尋劍堂

하심하며 아상을 녹이는 거룩한 수행, 절

難勝 2010. 10. 13. 06:48

 

절은 하심하며 아상을 녹이는 거룩한 수행

 

청견스님, 400만 배 후 무상-무아 체득해 ‘절 수행’ 보급
“단 일 배라도 새 마음-지극정성을 다해 올려야”

  

“절은 아상을 꺾는 것으로 진실한 자신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서산대사의 일언이다. ‘아상을 꺾는다’는 의미는 쉽게 다가온다. 절은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바닥에 조아려야만 완결된다. 자신을 철저히 낮추는 마음을 갖지 아니하고는 이뤄질 수 없는 행위다. 하심 하는 순간 스스로 아상을 꺾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진실한 자신에게 돌아가는 것’이란 무슨 의미일까? 부처님을 공경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만 갖는다면 진실한 자신에게로 돌아갈 수 있는 뜻일까!

 

청견 스님은 절에 대해 “아상을 녹이는 거룩한 수행”이라고 말한 바 있다. “수행인에게 아상만큼 무서운 독은 없다. 아상을 내려놓지 못하면 진여를 발견할 수 없다.” 청견 스님의 이 말은 곧 절을 통해 아상을 녹이면 진여를 발견할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서산대사가 말한 ‘진실한 자신’과 ‘진여’사이를 꿰뚫는 그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다.

 

예법의 절을 수행으로 격상

 

‘절’은 항상 우리 곁에 있었다. 불교에 입문하는 재가불자나, 출가입문 하는 행자 역시 처음으로 해야 할 게 ‘절’이다. 하지만 ‘절’의 중요성은 알아도 절을 수행 선상에 올려놓고 보는 이는 드물었다. 그러다 보니 절이란 불교입문의 한 과정, 또는 신심의 표현 정도로 인식되었을 뿐이다.

 

현대에 이르러 절을 수행 선상에 처음 올려놓은 스님은 성철 스님이라 할 수 있다. 백련암을 중심으로 진행된 3000배와 기도법회는 절 수행의 신호탄이었다. 하지만 절이 본격적인 수행단계로 진입돼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은 1990년대 후반이다. 그 중심에 청견 스님이 있다. 1997년 법왕정사에서 시작된 절 수행은 불자는 물론 일반인들에게까지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청견 스님은 ‘절’을 간화선이나 염불, 위빠사나와 같은 수행의 일직선상에 올려놓은 대표 인물이다.

 

청견 스님이 처음부터 절 수행에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다. 어려서부터 논산 쌍계사에서 자란 청견 스님은 출가 직후부터 화두를 들었다. 수좌 청견 스님은 그러나 1980년대 초 큰 사고를 당해 왼쪽 고관절이 빠져 3년 동안 누워있어야만 했다. 하루에도 수 백 번씩 입이 딱딱 벌어질 만큼의 고통이 찾아와 식은땀을 비 오듯 쏟아냈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수행자로서의 의지가 전무했다는 사실이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워 빨리 죽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지리산에서 수행중이던 은사 스님이 병문안 와서는 ‘염불’을 하라 권했다.

 

“이제 그만 이 세상 떠날 준비나 하라는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더욱이 지난 10년 동안 화두 들고 있는 저에게 염불을 하라니 치욕감도 들었지요. 당시만 해도 염불은 근기 없는 사람이나 하는 것으로 치부했거든요.”

 

며칠 지난 후 이른바 ‘저승사자’를 만났다. ‘정말 이러다 가겠구나!’하는 생각에 이르자 ‘염불이라도 하자’는 생각에 이르렀다. 관세음, 지장, 신묘장구대다라니 등 이것저것 다 해보았지만 별다른 효험이 없었다.

 

“신심이 부족하니 안 될 수밖에요. 염불을 하라는 은사 스님의 의미를 다시금 새겨 보았지요. 지금의 몸으로 애써 화두를 들어봐야 상기만 일으킬 뿐이니 염불에 주력하라는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은사 스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고 나니 육신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염불한다는 것도 싫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조건이나 바람 없이 신심과 공경심 만으로 ‘석가모니’ 정근을 시작했지요.”

