尋劍堂

금강경(金剛經) 강의(13) - 11. 無爲福勝分

難勝 2008. 7. 2. 05:01

                           금강경(金剛經) 강의(13)


11. 無爲福勝分

須菩提 如恒河中所有沙數 如是沙等恒河 於意云何 是諸恒河沙 寧爲多不 須菩提言 甚多世尊 但諸恒河 尙多無數 何況其沙 須菩提 我今實言告汝 若有善男子善女人 以七寶滿爾所恒河沙數三千大千世界 以用布施 得福多不 須菩提言 甚多世尊 佛告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於此經中 乃至受持四句偈等 爲他人說 而此福德 勝前福德


해석(解釋): 무위복승분(영원한 복덕)

"수보리야, 갠지스 강의 모래알만큼 많은 갠지스 강이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모든 갠지스 강에 있는 모래알이 많지 않겠느냐?" "매우 많겠습니다. 세존이시여, 다만 갠지스 강만 하여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인데 하물며 그 모래알이겠습니까?" "수보리야, 내가 이제 사실대로 네게 말하노니,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일곱 가지 보석을 그곳 갠지스 강의 모래알 수만큼 많은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히 채워서 보시하면 복을 얻는 것이 많지 않겠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매우 많겠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에서 네 구절만 익혀 지녀 다른 사람에게 설해 준다면 그 복덕이 앞의 일곱 가지 보석을 보시한 복덕보다 훨씬 나으리라." 


講說(강설):

무위복이란 인연에 따라 증감(增減)되지 않는 절대성이 있는 복으로 해탈과 열반을 얻는 복입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는 유위복과는 그 성질이 완전히 다릅니다. 물질적인 재보시를 아무리 많이 해도 무위복을 따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갠지스강의 모래수를 제곱한 수만큼의 많은 세계에 칠보의 보석을 보시하는 복과 경의 네 구절을 익혀 지니는 복을 비교하여 무위복의 수승함을 말했습니다. 무위란 원래 범어 아․사라크르타(asarhakrta)를 번역한 말로 인연에 의하여 조작되는 것이 아니고 생멸 변화를 여윈 상주절대의 법을 가리키는 말로 열반과 같은 뜻을 지니는 말입니다. 이는 곧 진여의 세계로 여기에 들어가면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복을 무위복과 유위복으로 나눈 것은 세상에서 추구하는 오복(五福) 등은 윤회를 따를 뿐 해탈을 얻는 요인이 되지 못하는 반면 무위복은 위없는 정각들을 얻어 해탈을 누리기 때문쉐 무위복 성취가 불교 수행의 주목적임을 밝히고자 함입니다. 불교 수행에 있어서 유위복은 때로 수행을 방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합니다. 복을 누리는데 안주하여 보리심을 일으키기가 어렵게 되며 무위복의 가치를 모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십이장경에는 호세학도란(豪勢學道難)이라 하여 부귀와 세도를 누리는 이들은 도를 배우기가 어렵다 했습니다. 또 참된 수행자는 세상의 복을 원수처럼 본다는 말도 있습니다. 삼생(三生)의 원수라는 말이 있는데 한 생은 복을 짓느라고, 한 생은 복을 누리느라고, 한 생은 복이 다하여 빈천해져 도를 닦지 못한다는 데서 유래된 말입니다.


본문:須菩提 如恒河中 所有沙數 如是沙等恒河 於意云何 是諸恒河沙 寧爲多不 須菩提言 甚多世尊 但諸恒河      尙多無數 何況其沙

해석:"수보리여, 항하(恒河)의 모래알 수같이 많은 항하가 있다고 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모든 항하의 모래가 얼마나 많다고 하겠는가?"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단지 모든 항하만 하더라도 이미 헤아릴 수 없거늘 하물며 그 모래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강설(講說):"수보리여, 항하(恒河)의 모래알 수같이 많은 항하가 있다고 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모든 항하의 모래가 얼마나 많다고 하겠는가?"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단지 모든 항하만 하더라도 이미 헤아릴 수 없거늘 하물며 그 모래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이번에는 '항하의 모래가 많으냐 적으냐'하고 물으십니다.  항하(恒河)는 지금의 인도 갠지스강을 말하며 중국의 황하(黃河)과 미국의 미시시피강과 같은 세계적인 큰 강 가운데 하나입니다. 지금 부처님은 갠지스 강의 모래 수는 얼마나 될까 하는 문제를 제기합니다.

