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비형랑 설화

難勝 2010. 9. 17. 07:54

 

비형랑

 

비형랑(鼻荊郞, 581년 ~ ?)은 진지왕의 사생아(私生兒)로, 진평왕 때의 인물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비형랑은 진지왕이 사량부의 미인 도화녀(桃花女)와 사통하여 낳은 자식이다. 579년에 진지왕은 도화녀를 불러 후궁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도화녀는 남편이 있다며 거절하였다. 그 해 진지왕은 폐위되어 죽었다. 2년 뒤인 581년, 도화녀의 남편이 죽자 진지왕의 귀신이 도화녀에게 나타나 사통하였다.

 

이 이야기를 듣게 된 진평왕은 비형랑을 불러 궁중에 살게 하고 15세 때 집사(執事) 벼슬을 주었다. 그런데 비형랑은 밤마다 궁궐을 빠져 나가 밖에서 놀았다. 이에 왕은 병사들을 파견해 지켜보게 하니, 비형랑은 귀신과 놀고 있었다. 이에 왕이 비형랑을 시켜 강에 다리를 놓게 하니 하룻밤 사이에 다리가 완성되었다.

 

하루는 진평왕이 비형랑에게 묻기를, 귀신 중에 정사를 도울 만한 자가 있느냐고 했다. 이에 비형랑은 길달(吉達)을 추천하였다. 당시 각간 임종이 자식이 없어 왕은 길달로 하여금 임종의 양자가 되게 하였다. 임종은 길달을 시켜 흥륜사(興輪寺) 남쪽에 문루를 짓게 하고, 길달이 거기에서 밤마다 자니, 사람들은 이를 길달문이라고 불렀다. 어느 날 길달이 여우로 변해 도망치니 비형랑이 귀신을 시켜 이를 잡아 죽였다. 이후로 귀신들이 비형랑을 두려워하여 모두 달아났다.

 

이에 당시 사람들이 비형랑을 우러러 노래를 지어 불렀다 한다.

 

 

비형랑 설화내용

 

신라 제25대 임금인 사륜왕은 성은 김씨, 시호는 진지대왕이라 하는데..

진나라 선제 8년(576)에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리기 4년동안 정치는 안하고 쾌락에 빠져 방종만을 일삼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왕위에서 끌어내히고 진평왕을 즉위 시켰습니다.

 

사륜왕이 왕으로 군림하고 있을때의 일입니다.

사량부의 일개 민간 여자로 얼굴이며 맵시가 복사꽃처럼 요염하게 생긴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도화랑(桃花郞)이라 불렀고 사륜왕은 도화랑의 아름다움을 전해듣고 그녀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그리고 동침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도화랑은 지아비가 있었으므로 왕의 제안을 거절 합니다.

"여자가 지켜야 할 것은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다는 것이옵니다. 지아비를 두고 다른 남자에게 가게 하는 것은 비록 제왕의 위엄으로써도 결코 안되는 일이옵니다."

 

왕은 도화랑을 위협해 보았다."죽어도 좋은가?"

도화랑은 태연히 대답하기를,

"차라리 저잣거리에서 목을 베일 망정 지아비 밖의 다른 남자를 따르고 싶진 않사옵니다." 

왕은 슬쩍 희롱하며 말하기를,

"만약 지아비가 없다면 되겠지?"

"만약 그렇다면, 될 수 있사옵니다." 

왕은 도화랑을 놓아 보냈습니다.

 

바로 그 해에 사륜왕은 왕위에서 폐위되고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륜왕이 죽은 뒤 3년 만에 도화랑의 남편도 또한 죽어 버렸고, 남편이 죽은 지 열흘쯤 되는 날 한밤중, 죽은 지 3년 때 되는 사륜왕이 생시와 꼭 같은 모습으로 도화랑이 자는 방으로 들어와서는 도화랑에게 얘기 했습니다.

"네가 이전에 허락했듯, 이제 네 지아비가 없으니 되겠지?"도화랑은 가벼이 응낙치 않고 그 부모에게 사실을 알렸고 도화랑의 부모는 허락을 했습니다.

