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선덕여왕과 여근곡(女根谷)

難勝 2009. 9. 21. 05:21

여근곡(女根谷)

 

부산(富山)은 경주시(慶州市)에서 대구(大邱)방면(方面) 약 16km 건천읍(乾川邑)과 산내면(山內面) 사이에 자리잡고 있으며 높이 640m의 산으로 전설(傳說)과 사적(史蹟)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지리지(地理志)에는 부산(夫山)이라고도 기록(記錄)되었으며, 주사산(朱砂山)과 오봉산(五峯山) 등도 부산내(富山內)에 있는 주사암(朱砂庵)과 오노봉(五老峯) 등에서 온 별칭(別稱)이다. 부산(富山)에서 가장 유명(有名)한 곳이 여근곡(女根谷)이다.

 

 

산 지형이 영락없이 여자의 벌리고 있는 다리 가랭이와 그 국부를 닮았다고 하여 여근곡이라 한다. 현재 여근곡에는 유학사라는 조그만한 사찰이 있고, "옥문지(玉門池)"라는 샘에서 흘러나오는 우물이 있다.


설화에 얽힌 유래

오봉산 중간 산허리를 뻗은 능선은 동쪽 앞산을 향해서 유순히 내려 뻗었는데 사람들은 썹들이라고 부르지만 어떤 괴짜스러운 사람들은 -씹들-이라 부른다. 발음이 비슷한데다 동내 뒷산이 여근곡(女根谷)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마을에 바람난 처녀가 많다는 우스게 말도 있다. 음기가 새기 때문에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나간다는 속설이다. 이 신평리 마을에 경부고속도로가 생겨서 오봉산 산허리를 달랑 잘라 놓은듯 별로 좋은 관경은 아니다. 이 썹들 마을 뒷산을 신라때부터 흡사 여자 성기의 골짜기같다고 해서 일찍부터 이 골짜기 마을을 두고 여근곡이라고 불렀다. 서면들과 건천읍을 지나가는철길과 일반국도, 지금은 고속도로까지 이 앞을 달려 가고 있지만 차창으로 서쪽 산을 쳐다 보노라면 이 능선과 계곡이 흡사 여성의 그 곳을 닮아서 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옛날 경주 부윤이 부임하기 위해 내려오면서 이 곳을 지나게 되면 반드시이 여근곡을 보게 되는데 재수가 없다고 해서 영천에서 안강으로 가는 노팃재를 넘어 돌아갔다고 한다.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은 매우 총명하고도 현명한 여왕이었다. 이 여왕이 중국의 황제로부터 작약 꽃씨와 그림 한 폭을 선물로 받게 되었다. 여왕은 이 선물을 펼쳐 보고 "이 꽃에는 향기가 없을 것이다." 라는 의미 심장한 말을 했었다. 신하들이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왜냐면 그 그림에는 나비가 그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신에게 남자가 없는 여왕이라고 놀리려고 일부러 선물을 보낸 것으로 알아챘기 때문이다. 사실 황제가 보낸 꽃씨는 싹이 트지 않았다. 이 씨가 삶은 꽃씨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선덕여왕은 날카롭고 예리한 통찰과 총명함이 있었다.


때는 선덕여왕 5년의 일이다. 어느 추운 겨울이었다. 어인 일인지 개구리 우는 소리가 왕궁안 옥문지에서 요란히 들려왔다. 한 겨울에 개구리소리라니 가당치 않은 일이다. 신하들은 틀림없이 어떤 불길한 흉조라고 수군거리고 있는데 현명한 여왕은 무슨 생각에서였슴인지 두 사람의 장군을 불렀다. 그러면서 명령하였다. 『지금 당장 달려가 서북쪽 여근곡에 적을 섬멸하라』라는 것이었다. 지금 건천읍 신평리 썹들 여근곡에 출전할 것을 명령한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곳에는 500여명의 백제 기습군사가 숨어서 진을 치고 있었다. 물론 출동한 신라군은 계곡 속에 숨어 잠복하고 있던 적군을 포위해서 섬멸하고 말았다. 그 뒤 신하들은 여왕에게 어떻게하여 적군의 매복을 알아차렸느냐고 물었다. 하얀 것은 여자를 가리키는 것이고, 곧 이것은 서쪽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개구리가 하얀 것은 여성의 기운이 왕성한 그 곳 옥문의 여근곡을 가리키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옥문에 들어간 것은 힘을 잃고, 맥을 추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선덕여왕은 이렇게 설명을 했다. 지금와서 아주 오랜 일을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이 골짜기 속에 수백명의 군사가 숨어 있다가 기습전을 감행할 만한 곳은 못된다. 다만, 지리적으로 여근곡에 대한 전설처럼 어찌 그리도 멀리 혹은 가까이서 보아서도 이상하리만큼 그곳이 둥글고 또 돋아 있어서 가운데의 도툼한 모양은 그림으로 그려도 어떻게 여자의 그것과 흡사히 닮도록 그릴수 있을까 할 정도로 닮아 있다. 그런데다가 그렇게 도툼하게 불그레한 한복판 밑에서는 사시사철 질퍽한 물이 가뭄없이 쏟아나고 있다. 바로그 밑에 물을 받아 가두어 두는 자그마한 연못이 바로 사서에 나오는 전설을 그대로 뒷받침해 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여근곡의 전설 그대로 산등성이 넘어 부산성에 적이 넘어 들어와 여기서 진을 친 것이 아닌가하는 추측을 갖게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6.25 때의 일이다. 두 달만에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인민군이 경주를 점령 직전에 부레이크가 걸리고 말았다. 적의 밀물 같은 포화가 오봉산 아래에 있는 단석산을 향해 공격했지만 이곳은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명장 김유신장군의 혼이 깃들어 있는 수련장이라, 그렇게 경주를 진격하려고 했지만 수포로 돌아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또 한편, 이야기로는 이 서면에 위치한 여근곡인 썹들의 음기가 백제군을 견뎌내지 못하게 포로로 만들었듯이 인민군의 공격은 하필 경주 경계인 서면 외곽까지 들이닥쳐 왔지만 이상하게도 한발짝도 들어오지 못한 것이 바로 이 여근곡의 음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도 향토적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

 

문제의 발단이 된 '삼국유사'의 '여근곡'에 관한 기록부터 다시 한번 살펴보자.

'어느 겨울날, 도성(都城) 인근에 있는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에 난데없이 개구리들이 모여 울어댔다

. 여왕은 즉시 두 명의 각간(角干)에게 2천명의 군사를 주어, 서쪽 부산(富山) 아래 여근곡에 매복해 있던 백제군사 500명을 섬멸케 하였다. 신하들이 그 지혜를 궁금해 하자 여왕은이르기를 '성난 개구리는 병사(兵士)의 상(像)이요, 옥문은 곧 여근이다. 여자는 음(陰)이고 그 빛은 흰데, 흰색은 곧 서쪽을 뜻한다.

그러므로 서쪽의 여근곡에 적이 있음을 알았고, 또 남근(男根)이 여근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기 때문에 적을 쉽게 잡을 줄 알았다'고 말했다.' 이 기록의 그 어디에도 풍수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