모래는 아무리 손아귀 힘이 센 사람이라도 모래를 잡으면 손가락 사이로 전부 빠져 버리고 땀 네 붙은 모래만 남는다고 합니다. 쥘 수가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먼지가루처럼 잘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래의 수는 생각해 볼 수도 없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이 항하강의 모래가 얼마나 많으냐, 많지 않으냐.' 그것을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릴 때는 셋을 손가락으로 몇 번 곱아 보고서야 알지만 좀 커지고 나서는 척 보면 대번에 알 듯이 나한님들은 욕심이 없어져서 마음이 맑아졌고 도가 높아졌으므로 현상계를 한 번 보면 다 아시는데 수보리존자는 나한 중에서도 제일 가는 나한이므로 항하강의 그 모래 수가 셀 수도 없이 많은 수지만 한 생각에 알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도 항하강에 가득한 모래 수와 같이 많은 항하강이 또 있다고 하면, 그 모든 항하의 모래 수는 얼마나 되겠느냐?’하고 부처님께서 물으십니다. 수보리 존자께서 여쭈었습니다. ‘참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단지 한 항하의 모래수도 그 수가 한량없는데 그렇게 많은 항하의 모래수는 이루 다 말할 수나 있겠습니까.’ 만일 전 인류가 다 모여서 한 항하의 모래 수를 손으로 헤아린 다고 하면 백년을 세더라도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모래 수만 한 항하강의 모래는 무한수(無限數)일 것이므로 많다고 하신 것입니다.


본문:須菩提 我今實言 告汝 若有善男子善女人 以七寶 滿爾所恒河沙數 三千大千世界 以用布施 得福多不

     須菩提言 甚多 世尊

해석:"수보리야, 지금 내가 그대에게 진실로 이르노니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저 항하의 모래알 수만큼이나 많은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칠보를 가지고 보시한다면 그 얻는 바 복덕이 많다고 하겠는가?"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강설(講說):"수보리야, 지금 내가 그대에게 진실로 이르노니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저 항하의 모래알 수만큼이나 많은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칠보를 가지고 보시한다면 그 얻는 바 복덕이 많다고 하겠는가?"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위 내용에 이어 다시 문제를 제기합니다. 내가 이제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주겠는데, 가령 지금 세상에 남녀를 불문하고 인간사회에서 가장 귀중한 칠보(七寶)로써 갠지스 강의 모래 수만큼이나 많은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울 그런 칠보로써 남김없이 보시하여 중생을 구제한다면, 그대 생각에는 이 사람의 복이 많겠는가 많지 않겠는가? 그가 얻을 수 있는 선의 응보가 많겠는가, 많지 않겠는가? 작은 일이지만 남이 목마를 때 찬물 한 그릇만 떠 주어도 그 공덕으로 세세생생에 큰복을 받는다고 하는데 이런 굉장한 칠보를 보시를 보시로 다 주었으니 그 복덕이 얼마나 많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수보리 존자께서 물론 아주 많을 겁니다. 그렇게 선한 일을 행한다면 복보는 대단히 클 겁니다. 하고 사뢰었습니다.

복에는 무루복(無漏福)과 유루복(有漏福)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유루복은 복이 다하면 바닥이 나는 새는 복이고, 무루복은 새지 않는 한량없는 복입니다. 상(相)이 있는 복은 유루복이고, 무주상(無住相)하면 무루복입니다. 그런데 수행자는 복(福)은 삼생(三生)의 원수라고 합니다. 복 짓느라고 한생을 보내고, 복 쓰느라고 한 생을 보내고, 복을 다 쓰고 나면 박복하여 한 생을 보내게 됩니다.


본문: 佛告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於此經中 乃至受持 四句偈等 爲他人設 而此福德 勝前福德

해석:“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 속의 사구게 등을 배우고 외워서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해준다면 이 복덕이 앞의 복덕 보다도 뛰어나리라.”


강설(講說):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 속의 사구게 등을 배우고 외워서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해준다면 이 복덕이 앞의 복덕 보다도 뛰어나리라.”