"군왕의 말씀인데 어찌 피할 수 있겠느냐?"

결국 도화랑은 사륜왕과 동침 했습니다.

 

왕은 도화랑에게서 7일 간을 머물러 있었는데. 그 사이 늘 오색 구름이 도화랑의 집 지붕을 덮고 있었고 향내가 방안에 가득했다고 합니다.

7일 후에 사륜왕은 자취없이 사라졌고 7일 간의 동거로 도화랑은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달이 차서 아이를 낳으려는데 천지가 진동하고 향내가 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이름은 비형(鼻荊)이라고 지었습니다.

 

당시의 임금 진평대왕은 그 신기함을 듣고서 비형을 궁중에 데려다 길렀습니다.

비형의 나이 열다섯 살이 되자 왕은 그에게 집사란 관직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비형 소년은 매일 밤 궁중을 빠져나가 어느 먼 곳을 노닐다 돌아오곤 했습니다. 왕은 비형이 하는 짓이 의심스러워 용감한 군졸 50명을 시켜 그를 감시하게 했는데. 비형 소년은 번번이 월성의 성벽을 날아 서쪽으로 황천 냇가 언덕으로 가서 도깨비와 귀신 떼를 모아놓고 노는 거였습니다.

군졸들이 수풀 속에 숨어 몰래 엿보았더니 도깨비들은 한창 놀다가 여기저기서 들려 오는 새벽 종소리를 듣고는 뿔뿔이 흩어져 가고, 비형 소년 또한 날아서 궁중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군졸들의 보고를 듣고 난 진평왕은 비형 소년을 불러 물었다.

"네가 도깨비 떼를 거느리고 논다던데 참말이냐?"

비형 소년이 사실이라고 시인하자 왕은 그에게 한 가지 명령을 내렸다.

"그렇다면 네가 도깨비 떼를 부려 신원사 북쪽 개천에 다리를 놓도록 해라."

비형 소년은 진평왕의 명령을 받들어 그가 거느리는 도깨비 떼를 부려 돌을 다듬고 하여 하룻밤 사이에 커다란 다리를 만들었습니다. 도깨비들의 손으로 이루어진 그 다리는 귀교(鬼橋)라 이름지어졌다고 합니다.

 

진평왕은 비형에게 또 물어보았다.

"도깨비들 가운데서 인간계에 출현하여 정사를 도울 만한 자가 있겠는가?"

"길달이란 자가 있습니다. 그가 국정을 도울 만할 것입니다."

 

진평왕이 다음날 길달을 데려오라 명하자 이튿날 비형은 길달을 데리고 함께 왕을 뵈었습니다. 왕은 길달에게 집사의 직책을 내려주었는데 길달은 과연 충직하기 비할 데 없었습니다.

 

그때 각간(조선의 영의정 정도 되는 높은 벼슬) 임종에게 아들이 없기에 왕이 임종에게 길달을 양자로 맞아들이게 했습니다. 임종이 길달을 시켜 흥륜사 남쪽에 문루를 세우게 했더니, 길달은 문루를 세우고 매일 밤 그 문루 위에 가서 자곤 해서 그 문을 길달문이라 이름지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길달은 임종의 딸을 겁탈하고 여우로 변하여 달아났습니다.

화가 난 비형은 말을 타고 쫓아가 길달을 붙잡아서는 죽여 버렸다고 합니다.

 

이로 해서 그 도깨비 무리들은 비형의 이름만 듣고도 무서워 달아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이러한 비형을 두고 사(詞)를 짓기를,

 

선제의 혼이 낳으신 아들 비형 도령의 집 바로 여길세.

날고 뛰는 온갖 귀신들아, 이곳에 함부로 머물지 말게나.

 

향속에서는 이 글을 써붙여 잡귀를 물리치는 노래를 만들었고, 이 노래는 도깨비와 악귀를 물리치는 힘이 있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