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홍랑과 홍법사

難勝 2009. 4. 19. 04:56


    홍랑각시의 영험 <<화성·홍법사>> 『아니 중국 천자는 자기 나라에 여자가 없어서 조선으로 여자를 구하러 보냈나.』 『다 속국인 탓이지요.』 『아무리 속국이기로서니 조정에서 이렇게 쩔쩔매니 장차 나라꼴 이 큰일이구려.』 『자, 이렇게 모여 있을 것이 아니라 어서 여자들을 피신시킵시다.』 『피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누구네 집에 어떤 딸이 있는지 다 알고 있을 텐데.』 신통한 묘책이 없어 수심에 잠겨 있는 마을 사람들 앞에 드디어 관원들이 나타났다. 욱모방망이를 든 포졸들을 앞세우고 외쳤다. 『얘들아, 마을을 샅샅이 뒤져 젊은 여자를 모조리 잡아 끌어 내라.』 포졸들에게 끌려 나오는 여인들의 치마는 땅에 끌렸으며, 강제로 허리를 껴안고 나오는 포졸들의 입은 헤벌려 있었다. 마을에서 자색이 뛰어난 홍만석의 딸 홍랑 역시 발버둥을 치며 끌려나왔다. 『오늘 우리는 중국 천자에게 진상할 처녀를 물색하러 조정의 명을 받고 나왔느니라. 우리 고을에선 홍만석의 딸 홍랑을 진상 키로 하였다. 만약 이를 거절한다면 왕명을 어긴 죄로 3대를 멸할 것이며 우리 홍법리 마을은 마땅히 폐촌을 면치 못하리라.』 관원은 득의양양하게 일장 연설한 다음 홍랑에게 말했다. 『홍랑아, 어서 분단장 곱게 하고 관아로 가자.』 어찌할 바를 모르던 홍랑은 넋을 잃고 주저앉은 아버지 홍만석의 모습과 자기만을 주시하는 마은 사람들을 보고 결심을 했다. 『가겠습니다. 나으리. 그러나 명나라에 가게 되면 모래 서 말과 물서 말, 그리고 대추 서 말을 가져 가게 하여 주십시오.』 『그야 천자의 애첩이 될 몸인데 무슨 소원인들 못 들어주겠느냐. 어서 가자.』 동헌 마루에 높이 앉은 명나라 사신은 곱게 차린 홍랑을 보자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헤헤… 조선에 미녀가 많다더니 이거 참으로 선녀로다!』 임진왜란의 상처가 채 아물기 전인 광해군 2년(1610), 홍랑은 명나라로 떠났다. 『허- 참으로 아름답구나. 네 이름이 무엇인고?』 『홍랑이라 하옵니다.』 『홍랑이라. 이름도 곱구나. 참으로 조선에 천상의 미녀 못지 않은 미인이 있었구나. 여봐라, 홍랑을 별궁에 거처토록 하고 매사에 불편이 없도록 하라.』 천자는 명을 내렸다. 천자의후궁이 되면서부터 홍랑은 말을 잃었다. 가져온 모래를 뜰에 뿌리거 목이 마르면 가져온 물을 마시고 배가 고프면 대추로 연명했다. 홍랑의 아름다운 자태는 날로 수척해 갔다. 고향과 부모를 그리며 염불로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아씨, 오늘은 제발 저녁을 드십시오.』 『아니 먹을 것이니라. 나는 명나라 후궁이 되었으나 오늘까지 명나라 음식은 커녕 물 한 모금 먹지 않았으며 명나라 흙도 밟짖 않았느니라.』 『내일이면 물도 대추도 떨어집니다. 이제 무얼 잡수시겠 습니까?』 『내일이면 내 생명은 다할 것이나, 죽어 보살이 되어 천자를 회개시킬 것이다.』 다음날 홍랑은 세상을 하직했다. 홍랑이 죽은 지 사흘째 되던 날. 천자는 우연히 병을 얻었으며 병세는 날로 악화돼 혼수상태에 빠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천자는 비몽사몽간에 홀연 어디선가 들려 오는 여인의 목소리를 들었다. 『오, 너는 홍랑이 아니냐?』 『그러하옵니다. 소첩이 폐하를 구하러 왔사오니 제 말을 잘 들어 주십시오.』 홍랑의 말소리는 허공에 울리고 천자는 두려움에 떨었다. 『폐하, 앞으로는 백성을 아끼고 불도를 닦는 착한 임금이 되십 시오. 그리고 소첩을 고향으로 보내 주옵소서.』 『내 착한 임금이 되도록 힘껏 노력은 하겠으나 너를 어떻게 고향으로 보낼 수 있겠느냐. 제발 짐을 살려다오.』 『폐하, 소첩의 혼이 담긴 보살상을 조성하여 무쇠 사공과 함께 돌배에 태워 보내십시오.』 『아니 그럼 홍랑은 보살님이시었던가.』 천자는 석달 열흘에 걸쳐 부처님께 기도를 올리며 천하유명한 석공과 철공을 모아 돌배와 무쇠 사공을 조성했다. 그러나 괴이하게도 홍랑의 보살상은 완성될 무렵이면 두쪽이 나곤 했다. 세번, 네번 다시 만들어도 마찬가지였다. 천자는 쉬지 않고 일심으로 기도했다. 어느 날 새벽 인시 북소리의 여음에 이어 인자한 음성이 들렸다. 『착하도다. 대왕은 홍랑의 마지막 모습을 보살상으로 새겨야 하느니라.』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보니 천자는 불상 앞에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정신을 차려 홍랑의 모습을 그려 봤으나 영 떠오르지를 않으니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그때 홀연 한줄기 바람이 일며 홍랑이 나타났다. 수척하면서도 인자한 모습 그대로. 이를 본 천자는 죄업을 뉘우 치며 전신을 찌르는 아픔을 느꼈다. 『홍랑보살님, 짐의 죄를 용서하십시오.』 다시 석공을 불러 보살상을 조성한 지 백일째 되던 날 홍랑보살 상이 완성됐다. 천자는 크게 잔치를 베푼 후 홍랑보살상을 12명 쇠 사공과 함께 돌배에 태워서 물에 띄웠다. 돌배는 지금의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 홍법리 홍랑의 고향 앞바다 에 닿았다. 때는 광해군 3년(1611)의 이른 봄. 마을에선 홍랑보살의 영험을 기리기 위해 절을 세우고 홍랑 보살 상을 모신 후, 절 이름을 홍법사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