부처님께서 다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일 어떤 착한 남자나 착한 여인이 이 금강경 가운데 사구게(四句偈)만 받아 가졌다가 남을 위해 해설해 주면, 예컨대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나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등의 법문(法門)을 제대로 일러주면 그 복덕은 앞에서 항하의 모래수처럼 많은 삼천대천 세계에 가득한 칠보를 보시한 것보다도 그 공덕이 훨씬 더 크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구게의 중요성을 모릅니다. 마치 보물의 가치를 아는 사람만 알고 모르는 사람은 마치 돌과 같이 여깁니다. 같은 보석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는 것은 안목입니다. 그 안목을 가지려면 깨달아야 합니다. 수승하고 다함이 없는 무위복을 깨달으려면 먼저 알아야 합니다. 경 공부도 하고, 참선도 하고, 염불도 해서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수행을 해야 하는데 수행의 단계를 문(聞)사(思)수(修)로 나눕니다. 일단 많이 듣고 보고 배워야 합니다. 그 다음 배워 알게 된 것을 토대로 정진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많이 보고 많이 생각하여 꾸준히 닦아 가는 것입니다. 완전무결한 진리와 복을 추구하고 가치를 깨달아 가는 것은 바로 영원한 평화와 행복을 보장받는 길입니다. 끝없이 정진하고 수행하면서 보다 더 넓고 더 깊은 세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부처님의 일화에 아나율존자는 눈이 멀어 옷이 헤어져 그것을 기우려고 하는데 바늘에 실을 꿰려고 하는데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가 나를 위해 복을 지어줄 사람이 없는가? 바늘귀를 꿰어 주는 조그만 복을 지어줄 사람이 없겠는가?” 하고 중얼거렸습니다. 그 때 마침 지나가는 사람이 바늘귀에 실을 꿰어 주었습니다. 그때 아나율존자는 이 사람이 부처님이라는 사실을 직감하고 놀랬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 여쭙니다. “제가 도반들에게 조그만 복을 짓게 하려고 했는데 부처님께서 하찮은 복을 지으려 하십니까?”하고 말씀드리니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는 나보다 더 복을 짓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행복을 위해서 나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는 복을 지으려는 사람도 많지만 있는 복을 그냥 까먹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행복하게 살려면 열심히 복을 지어야 합니다. 부처님 같이 복이 많으신 분이 없는데 부처님은 끊임없이 복을 짓고 열심히 정진하십니다. 우리는 편안하면 그만 복 지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끝이 없습니다. 나 자신의 행복과 이웃의 행복을 위해서 자기 희생이 없으면 되지 않습니다. 나의 조그만 희생이 있을 때 행복이 나에게서 이웃에게 전해집니다.

또 사구게(四句偈)는 어디에도 주(住)하지 않는 청정한 마음입니다. 여기서 청정한 자기 자성을 깨달아서「응무소주 이생기심」으로 산을 대할 때나 물을 대할 때나 큰 사람이나 작은 사람을 대할 때 크다 작다 분별이 없으며 산이나 물이나 분별이 없이 대합니다. 육도만행(六道萬行)을 행해도 무심으로 하고 모든 것을 다 하는 것 없이 하는데, 결국은 부처님께서 자꾸 금강경 수지 독송하라고 하시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남에게 이 정법(正法)을 해설해 주는 것이 참말로 그 사람을 영원히 위하는 것이고 그게 참말로 자기의 마지막 복과 지혜를 성취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물질도 보시하고 몸뚱이도 보시한다고 해도 이 경전에 대한 것을 일러 준 것만 못하다고 한 것입니다.

금강경에 보면 사구게(四句偈)를 잘 수지해야 한다고 합니다. 수지(受持)란 불법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여 변화가 생겼을 때 비로소 받아들였다(受)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영원히 그 상황, 그 경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만 ‘수지’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금강경을 암송하는 것을 수지라고 생각하는데 뜻을 모른다면 그것은 읽는 것에 불과합니다. 만약 경전의 핵심을 이해했다면 식사를 할 때 영양분은 섭취하고 찌꺼기는 버리는 것과 같이 강을 건너는 배와 같이 이미 강을 건너고 나면 배는 쓸모 없듯이 금강경을 다 외우는 것과 상관이 없습니다. 진정으로 이해를 했을 때 수지(受持)라 할 씁니다. 또 사구게(四句偈)를 진정으로 깨우쳐 받아들이고 또 경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또 다른 사람을 교화하고, 또 다른 사람을 위해 해설한다면 이 사람의 복은 전 우주에 가득 찬 재화로 보시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입니다. 또 금강경안에 사구게가 단지 하나에 그치지 않으며 경전 속에 좋은 구절은 모두 사구게로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환자의 병을 고치는 처방전과 같아 만약 병이 다 낫고도 처방전을 놓지 않으면 그 사람은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합니다. 불법을 배우고 닦는 결과가 바로 무위의 열매입니다. 무위는 산스크리스트로 열반(涅槃)입니다. 열반이란 곧 무위의 도이고 최상승의 도입니다. 진정한 도는 무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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