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서력 기원 약 150~250년 경 남인도 사람으로 『중론』을 비롯하여 중관사상을 천명한 많은 저술을 남긴 사람은?
① 용수 ② 마명 ③ 아난 ④ 무착
"중관사상"이라는 것은 즉 중도 사상, 용수, 인도어로는 나가르쥬나의 사상입니다.
반야경을 중심으로 해서, 초월적인 불교사상을 정립하는 과정입니다.
공을 중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초기 불교는 본래 경험적인 것이었습니다.
석가는 형이상학적인 우주적 질서, 혹은 그러한존재를 상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인간의 현실적 감각경험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있는 그대로의질서를 포착하려 하지요.
물론 이것이 다 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중도라는 것은 불상견과 손익견 사이의 중간자를 취함입니다.
용수에게 있어 네 가지 인과관계의 개념을 다루고, 그것이 존재한다는 실체론과,
그것이 형이상학적인 질서 속에 존재한다는관념론 모두를 반박하기 위함입니다.
용수의 개념화가 초월적이라는 것은 그가 비경험적인 형이상학적 실재를 논하는
것이 목표여서가 아니라 절대적인 유일한 실재를 나타내는 변증법적인 개념적
장치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현실의 경험계, 즉 관습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인과관계는 존재하는 것 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입장, 형이상학적인 실재에서 보자면 인관관계는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지요..
이처럼 현실적인 입장과, 형이상학적인 입장 모두를 취하는 관점이 바로 나가르쥬나(용수)의중도 사상입니다.
만물의 원인은 인과적으로 얽혀있되 그것은 인과적인 실체가 아니라,
모든 것이 상대적, 의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죠.
고로 이것이 의타기성이라는 것입니다.
이른바
"불생불멸(不生不滅)
불상부단(不常不斷)
불일불이(不一不異)
불래불거(不來不去)"가
"팔부중도"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중도의 이치는 모든 법이 본래부터 자성이 없이 갖가지 인연을 통해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연기법(緣起法)에 근거하여 설해진 내용입니다.
인연에 의해서 나타난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는 공한 것으로 양변을 여의었고. 그러므로 중도는 곧 연기의 법이며 공한 법이며 일체의 차별과 대립을 떠난 적멸의 법입니다.
여기에 근거해서 우선 불생불멸은 지혜로운 자의 입장에서 볼 때 모든 법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질계건 정신계건 망념된 중생의 차원에서 볼 때에는 일어남이 있고 사라짐이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상은 거짓모습이라 생멸이 끊어졌다고 말합니다.
다음의 불상부단은 모든 법은 영원함도 끊어짐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생각하기에 이 세상에는 영원히 지속되는 것들이 있고 반대로 순간적으로 끝나는 것들이 있다고 여기기 쉽지만 그 역시 치우친 견해로 망념된 마음의 소산일 뿐 이라고 합니다.
다음의 불일불이는 모든 법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서로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이 본질적으로는 하나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또 서로서로는
완연히 다르다고 주장하기도 하지요.
그 또한 잘못된 소견들로 중도의 이치를 등졌기 때문에 이같은 편견을 짓는다고 합니다.
마지막 불래불거는 모든 법은 어디로부터 온 바도 없고 어디를 향해 간 바도 없다
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왔다가 저곳으로 가는 것이 모든 존재들의 흐름같지만 그것역시 형상에
집착하는 망념된 마음에서 그렇게 보일뿐 실지로는 움직임이 없다고 합니다.
이렇게 설명은 했지만 이와같은 팔부중도를 우리들로서는 상당히 이해하기 힘듭니다.
비유를 든다면 바다와 거품에다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체적인 바다의 입장에서 볼때 한방울의 거품이 생겨나고 없어지지만 바다 자체
에서는 생겨나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습니다.
또 거품은 항상 흰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 거품의 물이 아주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또 거품과 바다가 같은 것 인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것이 바닷물이 인연을 만나 거품이라는 다른 현상을 일으 킨 것입니다.
그럼 반대로 거품과 물이 아주 다른 것이냐 하면 절대 그럴수는 없습니다.
거품은 물로부터 일어났기 때문이지요.
이는 거품이 왔다거나 갔다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바다의 입장에서 볼때 거품은 가고 온 곳이 없습니다.
바람을 따라 왔건 바람을 따라 갔건 그것은 하나의 허망한 현상이지 바닷물은 그대로인 것입니다.
이렇게 바닷물처럼 그대로인 법이 중도법이라면 우리들이 일으키는 차별의 법은 어떻게 소멸될 수 있을까요. 자기 마음속에서 파생되는 인연의 법을 발견해 보는 일이 그 열 쇠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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