 

화두에서 염불로 돌아선 후에는 무서우리만치 달려들었다. 잠자는 시간 외에는 하루 종일 전력을 다해 염불에 전념했다. 몸의 통증마저도 염불을 경책하는 스승이 되어갔다. 석가모니 정근 3년이 다 되어갈 즈음 어느 순간 염불삼매에 이르렀다. 호흡마저도 멈춰진 듯한 상태로 잠시 있었는가 싶었는데 그 시간은 일주일이었다. 순간 고통이 말끔히 사라졌다. 스님 표현대로라면 염불하는 ‘의식’만 있을 뿐 신체적인 고통도 잡념도 끊어져버렸다.
“부처님께 감사했지요. 절을 올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타인의 부축을 받으며 절을 올렸다. 그 때까지도 일 배 한 번 하기도 녹록치 않았다. 그래도 1년 동안 몸이 허락하는 만큼 절을 올렸다. 1985년, 조계사 법회 당시 대중 앞에서 발원했다. 1000일 동안 매일 3000배를 올리겠다고 말이다. 조계사에서의 300만 배를 마친 스님은 이후 봉정암, 홍련암, 보리암을 순례하며 100개 사찰 1만 배씩 총 100만 배를 올렸다. 지금도 청견 스님은 하루 세 번 108배를 비롯해 대중과 함께 매월 한차례 3000배를 올리고 있다. 청견 스님으로부터 절을 배운 대중만도 5만 여명이다.

 

청견 스님이 이처럼 대중들에게 절 수행을 강조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누구든 절을 하지만 제대로 절을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신심으로 시작한 절 때문에 무릎관절을 다친 불자들이 왕왕 발생하는 것을 보면 절도 그 방법을 제대로 알고 난 후 해야 하는 것이리라. 대중들의 절하는 법은 어디서부터 잘못 된 것일까.

 

“절을 경쟁하듯 빨리 해서는 안 됩니다. 올바른 자세로 절을 한다 해도 너무 빨리 하면 무리가 가는데, 자세도 제대로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100m 달리기 하듯 빨리 하면 더 큰 무리가 가지요. 호흡도 빨라지니 복식호흡을 못하고 가슴과 입으로 역 호흡을 합니다. 그러니 상기만 될 뿐 별다른 효험을 얻을 수 없지요. 그냥 운동 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청견 스님이 『절을 기차게 하는 법』이나 『숨을 기차게 잘 쉬는 법』등의 책을 내 보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손을 모으는 법부터 무릎 꿇는 법은 물론 허리 굽힘과 발가락 위치, 여기에 호흡법까지도 상세하게 정리해 놓고 있다. 각양각색의 절 수행법을 체계화시켜 놓은 것이다. 청견 스님은 절을 하는 의미부터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한다.

 

한 동작-숨 한 번도 알아차려야

“불보살님께 올리는 절은 지극해야 합니다. 내 마음을 다 바쳐 올리는 절은 절대 빠를 수 없습니다. 어서 빨리 108배 하자. 어서 빨리 1080배 끝내자 하는 마음으로 절을 하니 빨라지는 겁니다. 생각이 딴 데 가 있는 상태에서 올리는 절은 그냥 몸동작일 뿐입니다. 횟수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일 배를 올리더라도 정성을 다해야지요.”

 

