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 자살과 사찰이 존재하는 이유
조계종의 원로스님 한 분이 자살을 하였습니다.
사후, 암자 재산분배에 관한 언급을 한 유서를 남겼다고......
서로의 이해관계가 깔려 있는 문제이므로 간여할 입장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쯤에서 사찰이 존재하는 이유를 한번쯤 짚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가람이 산 속에 있다는 것과 스님이 존재하는 것은 성스러운 일입니다.
수행이 쉽지 않은 일이고 고행의 연속이며 개인의 자유가 어느 정도 제약을 받고 있지만, 스님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그런 고매한 인격체는 아닙니다.
지금 각 사찰에서는 음력의 달에 올리는 예수재(預修齋)와 천도재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생전(生前)예수재라고도 불리는 이런 행사는 원래 도교의 예수시왕생칠재의(預修十王生七齋儀)애서 유래하였으나 불교가 수용하여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불법의 숙명론과는 맞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 접어두겠습니다.
전국적으로 고찰을 합하여 불교와 관련이 있는 사찰이나 포교당, 법당 등은 약 3만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불교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사찰도 있지만 반대로 개인의 사상에 의한 설립도 있습니다. 심지어 토속신앙이나 무속의 세계마저도 불교와 관련이 있다고 보면 그 수는 엄청 많을 것입니다. 불교에 대한 혼란이 발생하는 근본이기도 합니다만 어쩔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찰이 존재하는 이유는 중생 때문입니다.
승이 존재하는 이유 또한 중생 때문입니다.
삼보가 존재하는 것 또한 중생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중생이 몸과 마음을 의지하며 쉴 곳은 그리 많지 않다고 불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지나는 길에 들려 잠시 머물다 간 소설 속의 사찰의 모습과 정서와는 먼 거리가 있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영악해 졌는지는 모르지만 요사채의 추억은 이미 멀어진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상당기간 동안 사찰은 스님들만의 공간으로 머물고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사찰을 찾고 스님을 찾으려면 입장료를 내야 합니다.
이유야 어떠하든 그렇게 세월이 흘렀습니다.
스님과 중생의 거리감이 생긴 연유이지만 그 거리감이 좀처럼 가까워지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일부나마 스님과 불자와의 공간이 좁아지긴 하고 있습니다만 따지고 보면 호구지책의 한 방편입니다. 이것을 두고 사찰의 개방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찰의 개방은 건물을 포함한 일체 마음의 공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체를 내려놓을 수 있는 곳, 그리고 무소유의 지혜일 것입니다.
사고가 많은 세상입니다.
돌아서면 날벼락이 떨어지는 일들이 부지기수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귀가 침범하고 마가 날뛰는 말법에서 울고 우는 중생이, 짧은 시간이나마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말 한마디를 들을 수 있는, 마음을 위로 받을 수 있는, 그래서 훌훌 털고 세상을 다시 유람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콩나물밥이라도 웃으며 나눌 수 있는 의미 있는 그런 공간을 불자들은 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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