 소리인데 “이렇게 마음을 먹어라”하는 말도 마음먹지 말라는 소리입니다. 곧 열반을 향해서 보시를 꾸준히 행하라, “내가 본래 부처이니 부처의 행동을 그대로 흉내내라”는 것입니다.
아무 조건 없이, 어디에고 이끌림 없이, 남을 위한다는 생각 없이(應無所住) 남을 도와주고 보시를 행한다면(行於布施) 큰 보람으로 전지전능(全知全能)한 능력을 내어 큰 공덕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에 머무름 없이 부주상으로 보시(不住相布施)하면 그 복덕이 한량없이 많아서 생각으로는 헤아려 볼 수 없는 무한대한 복덕을 얻게 된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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