청견 스님은 절을 할 때 부처님이 바로 눈앞에 살아 계신다고 여기라고 한다. 부처님이 내 앞에 생생히 살아 앉아 있다고 여기며 하는 절에는 정성이 담겨 있을 것이다. 분명 온 마음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절이 하심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다 알지만 절하기 전에 하심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머리로만 알고 있을 뿐 가슴으로는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심을 통해 절을 하다 보면 분명 삼매 경지에 드는 것은 물론이고 나아가 무상과 무아를 체득할 수 있다고 했다. 이론적인 무상무아가 아니라 체험적 무상무아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청견 스님은 절을 하는 한 동작 한 동작과 단 한 번의 들숨과 날숨도 놓치지 말아야 함을 강조한다. 위빠사나의 ‘알아차림’과 매우 유사하다. 청견 스님은 미얀마, 태국, 스리랑카 등의 남방불교를 순례하며 그 곳의 위빠사나 수행을 체험한 바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절하는 것과 한 동작 마다, 한 호흡마다 알아차리며 하는 절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청견 스님의 절하는 법이 수행 선상으로 오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무조건 하는 절이 아니라 내 자신을 들여다보는 절인 것이다. 부처님 앞에서 지극한 마음으로 하심하며 올리는 일 배. 그 일 배가 이뤄지는 동안 취하는 동작 하나, 숨 하나까지도 알아차리는 집중력, 이 모든 것이 집약된다면 분명 어느 순간 삼매에 들 것이다.

 

“삼매에 들었다 해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삼매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의 마음이 또 어디에 가 있는지 보아야 합니다. 개인마다 업장이 다 다르겠지만 몇 번의 삼매로 그 업장이 모두 소멸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절이 익숙해지면 절을 하면서 ‘세세생생 지은 잘못 참회합니다’ 혹은 ‘부처님 크신 은혜 고맙습니다’하는 마음으로 절을 하라 권한다. 어두운 마음이라 하는 불평불만, 원망, 시기, 질투, 증오, 미움 등이 저절로 녹아내리며 환희심이 솟을 것이라 확신했다. 아울러 두려움도 극복하게 되어 항상 당당하고 떳떳한 마음가짐도 가질 수 있을 것이라 강조한다.

 

“업장소멸과 함께 복전도 돈독히 할 수 있습니다. 삼독이 가라앉으면 자비심이 발로 하니 자신은 물론 남도 이롭게 합니다. 복밭이 풍요로워지는 겁니다.”

 

절 하다보면 본래 부처 알게 돼

 

청견 스님은 절을 진정한 수행의 한 방편으로 활용하려면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본래 성불해 있다는 신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비록 자신이 중생의 삶으로 미혹되어 윤회하고 있지만 본래 나 자신은 본래 부처임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절하는 사람과 절을 받는 대상인 불보살이 둘이 아닙니다. 자타와 범성이 따로 없습니다. 부처와 중생을 가르지 않으며 똑 같은 평등한 자리에 서 있습니다.”

 

인도승려 늑나마제도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관하면서 절하는 게 중요하다’했다. 늑나마제는 나아가 ‘하나의 진법계(眞法界)에는 모든 것이 연기관계로 어우러져 있다’며 ‘하나에 절하면 일체에 절하는 것과 같으며 그렇게 법계에 진입하는 것’이라 했다. 이것을 늑나마제는 변입법계례(遍入法界禮)라 했다. 일심으로 절하는 마음 하나! 그 마음으로 우주 법계에 들어간다는 것을 사유해 보자. 절하는 순간, 내가 참마음 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이리라. 진여의 자리일 것이다. 서산 대사가 말한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일 것이다.


‘중생심의 물이 청정해지면 보살의 달 그림자가 나타난다(衆生心水淨 菩薩月影顯)’고 했다. 절을 통해 얻어 진 청정심에도 분명 진여는 자리할 것이다.

 

『원각경』에 ‘일심(一心)이 청정하면 일신(一身)이 청정하고, 일신이 청정하면 다심(多心)이 청정하고, 다심이 청정하면 시방중생의 원각(圓覺)이 청정하다’는 대목이 있다. 부처님 전에 올린 일 배가 시방중생을 청정케 한다 할 때 그 일 배를 어찌 소홀히 하겠는가. ‘절’은 분명 수행의 시작이요 끝일 것이다. 청견 스님은 절 수행을 하는 사람이라면 잊어서는 안 되는 점 하나를 일러주었다.

 

“항상 새 마음으로 절을 하세요. 어제 한 절을 오늘 이어서 하는 게 아닙니다.” 단 한 번의 절이라도 지극하게 하라는 또 다른 표현이요 당부일 것이다.